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해구 원포동 권신민 유허비

천부인권 2016. 12. 18. 08:16



<2016.11.15. 큰발티에 위치한 권신민 유허비>

 

진해구 원포동 산 33-1번지는 큰발티(大峙; 大發嶺)라 부르는 대발령제1쉼터 만남의 광장뒤편에 위치한다. 이곳 큰발티는 국도2호를 따라 웅천으로 오고 가는 고개로 장천동 동북쪽에 있는 해발 110m의 큰 고개이다. 院浦洞(원포동)은 부산에 있던 ‘STX 조선 주식회사가 이전해 오면서 본 마을 주민이 모두 이주하여 민가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국립 여관격인 八峴院(팔현원)이 있어 원개(院浦)라 불렀다.





碑座直首(비좌직수)형 비는 전면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行嘉善大夫安東權公信敏遺墟碑(행가선대부안동권공신민유허비)’라 새겼고, 뒷면에는 비 내력을 적었다. 비의 높이는 167cm, 56cm, 두께 9cm이고, 상단의 비좌는 높이 17cm, 76cm, 두께 55cm이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호! 이곳은 우리 8대조이신 가선대부 호는 죽봉이고, 이름은 신민이며, 자는 정여이신 할아버지의 유허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천성이 인자하시고 선하셨으니 대발령 처소 곁에 홰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어 봄가을로 머무시면서 의복이 남루한 이에게는 옷을 벗어 주시고 신발이 헤어진 사람에게는 짚신을 삼아 주셨으며 주린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셨고 우물을 파 목마른 사람의 목을 축이게 하셨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積善翁(적선옹)이라 일컬었다. 후손들이 오랜 세월 이 홰나무를 보호해 왔는데 갑인년간에 이르러 왜구들이 요긴한 곳을 둥글게 끊어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를 만들었으니 이때부터 홰나무가 차츰 말라 썩어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후손들이 솟구치는 사모의 정을 이기지 못해 돌을 쪼아 이에 표하고자 한다.

고려초에 선조 ()께서 견훤을 무찌른 공으로 태조가 권씨 성을 내리셨고 조선조에 이르러 珪組(규조)가 끊이지 않더니 승지공 逸立(일립)께서 안동에서 처음으로 웅천에 정착하셨으니 공의 조부가 되고 상고하건데 부친 詩東(시동)께서 인조 경술년에 공을 낳으셨고 공은 죽곡리에서 차례로 儀碩(의석), 儀重(의중), 舜泰(순태)를 두셨으니 손자와 증손이 이하는 수없이 많다.

명에 이르기를 오직 홰나무 정자에서 덕을 베푸셨으니 홰나무는 비록 오래되어 죽고 말았으나 홰나무 대신 말없는 돌을 갈아 덕행을 적으니 우뚝하기가 산봉우리와 같다. 홰나무를 심어 남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 덕은 오래오래 되어도 새롭기만 하네 한 조각의 비갈을 세워 崇仰(숭앙)함은 자손으로서 마땅한 도리이리라.

무자(1948) 십월 일 사손 호곤 짓고 쓰다. 일을 한 권씨문중일동





行嘉善大夫安東權氏信敏遺墟碑

 

嗚呼此我八代祖嘉善大夫竹峰諱信敏字政汝之遺墟也 府君天性慈善就于所居傍大發領上種槐成亭而春秋居其下解衣興人種瓜與人穿井飮渴世積善之翁也 子孫世守此槐而保護也 及至甲寅年間倭寇斷領員永通道路自此以後槐樹漸枯而至於朽敗之境 子孫不勝感愴治石以表焉 麗初諱幸破萱成功太祖賜性權氏人 李朝珪組不絶累得之諱逸立自安東始入熊川於府郡爲祖也 考諱時東府郡以仁祖庚戌生于竹谷里第男儀碩儀重舜泰孫曾以下不能盡銶 銘曰 維槐與德 槐老雖枯 代槐紀德 巍巍者嶺 種而惠人德久維新一片崇碑子孫之思

戊子 拾月 日 嗣孫 浩坤 謹撰 有司 權氏門中一同



출처 및 참고

진해의 비문(1996)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해의 땅 이름 이야기(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