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진주지역 최초로 남명을 모신 대각서원

천부인권 2016. 9. 17. 10:43



<2015.3.6. 진주 수곡면 문화재 탐방에서 만난 대각서원>

 

200431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4호로 지정된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大覺書院(대각서원)을 찾은 때는 진주지역 수곡면 문화재 탐방을 할 때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무작정 찾아간 대각서원은 수곡면 대각마을을 지나 나지막한 야산자락에 위치했다. 입구는 어수선했으나 담장은 깨끗한 모습이었고 제초작업 등도 잘 된 편이었다.




<대각서원 입구인 대문채에 있는 비흥문 편액>


 

晋州 大覺書院(진주 대각서원)1610년에 건립되었으나 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훼철되었다가 19184월 초4일에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 마을에 있던 서원을 옮겨 지으면서 사당을 건립하지 않아 현재 사당이 없는 모습으로 건설 되었다.

남향을 취한 대각서원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대문채가 출입문 구실을 하도록 건설되었는데 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대문채 입구에는 丕興門(비흥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각서원은 정면 5,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 대청 2,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 양식은 소로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세 개인 3량 집이다.




<대각서원 강당>


대각서원의 강당에는 大覺書堂(대각서당)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 편액은 작고한 진주지역의 유명한 서예가 隱樵(은초) 鄭命壽(정명수: 1909~2001)씨가 庚子年(경자년: 1960) 봄에 쓴 글이다. 이 편액에는 자신의 이름을 烏川命壽(오천명수)이라 기록 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20051223일에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는 이렇게 기록 했다. “烏川命壽(창씨명-기자 주), 시국광고 게재자 호는 은초이며 194115일자 <매일신보>흥아유신(興亞維新)’을 축하하는 시국광고를 봉산정 정명수의 명의로 게재했다. ‘흥아유신194011일 조선총독 南次郞이 시필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대동아 해방의 성전을 기리는 말이었다.일제말 진주경방단장(요즘의 민방위대장과 비슷-기자 주)으로 활동했다.”

일제당시 이름 조금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매국노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매국노가 아닌 지식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후대 사람들이 기억을 해야 한다.






<동재>



<서재>



<서재의 측면>




 

대각서원이 처음에는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만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대각사(大覺祠)가 시초이다. 하항은 남명의 문인으로 1567(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효심이 지극하고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서(性理書)에 전념하여 소학군자(小學君子)라 불리기도 하였다. 수곡리 대각마을 각봉(覺峰)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각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하항은 수우당 최영경(崔永慶)과 교유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저서로는 각재집(覺齋集)이 있다. 대각서원은 산청 덕천서원 다음으로 남명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올리는 진주지역 최초의 서원이라 한다. 이후 남명의 문인인 손천우(孫天佑), 김대명(金大鳴), 하응도(河應圖), 이정(李瀞), 유종지(柳宗智), 하수일(河受一)6분을 배향하여 大覺七賢(대각칠현)을 모셨다.[출처 : 경남 문화재정보시스템]

 



<대각서당 담장 옆에 서있는 소나무 노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