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여양리 옥산재와 쌍효각 창효각

천부인권 2017. 1. 21. 07:49



<2014.11.30. 여양리 옥산재와 쌍효각 창효각 풍경>

 

진전면 여양리 들담마을을 마주하는 진전천변 계곡의 진전면 여양리 909번지에는 옥산재(玉山齋)라는 밀양박씨의 齋室(재실)이 있다. 齋閣(재각)은 밀양박씨 문중에서 朴毅鎭(박의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60년에 세운 것이다. 옥산재에서 우측 30m지점에는 여양리 소나무 보호수가 있고, 좌측 20m에는 雙孝閣(쌍효각)이 위치하며, 좌측 50m지점에는 彰孝閣(창효각)이 진전천을 따라 나란히 있다.




<2014.11.30. 옥산재 대문 모습>




<2014.11.30. 옥산재 대문의 仰止門(앙지문)’편액>





옥산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의진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도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능히 부모님께 承順(승순)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집이 가난하여 부모님을 봉양할 수 없게 되자 밭갈이와 글 읽기, 고기잡이, 나무하기를 동생이 했던 것과 같이 하였다.

1815(乙亥年)에 동이로 물을 들어붓듯이 퍼붓는 홍수가나 怒濤(노도)처럼 골짝을 메우며 천지가 개벽하는 것보다 심하게 요동쳤다. 그 와중에 공중으로부터 공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너의 부모를 어느 곳으로 모셔라.” 하였다. 그제야 공이 부인 조씨와 함께 부모님을 등에 업고 나가니 밤이 칠흑같이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는데 문득 번갯불이 땅을 밝혀 앞길을 비춰주어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었으며 촌락은 함몰되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門戶(문호)를 복원하였으며 어머님의 병환 시에는 하늘을 향하여 자신이 어머님의 병환을 대신하겠다고 빌기도 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묘에서 상제를 마쳤으니 이것이 어찌 천고에 처음 보는 효도가 아니며, 위에서 말한 하늘이 감응하고 귀신이 돌아보며 보호하여 준다는 것과 부합됨이 아니겠는가.

공이 죽은 뒤 아들 곤계가 유생들의 서장으로서 조정에 계문하여 고종 임오년(1882)에 비로소 정려각을 지었다고 한다.




<2015.3.7 옥산재에 봄이 오는 모습>



<2016.10.17 옥산재 편액>



<2014.11.30. 쌍효각과 창효각 모습>




<2014.11.30. 쌍효각 모습>




<2014.11.30. 만포공 묘도비>





여양리 雙孝閣(쌍효각)戶曹判書 密陵君(호조판서 밀릉군) 孝恒(효항)7세손 朴毅鎭(박의진)과 그의 처 함안조씨 부부의 효행을 표정하는 비각이다. 박의진은 이를 갈 나이쯤에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노래자(老萊子)’가 부모를 섬기는 듯 하였다 한다. 또한 부인 역시 시부모를 잘 섬겼으며 안방의 부덕을 수양하며 내칙(內則)’을 잘 지켰다고 한다. 이러한 부부의 효행을 영남의 유생들이 상소하니, 1882(고종 19)에 벼슬과 함께 정려(旌閭)를 내렸다.

비의 전면에는 贈童蒙敎官朝奉大夫密城朴公晩圃先生墓道碑(증동몽교관조봉대부밀성박공만포선생묘도비)’라 새겼다. ()의 규모는 정면 1,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청색의 기와가 이채롭다. 비각의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원형의 인공초석을 놓았다. 단칸 규모의 팔작지붕이고 외곽은 출입문의 중간 정도 높이에서부터 좌우로 자연석들을 이용하여 쌓은 담장이 쌍효각을 둘러싸고 있다.




<2016.10.17 쌍효각 내에 있는  贈童蒙敎官朝奉大夫密城朴公晩圃先生墓道碑(증동몽교관조봉대부밀성박공만포선생묘도비)'>

 


<2016.10.17. 彰孝閣(창효각) 모습>





여양리 창효각 진전면 여양리 산38 덕천분교(폐교)의 맞은편 하천변에 위치하는 창효각은 贈童蒙敎官(증동몽교관) 晩圃公(만포공) 毅鎭(의진)의 셋째 아들 準奎(준규) 효행을 기리는 비각이다. 雙孝閣(쌍효각)의 주인공인 아버지 만포공에 이어 대대로 효를 행함이 남보다 특이하여 각 지방 삼천여 유생들과 유인 향약 본소(儒人鄕約本所)에서 이를 표창하자는 공론이 있었다. 이에 1861恩典(은전)을 내려 옥방동에 효행기적비(孝行紀績碑)가 건립되었다. ()의 규모는 정면 1,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청색의 기와가 이채롭다. 담장은 돌담을 쌓았으며 소박한 기단 위에 대리석 비신(碑身)과 화강암 비개(碑蓋)를 갖추고 있는 형식이다. 비명은 雙川處士密城朴公準奎孝行紀實碑(쌍천처사밀성박공준규효행기실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박준규는 6세에 소학 책을 아버지이신 만포공에게 배우며 문득 기쁜 듯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행하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다.”하고는 스스로 외우고 익힘을 부지런히 하여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소학으로서 준칙을 삼았다. 항상 부드러운 음성과 유쾌한 낯빛으로 몸을 편히 하여 드리고 뜻을 순하게 따르시어 소학의 절차와 같이 하지 아니함이 없더니 어버이께서도 기뻐하고 사람들도 간섭하는 말이 없었다. 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고, 부모가 병환 중이었을 때는 변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확인하면서 간병하여 이웃사람들을 탄복시켰다고 한다.

지난 1815년 을해(乙亥)에 아버님과 어머님이 함께 돌아가시게 되자 상례를 모두 마치고는 문득 낯을 가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님이 지극한 효행이 있었는데도 묻어 버리고 밝게 나타내지 아니한다면 이는 불초의 죄이다.” 하였다고 한다.




<2016.10.17 창효각 내부의 雙川處士密城朴公準奎孝行紀實碑(쌍천처사밀성박공준규효행기실비)’ 모습>



<2016.10.17 창효각 편액>


출처 및 참고

디지털창원문화대전

2005년 문화유적분포지도 마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