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오량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신광사의 이모저모

천부인권 2016. 10. 4. 09:43



<2014.11.27. 오량리 신광사 일주문>

 

거제도의 관문이라 말할 만 한 오량리는 烏良城(오량성)이 있어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만 19722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이 된 오량마을 뒤 산 중턱에 위치한 柛光寺(신광사)烏良石造如來坐像(오량석조여래좌상)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오량마을은 오량성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고 옛 西門址(서문지)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서문지 우측에는 보호수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가 서있고 오량성 안쪽으로 들어가서 남문지로 연결 된 도로를 따라 마을 뒷산인 백암산 중턱에 이르면 신광사라는 절집이 나온다. 처음 마주하는 일주문을 지나 150m여를 오르면 신광사 주차장이다. 이곳 신광사에서 오량마을 쪽을 보면 견내량의 바다가 조망되어 풍경도 좋은 편이다.




<아래 주차장에서 바라 본 신광사>



<철웅선사 부도비>


 

영담당 철웅 대선사(映潭堂 哲雄 大禪師 : 1933~2011)부도 비에서 오량마을 방향을 보면 바다가 보인다. 철웅선사의 속명은 李奎馨(이규형)이요 법명은 哲雄(철웅), 당호는 映潭(영담)이다.




<연지와 해수석조관음보살입상>





烏良石造如來坐像(오량석조여래좌상)1950년 무렵 절골지라는 지명을 가진 石佛庵(석불암) 밑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된 뒤 석불암에 모셔지게 되었다. 거제도의 절집은 근래에 이루어진 것이 거의 다이다. 그런 거제도에서 이런 큰 불상이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며 거제도의 절 규모를 짐작케 하는 좋은 자료이다.

이 석불은 1170년에 고려 제18대 왕 毅宗(의종)이 거제도 오량성에 유배를 와서 머물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白岩山(백암산;495m) 자락에 廢王成(폐왕성)[屯德岐城(둔덕기성)]을 쌓고 3년간 머물면서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신광사 종각>




<신광사 대웅전>



<신광사 대웅전의 편액 無碍正遍知>

無碍正遍知(무애정변지)正遍知(정편지)如來十號(여래십호)의 하나로 대웅전과 같은 의미이다.

 




烏良石造如來坐像(오량석조여래좌상)이 신광사에 안치된 사연이 전하는데 이곳 절골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견 되자 통영 안정사에서 이 석불을 모셔가려고 인부들을 시켜 옮기기 시작했는데 10m 정도 움직인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옮기려하니 석불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부를 더 많이 동원 했음에도 옮기지를 못해 부처의 뜻으로 알고 이곳 신광사에 석굴암을 만들어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오량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석굴의 입구에는 三千佛祖五十三佛展(삼천불조오십삼불전)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오량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석불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계란형의 단아하고 근엄한 인상이었으나 덧칠을 하고 눈과 눈썹, 수염을 그려 넣음으로써 오히려 어색한 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왼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몸에 바짝 붙어있고 옷 주름의 조각도 촘촘하게 표현되어 어느 정도 일체감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어깨부분을 너무 각이 지게 처리하여 풍성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어 버렸다. 손 모양은 부처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상징한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으로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이 가부좌를 한 불상에서만 볼 수 있다.

상체가 왜소해 보이는데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길고 높게 표현하여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받침대는 통일신라 말기에 볼 수 있는 8각 연꽃무늬 받침대 양식이다. 불상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