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9. 진해구 북부동 열녀 황씨지려>
옛 국도 2호 웅천로변인 진해구 북부동 595-1에는 11기의 비석군이 도로를 따라 일렬로 서있다. 도로 맞은편에는 서중소류지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천자봉공원묘지에서 웅천읍성 방향으로 세워진 첫 번째 비석이 ‘北部洞 烈女 黃氏之閭(북부동 열녀 황씨지려)’라 불리는 “咸安趙公元瑞妻烈女黃氏之閭(함안조공원서처열녀황씨지려)”이다.
이곳 일대는 웅천으로 통하는 곳인데 北部洞(북부동)이 탄생한 것은 1914년 백일리와 북문리가 합하여 ‘북부리’라는 법정동으로 되고, 1973년 의창군에서 진해시로 편입 되면서 북부동이 되었다. 북부동이란 웅천읍성의 북문 밖에 있는 곳이란 뜻이다.
‘北部洞烈女黃召史(북부동 열녀 황소사)’의 비좌는 높이 3cm, 폭 93cm, 두께 75cm이고, 비신은 높이 120cm, 폭 45.5cm, 두께 15.5cm이다. 비신의 형태는 碑座直首(비좌직수)로 그 위에 보주를 놓았다. 비신은 다듬은 판석으로 좌우에 세워 보호를 하였고, 그 위에 가첨석의 지붕돌을 놓은 형태로 廬閣(여각)을 만들었다. 지붕돌의 높이는 25cm, 폭 114cm, 두께 76cm이고, 전체는 높이 187.5cm, 폭 75cm, 두께 35cm이다.
“咸安趙公元瑞妻烈女黃氏之閭(함안조공원서처열녀황씨지려)”의 내용을 살펴보면
『黃召史(황소사)는 천성이 어질고 醇美(순미)하여 어려서부터 자질이 드러났으며 나이 스무 살에 조씨 가문의 원서에게 시집와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지성으로 남편을 섬기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 선행을 칭송했다. 지아비가 병에 걸려 5개월이 지나도록 고질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밤낮으로 천지신명에게 기도드렸다. 병 문진을 가던 어느 날 호랑이가 길을 막자 눈물로 호소하니, 짐승인 호랑이도 정성에 감동하여 달아났다. 조씨가 돌아가신 후 부엌문을 열고 시신이 있는 방에 조심스레 들어가서 시신 곁에 누워 가냘픈 목소리로 쓸쓸히 중얼거리며 나이 스물여덟에 별안간 세상을 하직했다. 집안사람들이 죽은 뒤 살펴보니 그릇에 독약이 남아있어 같이 죽기를 맹세한 것으로 파악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감사에게 계문을 올리니 임금께서 명을 내리어 1740년(庚申年-영조 16년) 갸륵함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내려 포상하니 정성을 표하여 이 비를 세운다.』 *웅천읍지에는 ‘乾隆辛酉登聞旌閭(건륭신유등문정려)’라 기록하여 1741년(영조 1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출처 및 참고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진해의 비문(1996)-진해시
디지털창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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