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율티리 끝섬의 대관정 大觀亭

천부인권 2017. 1. 15. 13:30

2017.1.14. 진전면 율티리 끝섬 위의 대관정

 

진전면 율티리 109번지는 율티리 끝섬 古墳群(고분군)’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끝섬은 진전천이 바다와 만나는 끝에 위치한 독립된 조그만 섬이었으나 현재는 공장이 건설되어 육지로 변한 곳이다. 이 끝섬에는 封土墳(봉토분) 1기와 석실이 노출되거나 붕괴된 폐고분 2기가 있었고 지금도 도굴한 흔적이 남아 있다. 끝섬 위에 大觀亭(대관정)을 짓기 전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석열이 널어서 있어 육안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율티리 끝섬 古墳群(고분군)’은 입지 조건이나 구조적인 특징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거제 이목리 돌널무덤, 고성 송천리 돌널무덤과 동일한 특징을 보인다고 학계는 말한다.

 

 

2017.1.14 대관정으로 오르는 끝섬 풍경

 

이 끝섬 위에 大觀亭(대관정)을 짓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조선의 교육정책을 말살하기 위해 향교를 없애기 시작했다. 당시 웅천향교와 진해향교를 훼철하여 창원향교에 흡수 통합하자 삼진지역 48개 문중에서 明倫契(명륜계)를 조직해 향교의 명륜당을 대신하는 분교격인 대관정을 이곳에 짓게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한 것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瓦家(와가) 이다.

大觀亭(대관정)’이라 이름 한 것은 山海(산해)勝景(승경)을 갖춘 끝섬의 좌우에는 깎아 만든 듯 절벽이 서있고, 앞에 펼쳐진 창포만은 큰 볼거리라 어찌 大觀(대관)이라 칭하지 않겠는가.”라고 대관정 중수기에 기록하고 있다.

진해향교의 표비를 눈물로 묻고 明倫契(명륜계)가 처음 대관정을 건설한 때는 해방 10년 전인 1935년 이었다. 이후 19506·25동란으로 격전지가 되자 미군이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1965년에 명륜회가 다시 중건하였으나 세월 따라 훼손되자 2003년 지역 출신 도의원의 활약으로 정부지원금을 받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출처 및 참고

마산시 문화유적분포지도 2005-경남대학교박물관

디지털창원문화대전

 

 

 

大觀亭重建上梁文
述夫 自溪瀆江漢而曁滄海其觀有大小之分 始父子君臣而明論網斯道無古今之異 世雖有兵革之非意 人不失事理之當然 惟舊鎭海縣之西大觀亭 一鄕所協議而成 百里其傑構之著 翠岩磅礡乎海畔景致 危宇飛革于穹蒼制度 如三山十洲 若珠宮貝闕 每春秋佳節冠盖乘興而登臨 及文酒華莚老少序齒而揖讓 共辨王覇之眞假 且論家國之興亡 始因郡合而廢校宮倫稧繼起 己經兵燹而焚棟宇工役重新 眼界通遙溟色暎戶 天光無際雲影臨軒 盍簪兮襟懷酒如 樂志兮妖梫遠矣 登泰山而小天下夙仰宣尼之通明 遊江淮而恢胸中已見子長之文建 顯官厚祿安知逸士之娛 流水高山盡入希音之奏 風淸兮月白 氣豪兮心惺 憑虛御風鵬圖須得就 由實入道騏步不可停 時復狎鷗猶養幽閒之趣 佇見賀燕方奏完美之功 爲擧脩梁 載唱偉頌 抛梁東 牛山美木聳雲中 樵夫須勿侵斤斧 梁棟其材可養充 抛梁西 積石山高落照低 玉宇茫茫都黑窣 誰能秉燭啓途迷 抛梁南 巨浸漫漫碧於藍 與彼大洋連一水 瀰瀰萬里浩難譚 抛梁北 玉女峯頭簫響息 乘鳳何天不復回 寒雲千載空悽惻 抛梁上 星月麗天淸且朗 上帝之居還不遐 惟承明命正無爽 抛梁下 東西路坦喧車馬 烝徒經紀何嘗同 肆致奔忙若彼者 伏願上梁之後 神祗所佑 杗桷永完 古家之模足爲準標胥能常焉耳 十家之邑必有忠信況其大者乎
乙巳四月下浣 巴山 趙鏞極 撰

