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 최씨가의 족보와 창원시 각지에 설치된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에 대한 금석문 오류는 수정해야 한다.
이제까지 파비니, 문인석의 가슴이니, 하면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창원이씨를 들먹였지만 호연공문집에 어머니의 성씨와 외할아버지의 이름 및 본이 확연히 밝혀진 이상 정열공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 청주 양씨가 창원 이씨로 잘못 기록된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
1. 최윤덕 상국의 출생 근거에 대해
통천 최씨가에서는 창원 이씨 부인이 최윤덕을 낳았다는 근거로 파비에 적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비(어떤 이유에서 파괴한 비를 말함)라는 것이 실존하는 것이라면 사진이나 탁본 등으로 증거를 남겼을 것인데 증거가 없다.
또한 족보에는「문인석 가슴부위에 기록 있음」이라고 하지만 창원 이씨라고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씨 중 창원이씨는 당시에 없는 성이고, 통천 최씨의 족보에도 막연히 창원 이씨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 창원 이씨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족보를 만드는 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통천최씨의 족보에 유독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족보를 신뢰하기 어렵다.
2. 창원이씨라 기록된 문건과 금석문
1) 양장공 신도비 해설문 (신본)
공은 두 번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경부인 창원이씨는 1남3녀를 낳고, 안동권씨는 3남을 낳았다. 아 영웅 호걸은 신령한 땅에서 태어나는 것이니, 백월산 정기 받아 父子 將相(양장공, 정열공) 이 태어나다.
장자 윤덕이 6세에 부인 창원이씨가 불행히 졸하니, 공은 자녀들을 종 양수척에게 위탁하고, 왜구소탕에 분주하여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2) 최윤덕 상국 동상 연보
창원광장에 세워진 최윤덕 상국 동상 측면에 금석문으로 세긴 연보에는 “최운해 장군과 정숙부인 창원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1096번지 속칭 정승골에서 출생하였다.”
3) 정열공 최윤덕 상국 연보
용지공원에 세운 최윤덕 상국 비와 연보에 “창원 북면 내곡리에서 최운해 장군의 장남으로 출생하다. 6세에 창원이씨 별세.”
4) 정열공 묘소의 연보
3. 정열공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는 청주 양씨라는 근거
1) 창원군지의 기록
1968년 김종하가 쓴 『창원군지』에는 “윤덕이 6세되던 신유년에 어머니 楊氏(양씨)가 별세하고 운해장군은 邊鎭(변진)의 임지로 떠나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 양수척가에 윤덕을 托養(탁양)하였다.
2) 호연공문집에 기록된 정열공 행장들의 내용
호연공최선생문집 (二十七)
西征記事---- 57페이지
崔襄莊公雲海 爲慶尙道體察使時 夫人昌原地私第 生子潤德未幾而歿 公方以有事於軍旅 三過其第而不入 有婢收而乳之 後潤德官至議政 父子俱爲國初名將(出貞烈公行狀)
서정기사
최 양장공 운해 경상도체찰사가 되었을 때 부인은 창원의 사제에 있었다. 아들 윤덕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공이 군사 일로 바빠 세 번을 집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못했다. 여자 노비가 있어 젖을 먹였다. 후에 윤덕의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다.
浩然公崔先生文集 (三十)
貞烈公行狀---- 63페이지
公諱潤德 字汝和 姓崔氏 歙谷人 系以通川 舊誌歙是通之屬縣也 有諱祿 仕麗末 爲護軍 於公爲大祖 有諱雲海 國初名將也 爲府使順興 日與倭奴戰 所獲牛馬 輒散與士卒 士感激 鼓勇連樹果積 遷朔州兵馬使 民有遺愛 陞西北面都巡問使 鎭合浦通川 進而爲承樞府使兵曹判書 諡襄莊 於公爲皇考 娶淸州楊氏 贊成之壽女 生公 楊夫人卒 襄莊公娶于安東權氏家 生二男 仲潤玉 系潤福 權夫人早卒 襄莊公受命在鎭邊 公與二弟托養于同閈 楊水尺家 初長公 膂力絶人 能挽强射----(하략)
丁卯仲夏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兼同知 經筵成均館事 安東後人 金羲淳謹狀
“공의 휘는 윤덕이며 자는 여화이다. 성은 최씨로 흡곡인이다. 통천을 계승하는 것은 옛 지지(地誌)에 흡곡은 통천의 속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휘(諱)가 록(祿)으로 고려말에 호군(護軍)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는 휘가 운해(雲海)로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합포와 통천을 鎭壓(진압)하였는데 나중에 承樞府事(승추부사) 兵曹判書(병조판서)에 이르고 시호(諡號)를 양장공(襄莊公)이라 하였다.”
“처음 청주(淸州) 楊氏(양씨) 찬성(贊成) 지수(之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최윤덕을 낳았고, 양씨 부인이 죽자 안동권씨에게 장가들어 둘째인 윤옥(潤玉)과 셋째 윤복(潤福)을 낳았다.
안동권씨도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 襄壯公이 변방으로 나가게 되자 최윤덕과 두 아우를 같은 동네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탁양(托養)하게 되었다.”
