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고사리 밀양 박준구 효행각

천부인권 2017. 2. 9. 08:57



<2017.1.14. 진전면 고사리 술인방 입구에 세운 박준구 효행각>

 

진전면 고사리 밀양 박준구 효행각은 진전천이 굽이를 치는 굼바위에서 술인방 방향으로 약 190m 떨어진 진전면 고사리 산 57에 위치한다. 감동으로 적신 효성[마산 문화원, 1998]고사리 효행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이 비각은 산의 경사면을 자로 파서 자연석으로 축대를 하고 비각의 전면에는 돌로 담장을 쌓았고 중앙에 철재문을 달고 지붕돌을 얹었다. 담장 안에 세운 비는 사방에 주춧돌을 심고 사각으로 만든 돌기둥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어 비각을 만들고 비각의 전면에 孝行閣(효행각)이라 새겼다. 돌로 만든 효행각 안에는 평면의 비좌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가첨석을 올렸다. 비의 전면에는 孝子密城朴公之碑(효자밀성박공지비)라 적었다. 朴準龜 孝行閣( 박준구 효행각)은 이 지방의 士論(사론)으로 1934년 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는 순조 무인(1818)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극하신 성품이 있었으며 겨우 10세에 서당에 나아가 선생님께 소학을 수학하다가 글 읽기를 옛날 동생(董生)이 아침에는 밭에 나가 밭갈이를 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가 글 읽기를 하였다는 옛 사람의 글을 읽는데 와서는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시어 몸소 일을 하시고 계시는데 자식 된 몸으로서 그 아버지를 수고롭게 하면서 글을 읽어 무엇 하겠느냐하고는 밭에 나가 밭갈이를 하고 나물도 캐고 나무도 하여 어버이를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극진히 모셨고 혹시 밖에 나가 놀다가 특이한 별미를 얻게 되면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드렸다.

나이 16세에 어머님의 병환을 간호하여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님의 목안에 피를 흘려 넣어 드렸으며 또한 아버님의 병환을 간호할 때는 단을 쌓아두고 하늘을 향하여 절을 하며 빌었더니 천신이 감동하여 효험을 얻게 되었다. 그 후에 어쩔 수 없이 천수를 마치자 날마다 묘소의 곁에 가서 모시고 아침저녁 상식 때는 슬프게 우셨으며 술과 고기를 자시지 않으면서 삼년상을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 옆에는 요즘 새로운 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孝行閣記

古之孝生 事葬祭而禮而已. 今之孝 往往多雪筍氷鯉. 古之孝家旋以褒其閭 今之孝片石以竪逵道 嗟乎 古道不可復見耶 今得密城朴孝子狀而讀之諱準龜字洛瑞 忠靖公諱崇元之后耶 中世自淸州淪落於咸安之艅航山中因居焉 父曰衡鎭母曰密陽孫延輔女孝子以正祖己酉生 幼有至性拾山果必懷而獻之 遇異味未嘗先口

嘗讀董生行瞿然 自省曰 父耕田而子讀書子乎哉 因發奮自力朝耕暮讀山樵水漁一如董生之爲病而禱天血指0而泣血柴毁三年不閔 公蓋無愧爲古之孝也 但不得蒙古之褒典 只從今俗以石替旌此世道之恥也. 在公何慊焉其第三子瑽和與玘孫魯億殫誠碣蹶庇之以閣 徵記於余 余曰董生得韓昌黎而名益彰昌黎脚下豈做文字地耶 况今三綱旣淪九法亦膚淺之言奚足以發揮幽潛而扶得一線姑書之以俟後世之昌黎子

戊寅四月下澣 順興安鼎呂記


해석(사파정동 김상규)

