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의령군 미연서원을 이의정이라 부르는 이유

천부인권 2017. 4. 7. 07:53

 

2015.8.9. 의령군 대의면 모의곡 중촌마을 미연서원 외삼문 인지문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 765-1번지는 모의로와 중촌마을로 들어가는 모의로3길이 만나는 삼거리 도로변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85호”가 된 미연서원(嵋淵書院)과 1979년 12월 29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미수기언책판(眉叟記言冊板)이 있던 곳이다.
의령군 모의곡 중촌마을 입구에 위치한 미연서원은 미수(眉眉) 허목(許穆, 1595~1682)을 추모하기 위하여 1825년(순조 25)에 윗마을 행정리에서 창건했다. 그 후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명으로 훼철되었다가 45년 후 1901년 현재의 자리에 이의정(二宜亭)과 영당(影堂)을 지었으며, 1975년에 지금 모습의 서원을 복원하였다. 1901년 이의정(二宜亭) 건립 당시 이의정의 기와를 창녕군 지역에서 생산한 것이라 창녕군민이 의령군의 경계까지 부역으로 날랐고, 의령군의 경계에서 부터는 의령군민이 기와를 날랐다고 전한다. 이처럼 이의정의 건립과 미연서원으로의 완성이 하나의 건물을 두 개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됐다.

 

 

외삼문에 걸린 인지문 편액
서원의 좌측에 있는 고직사

 

「위키백과」에 따르면 “재건된 이의정은 정면 5칸, 측면 전후퇴가 있는 1칸의 5량가 팔작지붕으로 연대가 비교적 오래되어 지정문화재로서의 고찰 의미가 있고, 전통법식을 충실히 따른 건물로서 재목 및 치목 등이 우수하며 창호 등이 건립당시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등 관리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허목 선생의 시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제작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미수기언책판과 관련이 깊은 만큼 강당 1동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한다.”고 한다.

 

 

미연서원 전경

 

한양에서 태어난 미수선생이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수는 강원도로 피란을 하였다가 선대의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오니, 동생인 죽천(竹泉) 허의(許懿)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에 어머님을 만나기 위해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로 오게 되었다. 그때 세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의 행정리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동생 죽천은 경남 사천에 있는 퇴계의 제자 귀암(龜庵) 이정의 손서였으므로, 처가가 있는 사천으로 갔다가 처외가인 순흥안씨들이 살고 있는 모의곡 행정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은 행정리에 안씨들이 살지 않는다.

 

 

 

장판각


이곳 이의정에 세운 안내판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미수기언 책판」에 대해
『이곳에 소장된 책판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시문집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허목의 문집은 1689년(숙종 15)에 왕명으로 전라도 나주의 미천서원(眉泉書院)에서 처음 간행된 뒤, 1905년(광무 9)에 의령 지역 유림에 의해 다시 간행 되었다. 한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병자호란 때 대의면(大義面) 모의(慕義)에 피난한 후 줄곳 이곳과 연고를 맺어 왔다. 그런 까닭에 1881년(고종 7)에 이 지방에 사는 이석홍(李錫弘)에 의해 허목의 경례유찬(經禮類纂)이 간행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역 유생들이 이의정(二宜亭 :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짓고(1901년) 다시 문집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장판각(藏板閣)에는 이때 제작한 ‘미수기언’ 책판 869매가 보관되어 있다. ‘기언’이란 명칭은 선생이 직접 쓴 “말은 군자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면 반듯이 써서 날마다 반성하고 실천에 힘써 왔는데 이렇게 모은 글을 ‘기언’이라 한다.”라는 서문에서 끌어온 것이다. 허목은 23세 때 정구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퇴계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성호 이익이 계승함으로써 퇴계학의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연서원 정면에는 3개의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오른쪽 이의정(二宜亭) 편액 글씨는 죽우 양진니(竹友 楊鎭泥)선생이 7세 때 쓴 글씨라 전하고, 왼쪽의 글씨는 미수선생의 전서체(篆書體) 글씨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眉).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간(艮)이고,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 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馬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泉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양진니楊鎭泥 쓴 이의정二宜亭 편액
미수가 쓴 이의정二宜亭 편액

 

출처 및 참조
미수 허목의 의령 대의면 이의정(二宜亭) [한국의 혼 樓亭]|작성자 ohyh45
김해김씨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다음카페
「미수기언 책판」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