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1.남지읍 시남리와 월평마을 사이의 개비리길에서 본 낙동강과 오여정
낙동강의 실질적 발원지는 태백시 ‘너덜샘’이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곳은 ‘황지연못’이다. 처음 솟은 물이 모이고 모여 낙동강을 만들고 굽이쳐 흐르다 산을 만날 때마다 용트림하며 승천을 하듯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면서 동쪽으로 끝없이 흘러간다. 유유히 흘렀던 낙동강은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이름을 남긴 을숙도를 만든 후 바다와 만난다. 낙동강이 산을 만날 때마다 산을 깎고 깎아 사람의 출입을 금한 듯 단애를 만든 곳이 곳곳에 있다. 전통시대에는 그런 절벽이 형성 된 곳은 길이 없었으나 현재는 토목기술의 발전으로 차량이 다니는 도로가 되거나 임도가 만들어지는 등 낙동강을 따라 길이 생기고 있다. 전통시대에는 벼랑으로 지나는 이러한 길을 정분난 개나, 이웃마을에 팔려간 새끼에게 젖을 주기 위해 어미 개가 지나다녔다 하여 ‘개비리길’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개비리길은 절벽 위의 위태로운 길이지만 낙동강의 절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곳이라 요즘은 많은 등산객들이 호젓한 개비리길을 찾기도 한다.
2017.2.21.남지읍 시남리 오목촌의 폐가와 양계장이 있는 풍경
2017.2.21.낙동강과 이이목 나루 풍경
낙동강의 절벽위에 세운 吾與亭(오여정) 역시 전통시대에는 강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없었으나 요즘은 월평마을에서 비포장도로이지만 낙동강의 절벽을 따라 만든 임도가 개설되어 옛 이이목나루터 입구까지 자동차로도 갈 수 있다. 이이목나루터와 오여정이 있는 곳은 詩南里(시남리)를 통해 낮은 고개를 넘어 낙동강가로 가면 양쪽 단애 사이에 약간 움푹한 곳이 있어 모래가 쌓이면서 배를 접안할 수 있는 곳이 되어 사람들이 이동하는 나루터가 만들어졌다.
카페 ‘비화가야사람들’의 “지명유래-남지읍 시남리詩南里”에 의하면 『귀이목, 이목, 이이목, 오목으로도 불리는 烏項오목은 시남 북쪽 낙동강가에 있는 나루터 마을로 북향으로 인가가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에는 상당히 컸던 마을이라 『호구총수』에 오항촌烏項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루터와 옹기굴로 번창하며 10여호 이상이 살았던 마을은 지금은 2, 3호 뿐으로 마을 터는 휑하게 비어버리고 집터만 있을 뿐이다. 오여정吾與亭이 동편에 있다.
이이목의 ‘이이’는 까마귀의 축약 변형 또는 와음으로 보인다. 곧 귀[耳]가 한자로 ‘이’이기 때문에 혼동한 듯하다. 까마귀가 이곳에서 목을 잃은 형국이라 하여 이이목, 오항이라 하였다고 한다.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준다고 하여 예전부터 까마귀를 반포조反哺鳥, 효조孝鳥, 자조慈鳥라 칭송하여 불리었던 새이다. 또 달에는 옥토끼가 있다하고 태양에는 세발가진 까마귀 즉 금오金烏가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래서 까마귀 오(烏)짜가 든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 것이다. 목[項]이라 불리는 곳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도 좁은 통로로서 길목, 물목, 섬목, 건널목 등으로 쓰이고 있다. 청단촌靑丹村과 오항촌烏項村, 신남촌新南村 등 3개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구한 말 동리 폐합 때인 1910년에 하나로 합하여 지면서 시남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7.2.21.낙동강 변의 오여정 입구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
이이목 나루는 남지읍 시남리 815번지에 위치하는 ‘오여정’이 있어 그나마 찾는 사람이 있는 편으로 시남리의 북쪽 낙동강변에 있다. 낙동강 넘어 보이는 너른 들판은 의령군 낙서면 정곡마을이다. 6·25전쟁 때 낙동강을 두고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동이 편한 인근의 다른 나루를 두고 인민군이 이곳 이이목 나루를 통해 도하를 하여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창녕군 영산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던 뼈아픈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나루임을 알리는 미루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표식수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다 없어지고 단 한그루가 남아 옛 나루였음을 추억하는 듯하다.
오여정의 입구에는 표식수로 심은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가슴높이 둘레가 250cm이며, 높이는 21cm, 나이는 150년 남짓이다. 그리고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학자수라 불리는 회화나무도 오여정 앞에 심어져 있어 정자의 품격을 달리 보이게 한다.
