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금암리의 일열이효비와 삼선려

천부인권 2016. 10. 18. 06:00



<2016.10.17. 김해김씨일열이효유적비와 삼선려 모습>

 

국도 1029번 도로인 의산삼일로를 따라 대정삼거리에서 고사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창원시 진전면 금암리 761-7번지의 도로변에 접한 金海金氏一烈二孝遺蹟碑(김해김씨일열이효유적비)와 뒤쪽에 위치한 三善閭(삼선려)라는 이름의 정려각을 만나게 된다.

一烈二孝碑(일열이효비)는 블록 담장에 작은 철제문을 달아 출입을 하도록 하였고, 뒤쪽의 삼선려라는 편액을 단 정려각은 적벽돌로 담장을 하고 쇠로 만든 철창문을 입구에 달았다. 철창문에는 자물쇠가 없어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인 정려각은 맞배지붕을 하였다. 지붕은 전통 기와를 대신하여 플라스틱 기와를 사용했다.





삼선려의 내부에는 시멘트 재질의 비가 세워져 있고, 벽면에는 정려를 받은 글을 편액에 새겨 두었다. 정면 벽에는 그림과 함께 삼선려기를 걸어 두었다. 중앙에 세운 비의 정면에는 烈女 上之贈 四十二年 乙未九月 命旌 贈朝奉大夫童蒙敎官金海金在善之妻令人慶州李氏之閭(열녀 상지증 사십이년 을미구월 명정 증조봉대부동몽교관김해김재선지처령인경주리씨지려)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와 정려각은 김해가 본관인 金在善(김재선)의 처 月城李氏(월성이씨)와 그의 아들 金華槢(김화습), 며느리 檜山具氏(회산구씨)孝烈(효열)을 기리는 비석과 閭閣(정려각)이다.






김재선의 부인 월성 이씨는 나무하러 산으로 올라간 남편이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찾아 험한 밤길을 마다않고 찾아나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남편을 찾아 돌아왔다고 한다. 남편 김재선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부인이 직접 나무를 하고 품을 팔면서 남편의 병구완을 하여 천수를 누리게 하였고 아들을 키워 냈다고 한다.





아들인 김화습 또한 성장하면서 어머니가 남편을 섬기는 정성을 배우고 따랐다. 어머니가 병들어 눕자 피를 흘려 어머니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는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이 하였다. 김화습의 처 역시 그의 시어머니와 남편 김화습을 정성과 공경으로 대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화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지역의 유림들이 1885년에 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천거하여 김화습에게는 童蒙敎官(동몽교관)의 벼슬을 내리고 세 사람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는 일열이효의 旌閭(정려)를 내렸다.






일열이효비는 비신(碑身)과 비개(碑蓋)를 갖춘 형태이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161, 폭이 60이다.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 1, 측면 1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출처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문화유적분포지도-경남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