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6. 합천 문림리 호연정 은행나무와 담장
율곡면사무소 지명유래에 의하면 『문림리는 조선시대 합천군 천곡면 지역으로 민갓,문갓 또는 문림이라 불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 하천동(下泉洞)일부를 병합하여 율곡면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주세붕(周世鵬)이 벼슬에 진출할 때 중종께서 출생지를 하문할 때 민갓이라 하니 중종이 선비가 숲같이 많이 배출 하라는 뜻으로 문림(文林)으로 동명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일제 침략 시와 광복 후 1959년 7월까지 율곡면 면소재지로 면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2구로 구성된 상주주씨 집성촌이다.』고 한다.
2017.4.16. 호연정. 비각. 세덕사가 있는 풍경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 224-1번지는 황강이 굽이쳐 동으로 흘러가는 강변에 위치한 문림마을 앞 황강과 맞닿은 언덕으로 1981년 12월 2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이 된 ‘합천 문림리 호연정(陜川 文林里 浩然亭)’이 위치한 곳이다. 호연정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따온 것으로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을 뜻한다. 호연정은 조선중기의 학자 이요당 주이(二樂堂 周怡 1515~1564)선생이 건립한 정자로 커다란 은행나무 노거수를 표식수 삼아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담으려 했던 선비의 정신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호연정을 건설한 주이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명석하여 당숙인 주세붕선생이 어린 주이선생을 무릎위에 앉혀 놓고 "네가 장차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라고 했다한다.
이곳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때를 만나면 조정에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귀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이때 귀향한 사대부들이 공들여하는 일중의 하나가 정자(亭子)를 짓는 것이었다.
이 정자는 조선중기 이요당 주이(二樂堂 周怡 1515~1564)가 선조 때 예안현감을 사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래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협소한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정자는 먼 곳을 조망할 수 있는 누각(樓閣)처럼 경관을 넓게 볼 수 있는 곳에 지었다. 이를 통해 건립자의 자연관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명칭과도 잘 어울리는 자리라고 하겠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형식이지만,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이처럼 기묘한 건축방식 때문에 조선시대 정자 중 특이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각 부분의 자재 사용도 일반 건물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인곤적 절재나 질서를 무시한 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건물 주인의 자연관과 건물 이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건축물이라 여겨진다.』고 기록 했다.
동쪽 출입문 인지문
주소를 입력한 네비가 이끄는 대로 가니 황강 둑으로 난 임북길에 이르러 호연정의 위치를 알게 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올라보니 커다란 은행나무가 압도를 한다. 흙돌담으로 만든 담장에 안내문이 있어 대충 읽은 후 그 옆 인지문(仁智門)이라는 편액을 단 작은 출입문 안으로 들어갔다.
호연정의 공간에는 세덕사, 영모사, 비각, 사주문, 인지문, 관리사인 돈목사(敦睦舍)로 통하는 협문이 있고, 거목의 숲으로 이루어진 정원과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하는 마당의 정면에 호연정이 위치한다. 정원에 배치한 수목의 위치와 나무의 종류들은 호연정을 건립한 주이선생의 균제미와 절제된 미적세계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동쪽 인지문 옆 은행나무
주이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두 그루인데 한그루는 인지문 옆 동쪽 담장 쪽에 있고, 다른 한그루는 호연정 정면의 마당을 지나 황강으로 접어드는 절개지 끝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원줄기가 거의 죽은 상태이고 외피막은 거의 3분의1만 남은 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보호수로 지정해도 무방한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가 나란히 절개지의 사면부에서 자라고 있는데 황강의 세찬 바람을 막아 주는 구실을 하는 위치에 있다.
동쪽 절개지에 위치한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
특히 이곳에는 배롱나무가 타 나무들에 비해 많은 편인데 아마도 나무의 수피와 목재가 비슷하게 보이는 이러한 나목(裸木)을 심은 것은 ‘선비는 행동과 생각이 일치하는 군자의 모습을 추구’ 하는 것에서 연유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정원에는 느티나무, 민주엽나무, 생강나무, 팽나무, 소나무, 수수꽃다리, 목련나무, 향나무, 겹벚꽃나무, 화살나무 등이 식재되어 마치 식물원을 연상케 한다.
거의 죽어가는 은행나무
호연정 내 비각
세덕사와 배롱나무
호연정의 정면 앞에는 사찰·서원·정자 등에서 야간 행사를 할 때 관솔지나 송진을 태워 경내를 밝히는 정료대(庭燎臺)가 세워져 있어 밤에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3칸 중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2칸은 마루인데 마루의 천정의 창방보를 보면 곡선으로 이루어진 나무를 사용하여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이 보인다.
호연정(浩然亭) 정면 앞에 붙은 편액은 미수 허목이 전사체로 쓴 글씨이다.
동쪽 면의 호연정 역시 창방보(昌枋梁)는 휘어진 나무를 사용했다. 지붕의 합각에는 난초를 연상케 하는 꽃송이를 장식했다. 호연정의 기둥은 민흘림기둥으로 기둥의 굵기도 다양하다. 나무의 소재도 참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 다양하다.