옛날 효자는 부모의 장례나 제사에 예로서 섬길 뿐이었는데 지금의 효자는 가끔 눈속의 죽순이나 얼 음속에 잉어를 잡아서 부모를 섬기며 옛날 효는 가정에서 주선하여 여각을 기렸는데 지금의 효는 돌을 쪼아서 길가에 비석을 세우네. ! 옛 도를 다시 볼 수가 없구나! 금에 밀성 박효자 상이 있었는데 고 준기 락서에께서 글을 읽었는데 충정공 휘 숭원의 후예이다. 그는 중세에 청주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져 함안 여항산 중으로 이거하여 살았는데 어버이의 말씀에 형진어미가 말하기를 밀양 사는 손정보 여식이 효자로서 정조 기유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 성품이 착하여 산에서 과일을 따면 반드시 품어서 어버이에게 드렸으며 별다른 음식을 보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 하였다. 공께서는 일찍이 동생(어버이)에께서 글을 읽어 행동이 남달랐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부모가 밭을 가는데 자식으로서 글을 읽을 뿐이다. 인하여 발분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아침 에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글을 읽으며 산에 가서 나무하며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서 한결같이 부모의 병환을 위하여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깨물어 봉양하면서 삼년을 피눈물을 흘리며 간병으로 근심 하였다. 공은 부끄럼 없는 효자이시다. 다만 옛날과 같은 기림과 전례를 입지는 못하였지만 단지 지금의 세속에 따라서 돌로서 정려비로 바꾸는 것은 이는 세도의 부끄럼이다. 공이 어찌 편안함이 있었겠는가. 공의 세 아들인 종화와 기손, 노억이 죽을힘을 다하여 비석을 세워 각으로 덮었다. 그리고 나를 불러서 각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동생은 한유와 같은 문장을 얻어 그 명성이 날로 드러났는데 창여의 무릎 아래서 어찌 문자를 펼 수 있으리오 하물며 금에는 삼강이 이미 폐하고 구법이 어지러웠는데 미천한 말로서 어찌 족이 깊은 뜻을 발휘하겠는가, 한 모퉁이로만 잠시 도울 뿐이며 후세의 문장가를 기다리고자 한다.

무인(戊寅,1938)년 사월 말에 순흥 안정려(安鼎呂) 쓰다.

 

() : 죽순

竪逵道(수규도) ; 길가에 세우다

淪落(윤락) : 어려운 처지에 빠지다.

瞿然(구연) : 놀란 눈으로 보는 모양

朝耕暮讀山樵水漁(조경모독산초수어) : 아침에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읽고 산에서 나무하며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봉양하다.

禱天血指(수천혈지) : 하늘에 빌고 손가락에 피를 받아서

柴毁(시훼) :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하다.

褒典(포전) : 기림과 전법

替旌(체정) : 旌閭비로 바꾸다

碣蹶(갈궐) : 둥근 모양의 비석

() : 미덥지 않다 협: 협족 하다.

() : 덮다 () : 부르다 구하다. () : 어지럽다.

韓昌黎(한창여) : 唐代 文學家韓愈別稱

() : 잠시





*안정려(安鼎呂) : 경상남도 함안(咸安)인으로 1871년(고종 8)∼1939년. 일제 강점기 학자. 자는 국중(國重)이고, 호는 회산(晦山)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취우정(聚友亭) 안관(安灌)의 후손으로, 부친은 안상기(安相琦)이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말을 배움과 동시에 글자를 익혔으며, 글을 배우면서는 사서삼경을 줄줄 외웠다. 처음에는 노천(老川) 안정택(安鼎宅)으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매일같이 부지런히 경서를 강독하여 칭찬을 들었다. 자라서는 면우(俛宇) 곽종석(郭種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로부터도 질정(叱正)을 받으면서 주리학설(主理學說)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12년에는 함안(咸安)에서 산청(山淸)의 서하(西河)로 터전을 옮기고 엄천강(嚴川江) 가에 재실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자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제자들의 능력에 따라 가르쳤다.
1919년에 스승 곽종석이 생을 마감하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입으며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1930년에는 삶의 터전을 다시 함안으로 옮겨와 취우정(聚友亭)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먼 거리에서도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저서로『오서집의(五書釋義)』‧『상변요의(常變要義)』와 유고 『회산선생문집(晦山先生文集)』이 있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2005년 마산시 문화유적분포지도-경남대학교박물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이원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