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고성 소을비포성지를 찾았더니

천부인권 2016. 9. 30. 06:00



<2016.9.25. 동화리 바다에 도착하니 소을비포성지가 보인다.>

 

固城所乙非浦城址(고성소을비포성지)199474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군사요충지이다. 이곳을 시간을 내어 찾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의 완역판에 나오는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임진년(1592) 413,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3일에 서울에 무혈입성 했지만 선조는 중국으로 도망을 가고 없었다. 경상우수영이 바다에서도 수적 열세로 인해 왜적을 막을 길이 없자 전라좌수영에 도움을 청했고 나라의 허가를 받은 이순신 장군이 좌수영 본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기 위해 경상도로 항해를 한다.




<망원렌즈로 복원한 북문을 담았다.>


 

난중일기의 기록은 이렇게 적었다.

初三日壬申 細雨終朝 招中衛將 約明曉發行 卽修啓聞 是日 呂島水軍黃玉千 逃避其家 捕斬梟示

53[양력 612]<임신>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곧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 날 여도수군 黃玉千(황옥천)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


初四日癸酉 晴 質明發船 直到彌助項前洋 更爲約束 由介伊島 過平山浦尙州浦彌助項 自初五日至二十八日缺

5월 초4[양력 613]<계유>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우부장·중부장·후 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서 찾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 평산포·곡포·상주포·미조항을 지나갔다.(이 뒤로 28까지 빠짐)

[54-장계] 우수사 이억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공문을 보낸 사연을 장계했다. 이 날 그 시각에 여러 장수들과 판옥선 24, 협선 15,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떠나 경상우도의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55-장계] 소비포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급히 달려갔으나 그 도의 우수사 원균은 약속한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거느린 경쾌선으로 당포로 빨리 오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냈다.





<1872년 지방지도의 舊所非鎭圖(구소비진도) 모습>

 

이렇게 하룻밤을 지낸 소비포의 모습은 어떤지 검색을 하다가 ‘1872년 지방지도舊所非鎭圖(구소비진도)가 있음을 발견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舊所非鎭圖(구소비진도)라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날 위치는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398-4번지이다. ‘1872년 지방지도를 미리 보았다면 복사를 해가지고 찾아 갔을 것이다. 당시의 지도 그림을 보면 성곽은 있으나 북문과 옹성 및 홍예문으로 복원을 한 남문 등에 대해 좀 더 의미 있는 접근을 했을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의 舊所非鎭圖(구소비진도)를 확대한 모습>


이 구소비진도의 해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權管(권관)을 두었다가 1491(성종 22)에 성을 쌓았다. 1604(선조 37) 거제의 水營(수영) 옛터로 옮겼다가 1606년 다시 이곳으로 移設(이설)하여 別將(별장) 1명을 두었다. 이곳은 깊숙한 두 개의 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鞍馬島(지금의 안장섬)海門(해문)을 막고 있어서 해안 기지로서는 매우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지도는 진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회화식으로 표현하였는데 매우 소략한 편이다. 당시 鎭城(진성)은 많이 훼손되어 성문도 없어진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의 건물과 별장이 기거했던 內衙(내아)도 그려져 있다. 船所(선소)에는 배의 모습도 종류별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어촌체험마을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봉수대 모양의 돌탑을 세워 두었다.>

 



<동화리 마을과 소을비포성지와 잔잔한 앞바다를 광각렌즈로 담아 봤다.>


 

이후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이런 성지들은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리고 겨우 흔적만 남긴 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남해안 관광벨트 계획으로 이런 곳들이 다시 각광을 받으면서 所乙非浦城址(소을비포성지)’는 복원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복원사업은 지난 1998년부터 시작하여 성곽 총 길이 335m(높이 3.2m, 5m)145m가 보수됐고 나머지 190m2004년까지 마무리 되었다. 총 사업비 24억원(국비 12억원, 도비 42천만원, 군비 22700만원)으로 소을비포성지 복원사업이 시작되는데 토지매입이 15271, 지장물 10동 등에 48천만원, 성곽보수공사에 22천만원이 소요됐다. 이후 고성군은 나머지 17억원으로 소을비포성지 전문발굴조사팀을 구성, 종합적인 정비계획을 수립한 후 동문지, 서문지, 북문지 등 3개의 문지와 잔디식재 등 주변정비사업도 함께 추진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바닷가 팔각정과 소을비포성지>



<소을비포성지 북문으로 접근하면서>



<북문지가 옛 모양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것은 수원화성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원과정에서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회 측은성지주변에 옛 원형이 남아 있는데도 석축의 모양과 방식, 높이 등이 전혀 다른 막 쌓기 식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원형대로 복원되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 소을비포성지는 둘레 825, 높이 14(4.2m)으로 문헌상에 기록돼 있는데 현재 복원된 성 높이는 2~3m에 불과하여 원형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은 성지의 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고 있지만 방문객들은 쓰레기나 버리고 마을에 아무른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또한 성지복원을 하면서 기존의 성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은 어디로 가져갔는지 모두 없애버렸다고 했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성곽 돌을 보면 분명 이곳의 돌도 아니고 예전의 성곽돌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북문을 복원하면서 성곽에 쌓은 돌과 완전히 다른 화강석을 다듬어 성문에만 사용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북문지의 화강암을 자세히 보면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약 1.5cm가량 안쪽으로 들여쌓았다. 밑에서 보면 위용과 함께 웅장해 보이고 위에서 보면 일직선인 것처럼 보여 안정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오르는 계단도 이처럼 들여쌓아 균형미를 맞추어 두었는데 여기서 그런 것을 보게 된다.

 





북문지의 문루에는 문루의 이름이 없다. 이왕 문루까지 만들었다면 이름을 지어 격조 있는 현판을 달아 두었다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문루에 올라 옛 선소가 있었던 바다와 봉수대가 있는 좌이산을 담았다.>





이곳 所乙非浦城址(소을비포성지) 북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전기에 설치된 소을비포진에 위치했던 곳이며 성곽 축조시기는 성종-선조 간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사량성 가배량성과 더불어 왜구 방비를 위해 남해안 고성만에 축조한 수군기지로서 임진왜란시에는 인접한 자란도와 가용포에 고성 현치소를 일시 이동하면서 적극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은 해안에 돌출한 구릉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8부 능선상에 타원으로 축조한 석축성이다. 현재 둘레 200m 높이 3m 규모의 성벽이 지상에 남아 있고 북쪽 체성에 성문 흔적이 있다. 성벽은 자연 대석을 이용하여 협축한 전형적인 조선전기 관방성 축조법을 가졌으며 주변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해자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佐耳山(좌이산)蛇梁鎭主縫(사량진주봉) 봉수대는 이 성의 別望(별망)처럼 근접해서 위치하고 있다.

 







<성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래정씨 전서공파 문산제>



<東萊鄭氏典書公波洫淵大宗會>



<'1872년 지방지도' 구소비진도와 건물터를 비교하면 건물지의 위치와 모양도 이상하다,>







<虹霓門(홍예문)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