식물/보호수와 노거수

진전면 금암리 조산과 느티나무 노거수

천부인권 2015. 5. 4. 09:12

 

 

 

<2015/4/30 금암리 조산과 비보림 모습>

 

진전면 金岩里(금암리)仁星山(인성산, 643.8m)과 국시봉에서 벋어 내린 산줄기가 감싸 안은 형태의 계곡 안에 中村(중촌)마을과 上村(상촌)마을이 있는 형국이다. 또한 인성산과 국시봉에서 흘러 온 물이 모여 중촌천을 만들고, 마을을 지나고 들판을 축인 그 물길은 진전천에 합류를 한다. 풍수적으로 보면 좁고 길게 이어진 들판과 마을을 구성하는 모양이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부가 좁혀져 前窄後寬(전착후관)을 이루고 있다. 옛 선인들은 금암리의 우측 부분이 허했던지 나무를 심었고, 창원지역 내에서는 보기 힘든 가장 큰 조산을 만들었다.

 

 

 

 

 

金岩里 造山(금암리 조산)이라 명명하는 이 곳은 진전면 금암리 674번지에 위치하며, 금암리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에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올린 후 돌탑에 제를 지내는데 이를 조산제(造山祭)라 한다. 조산제가 끝나면 중촌마을 앞의 느티나무에 당산제를 지낸다. 막돌탑인 造山(조산)은 아랫부분이 넓고 위쪽이 좁은 전형적인 사다리꼴 돌탑으로 밑면 부분은 가로 8m, 세로 5.8m이고, 높이는 3.3m이다. 조산의 꼭대기에는 꼭지돌이 없고 1기의 막돌탑만 있다.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조산을 쌓은 것은 비보림과 함께 마을의 경계지점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한다. 이곳 비보림을 이루는 노거수는 푸조나무가 5그루이고, 느티나무가 6그루이며, 팽나무가 4그루 있다. 당 숲의 그늘로 인해 농작물에 피해를 주자 주위의 전답 주인들이 없애려고 했으나 동제의 신성을 유지하는 것이 마을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주민들의 반대로 없애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2015/4/30 마을 쪽의 조산 앞에는 제단이 마련 되어 있다

 

금암리 사단 金庵里 社壇

금암리 사직단社稷壇의 기록은 함주지咸州誌 단묘조壇廟條에 『비리곡리사단比吏谷里社壇』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比吏谷里社壇 在里東南 金伊庵」이라 기록했다. 「비리곡리 사직단은 마을 동남쪽 금이암에 있다.」

 

[출처]

함주지 – 단묘조 비리곡리사단

금이암사지(金伊庵寺址)
옛 여항면 금암리 상촌
여항면 금암리 상촌 마을에서 동남쪽 약 800m 정도 떨어진 마을 논 가운데에 금이암사지(金伊庵寺址)가 있다. 이 사찰에 대한 창건 년대 내력에 대하여는 전혀 전해 오지 않고, 다만 조선 초기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패쇄 되었다고만 하는데, 사지 주변에는 사리탑으로 추측되는 석탑과 축대 주춧돌만이 잔존하여 있을 뿐이다.
옛날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기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동암(東庵)과 남암(南庵)이 있었던 암지(庵址)만 식별할 뿐이고, 서암(南庵)과 북암(北庵)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절이 번창 했을 때는 쌀싯은 뜨물이 마을 입구까지 하얗게 내려 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당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후에 금이암(金伊庵)이 폐쇄되어 고성의 옥천사에 통합되었다고도 하고 쌍계사에 흡수되었다고도 하는데,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난초가 쌍계사에 있다는 것이다.

 

[출처]

함안군 여항면 – 우리면 소개(지명유래)

 

지금의 금암리金庵里는 금이암金伊庵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며 옛 지명은 비리곡리比吏谷里이다. 추측컨대 마을의 사직단은 조산 앞이나 옆에 있었을 것이고 세월에 의해 훼손된 후 사라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혹 기와 파편만 나온다면 사직단이라 주장해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에서 마을 사직단이 형체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성황당의 모습이고 조산형태의 것은 드문 현상이다.

 

 

 

<마을 방향서 본 비보림 풍경>

 

 

 

<2015/4/30 금암리 중촌마을과 느티나무 노거수 모습>

 

 

 

 

비보림을 지나면 금암리의 중촌마을이 좌측에 보이는데 마을 입구에 비보림의 노거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신목의 위엄을 자랑하며 서있다. 이 느티나무가 위치하는 곳은 금암리 529번지이다. 당산목의 나이를 마을 사람들은 500년은 훨씬 넘었을 것으로 말한다. 이 느티나무의 가슴높이 둘레는 각각 620cm540cm이고, 높이는 18m 정도이다. 진전면 지역에는 노거수 두 그루가 가깝게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곳 금암리 중촌마을의 느티나무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두 그루의 노거수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인다. 이렇게 나무를 심는 것은 풍수비보와 공동체 공간 조성을 하면서도 우리 선조들은 '均齊(균제)의 미학'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위치하는 거리에 따라서 마을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데 금암리 중촌마을처럼 규모가 작은 마을은 두 나무의 거리가 가깝고, 진전면 양촌리처럼 규모가 조금 더 큰 마을은 두 나무의 거리가 멀어진다.

 

 

 

 

 

금암리 중촌의 느티나무을 찾아보니 옛 돌 축대는 사라지고 일본식 견치돌로 둘레축대를 만들었는데 돌 사이를 시멘트로 메워 나무의 뿌리나 판근이 숨을 쉴 수 없게 시공을 하였다. 주민 중 한분은 이 당산목이 마을을 덮을 정도로 수세가 강했는데 지금은 나무가 줄어들고 병이 들어간다며 강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중촌마을의 느티나무 중 곧게 선 나무 근접 모습>

 

주민분에 의하면 마을 뒤쪽 산 가장자리에 여러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었는데 자연적으로 고사한 것도 있었고 몇 그루는 팔아서 마을 기금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중촌마을 느티나무 중 옆으로 벋은 노거수>

 

 

 

<견치돌로 축대를 쌓고 시멘트로 메꾸어 나무가 숨을 쉴 수 없도록 보수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