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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여양리 골옥방 은진임씨 효열비

천부인권 2017. 2. 1. 06:40

 

 

 

<2017.01.14. 골옥방 길가의 은진임씨 효열비>

 

진전면 여양리 332번지에 위치하는 진전면 여양리 은진임씨 효열비는 여양리 들담마을에서 옥방교를 건너 골옥방마을로 약 450m를 가면 길 좌측 암괴를 보호축대처럼 이용하여 비를 세웠다.

암괴와 도로 사이의 폭이 좁아 도로와 거의 직각에 가깝게 축대를 쌓고 가파른 5개 계단을 만들었다. 비의 뒷면은 자연 암괴를 보호축대처럼 이용했고, 좌우는 다듬은 돌로 담장을 만들어 좁은 공간이지만 그 속에 비를 세웠다.

 

 

 



 

비의 크기는 소박하지만 비좌, 비신, 가첨석을 갖추었고 높이는 150cm, 47cm, 두께가 19cm이다. 비의 전면에는 處士密城朴公準仁之配夫人恩津林氏孝烈碑(처사밀성박공준인지배부인은진임씨효열비)라 음각으로 새겼다. 골옥방에 살았던 박준인의 처 은진임씨의 높은 부덕과 남다른 효열을 기리기 위해 1861년 마을 주민들이 비석을 세워 임씨 부인의 효열을 널리 기리도록 했다.



 

 

 

출처 및 참조

2005년 마산시 문화유적분포지도-경남대학교박물관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은진 임씨 효열비

부인은 옛 날 효자였던 첨모당 선생인 운(芸)의 8세손 되는 우운의 따님으로서 충정공의 호를 증직 받은 밀천군 숭원의 10세손이요 희진의 손자인 정수의 어머니다.
성품이 깨끗함은 타고난 것으로 효열에 해박하신 간암공께서 제문을 지어 사람을 시켜 제사 때 말하기를 “부인의 효성과 정열은 밝기가 해나 달과 같았다.”하였고 종시숙이신 쌍천공께서도 자상하게 제문을 지어 그분을 제사하여 말씀하시기를 “부인의 고절은 해와 달과 같이 빛나리라.”하였으며 선비들이 읍의 관영에 호소하는 교론문을 쓴 내용 중에는 “효열이 구비되어 더욱 가상한 분으로 사람들이 이미 흠모하고 우러러 보고 있는데 신명께서도 반드시 감명하리니 저절로 밝혀질 날이 있으리라 하였으나 임금께 계문(啓聞:임금에게 글로서 아룀)하여 정려를 내리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세월이 창해가 상전(桑田:뽕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 일이 덧없이 바뀜을 이르는 말)되듯 오래 되자 향당의 떳떳한 윤리를 함께 하여 온 분들이 그 분의 지극하셨던 행적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후세에 전할 수 없을까 우려하여 의를 받들어 비석을 세우고 비명을 새기기를 효성스러웠던 신하의 남기신 윤리와 법도가 몸에 베였으며 충성스러웠던 신하의 남기신 효열을 이어 받았네
병든 시아버지를 밤새워 간호하며 한잠도 자지 못하고 남편이 절명하자 소생시키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었네! 사람들이 이미 사모하고 우러러보니 신령님도 반드시 감응할 것이며 읍에서 지극한 내용을 써 보냈으니 영중에서도 더욱 가상히 여기리라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도 은전을 입지 못하자 비석에 전자로서 새기노니 영원토록 닳지 않으리라!

 

辛酉(1861) 12월 초순에
경주 박규환 짓고
함안 조철규 씀

 

恩津林氏孝烈碑
夫人故瞻慕堂先生諱芸之八世孫右芸之女贈忠靖密川君諱崇元之十世孫熙鎭之孫禎秀妣也性素根天孝烈特異故其歿也媤再從叔父迀庵公爲文使人諭祭曰夫人誠孝貞烈皎如日星從媤叔雙川公詳文祭之曰夫人苦節與日月爭光章甫呼訴營邑題敎曰孝烈俱備尤嘉尙人旣欽仰神亦必感自有闡揚之日也以未及啓聞蒙旌世至桑鄕黨秉彛所同懼夫至行之愈久而愈失其傳補義樹碣銘曰擩染孝祖之貽謨承襲忠臣之餘烈病舅侍夜睫未交絶夫甦時指以血人旣慕仰神必感邑題至盡營尤嘉世滄桑而恩未蒙擬篆石而永不磨
重光作噩 西紀 一八六一年(哲宗十二年 辛酉)
剝月上浣 慶州 朴圭煥 撰
              咸安 趙喆奎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