2017.2.21.오여정 입구 회화나무가 있는 풍경
오여정吾與亭은 광해군 때의 학자 楊暄(양훤 1597~1650)의 유게소遊憩所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양훤의 자는 이정以貞, 호는 어촌漁村, 본관은 밀양이다. 스승 동계 정문간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균관에 뽑혀 벼슬길에 나갈 뜻이 있었으나 광해군 때 스승이 죄를 얻게 되자 이곳 오항烏項으로 낙향하여 절벽에 오여정을 짓고 유학자들과 交遊(교유)하고 吟風弄月(음풍농월)하며 지냈다. 미수 허목과 절친切親이었으며 돌아가시니 묘비문을 썼다. 사림士林에서 광산서원(유어면 광산리)을 세우고 배향配享하였다.<창녕군지><창녕누정록> 저서로는 《청주세고(淸州世稿)》 권3~6에 《어촌유고(漁村遺稿)》가 전한다.
2017.2.21.오여정 전경
그러나 지금의 오여정은 일부가 허물어지고 대청마루와 툇마루는 사라졌으며, 중수기 및 오여정 편액도 붙어있지 않으며 거의 폐허가 된 느낌이다. 누군가가 마당에 솟은 대나무와 너무 많이 자란 시누대 등을 제거한 흔적은 있지만 이제는 찾는 이 없는 낙동강 절벽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2017.2.21.오여정 측면 모습
2017.2.21. 마루와 툇청 등이 사라진 오여정 吾與亭
창녕누정록에는 오여정중건 기문이 실려 있어 지금(2020.2.27)에서야 다시 기록한다.
吾與亭重建記
聖門言志唯曾點氏 以浴沂風雩發夫子吾與之歎 程伯子自言 再見周茂叔吟風弄月 以歸有吾與點也之氣像 夫風浴吟弄之趣 何與於聖賢之實事 而言之若是然 且遙遙千載 猶足以使人興起者 豈非以其氣像也哉 昌山耆舊之儒 有漁村先生楊公 蚤遊桐溪鄭文簡先生門 獲聞道學旨訣之傳 而定爲依歸 旣復擧選泮黌 頗有進爲之志及見 鄭先生之言事 獲罪於光海西宮之變 剚腹守義於南漢下城之役 則遂決意賦歸鄕 居築亭江上 因其地名扁曰 吾與所以示其自適也 若使鄭先生而聞之亦 豈不爲之發 歎而深許之耶 而公之平日所 得於吟弄之趣者 因可想也抑 且妄嘗窃疑 以爲夫子之命 四子言志 本取適用之可 以而乃其發歎於曾氏之異 撰殆亦或有衰世之感 於中者乎 若其注中所稱 人欲盡處 天理流行 各得其所之妙 則自當於言外得之而周程授受之旨 要亦從其所傳 而道之云 而公之所 自扁吾與者 亦惟因是以發其志焉 則非其所學之己 見大意何以及 此後之善觀者 其亦必有取矣 公嘗與眉叟許文正先生 爲切交其卒也 則許先生題墓有磨不磷 涅不緇之語繼 而士林建光山書院 以倣古祭社之義 其遺集中所著 一時名賢可以見徃來之舊矣 是亭屢經興發 而間有寒浦李先生記文贊 其太和襟韻亦足 以備一觀也 今玆後孫錫撤來要 余以重建之記 則以余於其家 有先誼之可 講而不敢辭也 若其山川景物之勝 沙鴗潭魚之樂不能槩及 亦惟登臨 是亭者將 自得之云
丁巳元春之日 聞韻 金榥 謹記
오여정중건기 吾與亭重建記
공자님의 문하에서 뜻을 묻는 말에 오직 증점씨曾點氏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이나 쏘이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듣고 공자님께서 나도 그와 같이 하겠노라고 탄식을 발하시었다. 정程 백자伯子가 스스로 말하기를 주周 무숙茂叔에게 바람을 읊조리고 달을 보고 시를 지으면서 돌아올 때 나도 증점과 같이 하겠노라고 하신 기상을 다시 보았다고 하였다. 대저 바람 쐬고 목욕하며 음풍농월의 흥취가 어찌 성현의 실재의 일이며 말씀이 그와 같으며 또 멀고도 아득한 천년이 넘는데도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 되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어찌 그 기상 때문이 아니겠는가.