 

대관정 중건상량문 大觀亭 重建上梁文
시내와 도랑, 강에서부터 푸른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크고 작음의 구분이 있고 父子와 君臣에서 비롯하여 三網五倫을 밝힘에 儒道는 古今에 다름이 없다. 세상은 비록 뜻하지 않은 전쟁이 있었지만 사람은 事理의 當然함을 잃지 않았다. 생각건대 옛 진해현의 서쪽에 있는 대관정(大觀亭)은 한 고을이 모두 협의하여 이루었으니 백리 南都에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른 암석이 해변가에 우뚝한 경치는 신선이 사는 삼신산이나 열 곳의 10주(洲)와 같고 날아갈 듯한 지붕이 창공에 펼쳐진 모습은 용궁의 구슬궁궐과 같도다. 매번 봄가을 절기에 맞춰 선비들이 흥에 겨워 올라서 왕도와 패도(覇道)의 참과 거짓을 변론하고 문사들이 줄지어 앉은 술자리에는 노소가 서열에 맞게 읍양하고 가정과 국가의 흥망을 논한다. 처음 군(郡)이 통합되면서 향교를 폐하였으나 선비들의 계는 이어서 만들어지고 난리를 겪으면서 집이 불탔으나 공역은 새롭게 일어나 중건하였다. 풍광이 멀리까지 비치니 바닷빛은 창문에 일렁이고 하늘이 끝없이 펼쳤으니 구름이 처마 끝에 오간다. 벗들이 모이니 생각은 깨끗하여 씻은 듯하고 뜻을 즐겁게 하니 요사한 생각은 멀리 떨쳐버렸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적다고 한 공자의 통달하고 밝은 뜻을 앙모하고 회수 강가에 노닐며 가슴을 넓혔으니 이미 자장(子張)의 문장이 굳센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벼슬에 많은 녹을 받는 사람이 어찌 속세를 벗어난 선비의 즐거움을 알겠는가 높은 산 흐르는 물에도 다 소리없는 절주가 있다는 것을, 바람 맑고 달밝음이여 기상은 호탕하고 마음은 고요하도다.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가니 붕새는 장차 구만리를 도모하게 되고 실질에서 비롯하여 도에 들어가는 길에 천리마를 멈추게 할 수 없는 것. 때로는 다시 갈매기와 친압하며 고요한 정취를 기르고 우두커니 제비가 하례하는 것을 보니 아름다운 공덕을 연주한다. 이에 긴 들포를 올림에 아랑위 노래를 불러 송축하노라.
아랑위 들보 東으로 던져라. 우산(牛山)의 고운 나무 구름 위로 솟았으니 나뭇꾼은 도끼를 들이지 말지니 棟梁의 재목으로 충분하도다.
아랑위 들보 서편으로 던져라. 적석산(積石山) 높고 석양은 나직한데 넓고 넓은 우주는 온통 검고 아득하니 누가 촛불 켜서 어둡고 아득한 길 밝힐까.
아랑위 들보 남으로 던져라 넓고 넓은 바다는 쪽빛보다 푸른데 저 태평양과 한 물로 이어져 만리 아득히 펼쳐졌으니 무어라 말로 하기 어려워라
아랑위 들보 북으로 던져라. 옥녀봉(玉女峯) 머리에 피리소리 그쳤고 어느 하늘로 가버린 봉황은 돌아오지 않으니 찬구름만 천년토록 처연하도다.
아랑위 들보 위로 던져라 별과 달이 반짝이는 하는 맑고도 청량하니 옥황상제 사는 곳이 멀지 않으리니 하늘의 밝은 명을 이어 정녕 어긋남이 없도다.
아랑위 들보 아래로 던져라 탄탄한 동서대로 수레소리 요란터니 제관들의 기강이 어찌 한결같을까. 분주히 제수를 차리는 모습 거리낌이 없도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천우신조로 기둥과 석까래가 길이 완전하여 옛 가문의 법도가 표준으로 충분하니 항상 변함이 없으며, 열 집 조그만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으니 하물며 큰 고을에서랴!
을사乙巳(1965) 4월 하완下浣 파산巴山 조용극趙鏞極 짓다.

 

 

 

 

 

 

진전면 창포리에서 바라 본 대관정이 위치한 끝섬 주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