-정묘중하상한 자헌대부예조판서겸동지 경연성균관사 안동후인 김희순근장
김희순金羲淳 : 1757년(영조 33)∼1821년(순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태초(太初), 호는 산목(山木)·경원(景源). 아버지는 군수 이인(履仁)이며, 어머니는 참봉 이극현(李克顯)의 딸이다. 1783년(정조 7)에 생원이 되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직서직장에 제수되었다. 같은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사서를 강론하였다. 1791년 부수찬·삼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사간으로서 이가환(李家煥)의 부당함을 상소하다 삭직당하였으나, 곧 포천에 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1793년 상소한 일이 말썽이 되어 파직되었다. 1796년 괴산군수와 서산군수를 지낸 뒤, 1799년 응교·부응교·세자보도 등의 임무수행중 영남지방에 기근이 들어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그뒤 전라도관찰사·승지를 거쳐, 1800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당상(實錄堂上)에 제수되었으며, 시강원보덕·이조참판을 거쳐 1803년 영남안찰사, 1806년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참판과 한성부서윤·이조참판·한성부판윤·대사헌 겸 홍문관제학·비변사유사당상 등을 두루 지냈다. 1809년 병조판서·이조판서, 이듬해에 호남관찰사, 1812년 광주유수·이조판서 겸 세자빈객으로 인재등용을 고르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사감을 가졌던 전 참의 한시유(韓始裕)의 무고로 인하여 사직당하였다. 후에 정헌으로 승계한 뒤 종부시제조·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19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임중 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뒤 죽었다. 어릴 때부터 문사에 능하였으며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다음 카페 백천강회 https://cafe.daum.net/baiqian/Rrjd/103?q
行狀 --(三十二)--67페이지
大匡輔國左議政貞烈公崔先生 諱潤德浩然其號也 先生世居于嶺之昌原府 茂陵山下 而通川之蓮隊山 碧溪洞 有別業焉 先生之考諱雲海 官至中樞府使行兵曹判書 諡襄莊 先生生于昌原本第 維岳降神茂山不草者 是其靈異也 母貞敬夫人淸州楊氏 後母貞敬夫人安東權氏 楊夫人是實生先生 纔孩提楊夫人薨 判書公 王事靡盬 不遑家食 故使女婢乳之 托養于外戚楊水尺 先生初絶倫之勇---(하략)
崇禎三丁卯仲夏 通政大夫行工曹參議 海平后人 尹文東 謹識
대광보국 좌의정 정렬공 최선생 휘윤덕 호연은 그 호이다. 선생의 세거지는 영남의 창원부 무릉산 아래이다. 통천 연대산 벽계동에 별업이 있다. 선생의 고(考)의 휘는 운해로 벼슬이 중추부사 행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장이다. 선생은 창원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산악의 신이 강림하여 무릉산에 풀이 나지 않았으니 신령하고 특이함이 이와 같다. 어머니 정경부인 청주양씨이고 후모(後母)는 안동권씨이다. 양부인이 실제 선생을 낳았다. 아주 어린 때에 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판서공이 나랏일을 소홀히 하지 못하고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어 여비(女婢)로 하여금 젖을 먹이게 하고 외척인 양수척의 집에 맡겨 길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맹이 남달랐다.--------
숭정3년 정묘 중하 통정대부 행공조참의 해평 윤문동 삼가 씀
호연공문집 책머리에 글을 쓴 사람
이민보(李敏輔)=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시강원의 동궁요속(東宮僚屬)에 임명되었고, 장악원정을 거쳐 1788년 동부승지에 특배되었으며, 1790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791년 공조판서로서 장악원제조를 겸임하면서『용비어천가』·『악학궤범』 등의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분류,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1791년 조흘강시관(照訖講試官)으로 임명된 윤영희(尹永僖)가 시험에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을 때, 의금부당상으로서 치죄를 잘못하였다 하여 파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형조판서로 기용되어 내직에 임명되었다.
도총관을 거쳐 1795년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음관(蔭官)으로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조선 초의 황희(黃喜)의 아들 수신(守身)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 뒤 노인직으로 판돈녕부사·판중추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저술활동]
저서로는『풍서집』 18권과 노론의 시각에서 당쟁을 논한『충역변(忠逆辨)』이 있다.
4. 청주양씨 서평군파 시조 양지수 비문
서평군묘비명에는 「청주양씨는 우리나라의 대성인데 서평군 휘 지수는 중세 사람이다. 한나라 승상이며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일컫는 휘 진(震)의 후손이다. 휘 선재와 휘 간(幹)과 휘 인보(仁保)는 공의 高·曾·祖 이신데 元나라에서 다 정승(政丞) 벼슬을 하셨으며, 아버지의 휘는 기인데 또한 원나라 때 중서성정승(中書省政丞)이었다. 중략...... 사위는 판서 최용(崔溶)과 이문화(李文和)이며, 셋째 딸은 노왕비(魯王妃)가 되었고, 막내 사위는 최운해(崔雲海)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기록 > 문화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명 조식 선생에게 향을 올리는 여재실 (0) | 2015.11.27 |
---|---|
한국의 스톤헨지 창원 환주산과 회원현성지 (0) | 2015.09.02 |
창원 마천동 절충장군 주의수 묘 (0) | 2015.03.26 |
하동 진교리 삼층석탑 (0) | 2015.03.19 |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남해 덕신리 하천재 (0) | 2015.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