창녕의 옛날 나이 많은 선비에 어촌漁村선생 양공楊公이 계셨는데 일찍이 동계桐溪 정문간선생鄭文簡先生 문하에 유학하여 도학지결道學旨訣을 전하여 듣고 의뢰하여 따르기로 정하였다. 이미 또 과거에서 성균관에 뽑힌바 되어 자못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있었으나 정선생鄭先生의 나랏일에 관한 말이 광해군 때 서궁西宮의 변變에 죄를 얻게 되는 것을 보고 배를 갈라 의기를 지키며 남한산성을 내려오는 일에 미쳐서는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노래를 읊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낙동강 위쪽에 정자를 지어 거처하고 그 땅의 이름에 따라 편액을 오여정吾與亭이라 하였으니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정선생께서 들으셨다면 역시 어찌 감탄을 발하고 깊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공의 평소 음풍농월의 흥취에서 얻은 바를 이로서 가히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일찍이 공자님께서 네분의 제자에게 뜻을 말하게 하여 본래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인가를 가만히 의심하고 이어서 증씨曾氏의 다른 뜻을 말함에 탄식을 나타낸 것에 자못 마음속에 도덕이 쇠퇴한 세상의 감회가 혹 있었음인가. 그 주서한 가운데서 이른바 사람이 하고자 함이 다 한곳에 천리天理가 유행한다고 한 것은 각기 그 가진 바에 따라 도道라고 하며 공이 스스로 편액을 오여吾與라 한 것 도한 오직 그 뜻을 나타내는 것에 기인된 것이니 그 배운 바로 이미 그 대의大意를 보였음이 아니겠는가. 이후의 잘 관찰하는 이들에 미쳤어도 그 또한 반드시 취할 것이다.
공께서 일찍이 미수眉叟 허문정선생許文正先生과 절친하게 사귀었고 공께서 돌아가시니 허선생께서 쓰신 묘비가 있어서 갈아도 돌결이 일지 않으며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말씀이 적혀 있다. 사림士林에서 광산서원光山書院을 세워 옛날 제사祭社의 뜻을 따랐다. 남기신 글 가운데 적혀있는 바로 한때 이름난 현인들과 오래전부터 왕래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정자는 여러 차례 일으키고 폐허가 된 때가 있어서 그 사이에 한포寒浦 이선생李先生께서 기문한 글 가운데에서 공의 잘 조화된 마음씨와 인품을 잘 볼 수 있게 갖추어져있다. 이번에 후손 석철錫撤이 와서 나에게 중건기문을 청하니 그 가문과 나는 선대부터 친함이 있어서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 산천의 뛰어난 경치와 모래톱의 물새와 연못의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들은 그 대개에 대해서도 기록할 수가 없어서 그기에 미쳐서는 오직 이 정자에 이르는 이 그의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사년 원춘일 문소 김황 삼가 기록함.
2017.2.21. 점점 폐가가 되어 가는 오여정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암서집 제1권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다.’ 무술년(1898, 고종 광무2)〔泛舟洛江賦 戊戌〕에는 아래와 같은 시가 있어 옮겨 적는다. 이는 이만구李晩求선생이 남계정南溪亭 강회講會를 마치고 낙동강 뱃놀이를 하면서 오여정吾與亭을 찾았을 때 읊은 시詩이다.
回沙頭而解纜(회사두이해람) 백사장 머리를 돌아 닻을 풀자
望烏山於咫尺(망오산어지척) 지척의 거리에 오산을 바라보니
何飛雨之滿空(하비우지만공) 어찌 날리는 빗발이 허공에 가득한가
助風流於一席(조풍류어일석) 한 자리에 풍류를 돕네
忽亭楣之入眼(홀정미지입안) 홀연히 정자의 편액이 보이니
俯千仞之危壁(부천인지위벽) 천 길의 높은 절벽 굽어보고 섰음이여
緬風詠之遐志(면풍영지하지) 풍영의 옛 뜻 멀리 생각하매
誰能繼夫往跡(수능계부왕적) 누가 능히 옛 자취 이을까
내제來濟로부터 배에 올라 물을 따라 내려가는데 중류中流에서 비를 만났다. 사면의 구름 낀 산의 경색景色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공을 재촉하여 노를 저어서 오여정吾與亭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오여정 합각의 아름다운 꽃>
시에 나오는 風詠(풍영)은 배에서 바라보이는 곳의 정자 이름이 吾與亭(오여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 오여정이란 이름은 논어 선진편論語 先進篇에 나오는 글귀로 공자와 자로子路와 증석曾晳과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와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각자 포부를 묻게 되는데 증석이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 공자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吾與點也-나는 점과 같이 하겠노라.” 했다. 오여정吾與亭의 이름은 공자의 이 말에서 나왔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泳而歸.”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늦은 봄 음 삼월에 흩날리는 봄옷을 갖추어 입고, 원복 입고 갓을 쓴 성인 5~6인, 십대의 동자 6~7인을 데리고 저 남쪽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한 후, 기우제를 올리는 무우舞雩단 위에서 바람 쐬고 노래를 읊으며 돌아오리다.”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三子者出, 曾晳後.
부자께서 들으시고 아~ 감동의 탄식을 내쉬면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점과 같이 하겠노라.” 세 사람이 다 나가고 그 자리에 증석만 공자 옆에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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