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산호공원에 자리한 김형윤 불망비

천부인권 2016. 11. 22. 08:47



<2016.11.21. 산호공원의 김형윤 불망비>

 

창원시 산호동 532-4번지에 자리한 산호공원 초입에는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호공원 시의거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詩碑(시비)들이 즐비하다. 차량으로 공원의 꼭대기까지 오르면 일제강점기에 바른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金亨潤 不忘碑(김형윤 불망비)”를 만나게 된다.

이 비는 사각으로 깍은 낮은 석재를 방형으로 세워 울타리를 만들고 3개의 계단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비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비대를 놓고 碑座圓首(비좌원수)형의 비신을 세웠다. 특이한 것은 울타리 안에 눈향나무를 심어 일 년 동안 푸름을 더하고 향을 피우듯이 향내를 내게 했다는 점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金公亨潤不忘碑(김공형윤불망비)”라 새겼고, 측면에는 서기 1974518, 김형윤 선생 기념 사업회라 적었으며, 명예회장 金鐘信(김종신), 회장 崔載攝(최재섭)을 새겼다. 뒷면에는 아래처럼 새겨 두었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歷史(역사)에 남고 文章(문장)筆墨(필묵)에 남으리니 ()19031218馬山(마산)에 나서 197387享年(향년) 70세를 一期(일기)幽明(유명)을 달리하였지만 그 人間(인간)足迹(족적)遺稿集(유고집) 馬山野話(마산야화)에 남아 많은 市民(시민)의 입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愛稱(애칭) 目拔社長(목발사장)으로 日帝暗黑期(일제암흑기)無政府主義運動(무정부주의운동)抗日鬪爭(항일투쟁)으로 보냈고 解放後 馬山日報社長(해방후 마산일보사장)으로 地方言論界(지방언론계)先鋒(선봉)에 서서 社會正義(사회정의)絶叫(절규)했던 의 뜻은 가시지 않고 지금도 우리와 對話(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安息(안식)을 위한 오랜 잠을 자고 있을 뿐 人間像(인간상)靑山(청산)과 더불어 숨쉬고 있는 亭亭(정정)한 한 그루 樹木(수목)이다. 潔癖(결벽)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듯이 의 깊이 든 잠을 누구도 깨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디 惡夢(악몽)이 없는 平和(평화)로운 잠을 위하여 삼가 두 손을 모으면서 生前(생전)의 숨결을 後世(후세)에 길이 ()하고자 을 기리는 모든 사람들의 丹誠(단성)을 여기에 묶어 不忘(불망)의 돌을 깎아 오직 事緣(사연) 를 검은 石身(석신)에 새길 따름인저





아래의 글은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실려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金亨潤(김형윤 1903~1973)1915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산업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신문, 동아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무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며, 194512월 신탁 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어 1947년 봄에 석방되었다.

1947남선 신문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호를 변경한 남조선 일보 사장 대리가 되었다. 1950남조선 일보마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편집과 경영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7년에는 마산의 경제, 산업, 문화, 역사, 풍물 등을 총체적으로 다룬 약진 마산을 발간하였다. 그밖에도 마산 시정 4년간, 민주 혁명 승리의 기록[1960], 마산 시정 20[1966] 등을 출판하였다. 1966년 마산 일보를 사직하고 물러난 후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73125일 유작으로 마산 야화(馬山野話)로 발간되었고, 1974818일에 마산 산호 공원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별호가 목발(目拔)이 된 것은 다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강점기 마산 사쿠라 마치[櫻町]의 벚꽃이 한창일 때 일본인 요정에서는 가설 무대를 지어놓고 일본인 기생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일본 남자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창이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본 헌병이 민족적 모욕을 주며 그를 끄집어냈다. 이를 본 김형윤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목발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