내부의 들보에 붙은 다양한 편액들 중에 조선시대 선비의 근본 도리가 되는 ‘敬’이란 글자가 다른 편액 보다는 큰 글자를 사용했다. 경(敬)은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상태로 유지하는 수양방법이다. 주희는 학문에서 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경으로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면, 의로써 일을 반듯하게 할 수 있고 경에 의가 없으면 일에 착오가 일어나고 의만 있고 경이 없다면 근본이 없어 의라 할 수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재미난 것은 지붕 밑 들보를 휘어진 나무를 사용하여 마치 꿈틀대는 용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보이게 했다. 그리고 휜 들보가 역할을 다하도록 짧은 편목에 거북을 조각하여 힘을 분산해서 받을 수 있도록 끼워 넣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부재들이 장식적인 면들이 도드라지며, 두 가지 이상의 건축양식을 혼용해 쓰고 있어 건물구조에 변화가 많다. 그래서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 등과 함께 영남의 3대 건축 예술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浩然亭記
繇陜川治東南行穿長林涉 大川谷轉村盡斷岸阧 起川回下亭據其上 此周氏浩然亭也 亭中老木千尋滄流 白沙之十里 晻暎於山 光野色之間者 坐而見也 東望翠屛干 雲屛下棧道五里 行人之往來者 累累如繩貫也 今年夏余從黃侍郞 與三嘉趙使君往 遊焉主人出迎貌古 而禮肅問亭之始終曰 吾五世祖禮安公之所作也 問禮安公行蹟 出遺事及遺文略干 篇盖公愼齋之從侄也 從退溪遊與門下 諸賢相好早擢科第奉 命專對力求 外補以遂雅趣猶 以文簿爲覊馽仕䆠 爲桎梏投紱高厲優遊於斯亭之上 不待問亭之名 而浩然之趣可想也 余與三嘉趙使君相視 而笑曰 州縣勞碌田園蕪穢 悠悠今日我輩何如人也 黃公曰禮安公墓 吾將刻之矣 亭則子其志之遂爲記
爲記壬午四月晦日知丹城縣
仁川 蔡希範 記
호연정기(浩然亭記)
합천군사에서 동남으로 가니 장림長林을 뚫고 대천을 건너서 골짜기를 돌아 마을이 전개하고 단안斷岸이 우뚝 솟아 강물이 도는 아래에 정자가 있으니 이것이 주씨周氏의 호연정浩然亭이라. 천길 고목이 뜰에 서있고 맑은 강물이 10리 백사장을 흐르면서 산빛과 들빛 사이에 비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있다. 남으로 푸른 절벽과 구름이 병풍 되는 아래 개비리 5리길에 오가는 행인들이 마치 줄을 타고 가는 듯하다.
금년 여름에 내가 황시랑黃侍郞과 삼가三嘉의 조사군趙使君을 따라 놀러가니 주인이 맞이 하는데 의관을 정제하고 예의 바른지라 정자의 내력을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우리 5대조 예안공禮安公이 지었는데 1592년 임란에 탔고 숙부가 세웠으나 지탱하지 못했음으로 내가 수리했다.」하고 또 예안공의 행적을 물으니 유사遺事와 유문 몇 권에 나왔으니 공은 진재愼齋의 당질이라. 퇴계退溪를 따르는 유림으로 퇴계 문하의 제현과 친교가 두터웠다. 일찍 과거에 올라 왕사를 도우고 외직을 희망하여 맑은 취미를 이루었다. 문부에 얽매이고 벼슬에 속박됨이 싫증이 나서 관직을 버리고 이 정자 위에서 소요逍遙하니 정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도 호연의 기상을 상상하겠도다. 내가 삼가현감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고을살이 하느라고 고향전원 다 묶는다. 이럭저럭하는 우리들은 뭣 하는 사람인고. 황공黃公이 말하기를 예안공 묘갈명은 내가 지을 것이니 정자는 자네가 기록하라. 그래서 드디어 썼다.
하여 기록하다 임오년 사월 회일에 단성현에서 알게하다.
인천 채희범 기록하다.
浩然亭記
余家南山之下峰 壑繚繞松檜欝蒼霜 後楓菊照爛庭除 卽東岳先祖觴詠之所 而傳至于今者也 每官罷與朋知杖策涉園浩然 有難言之趣及來嶺外日爲朱墨所困不復有 此樂已經年矣 陜川周君仁甲來求 其五世祖校理公浩然亭記 噫公之亭名與其遺事 何其起余也 公幼受業於從父 愼齋長遊退溪之門 其集義養氣之功講之熟矣 甞以書狀官朝皇明世宗皇帝命 賦盆松公詩有 直不容之語 時諫官多以言獲罪 故諷之也 皇帝大加稱賞由 是朝之薦紳大夫皆稱 公以直不容先生及歸出 爲禮安縣監一朝 解弔還鄕亭于 東江之上扁曰浩然有揖仙 㙜聽琴榭松壇竹塢杏渚釣磯凡 可以助浩然之氣者 莫不備具夫 以渺然屬國之陪臣 抗詞天子之庭略無畏難 是孟子所謂說大人藐之勿視 其巍巍然其氣之浩然 果何如哉 蚤歲蜚英進塗方亨 而視富貴如浮雲棄 墨綬如草芥 是孟子所謂令聞廣譽施於四 軆所 以不願于 文繡其氣之浩然 又何如哉 方公之岸幘倘佯於川雲魚鳥之間 當有浩然與天地上下同流者 今皆不可得以知矣 惟有古亭巋然如靈光之殿 宜後繩之徘徊 顧惜重新而圖久也 與如余者非徒不能養氣 徒滚汩藩屛欲歸 而未得其有愧於公多矣 然重違周君之請 且寓景慕之私 不辭而爲之記
觀察使李瀰
기둥사이에서 보는 풍경
浩然亭記
在郡東十里泉谷面黃江上 都事二樂堂周怡 恬退歲修 而取浩然歸來之意也 亭上有揖仙臺 亭下有聽琴臺 與從叔愼齋世鵬 退溪李滉 錦溪黃俊良月川趙穆 論道講劘所也 恬退詩曰 襟懷自是慕淵明 肯佩牛刀滯武城 白石淸川紅樹裏 依然還作一書生 ○白鷗詩十里平湖自在遊 生涯不出淡烟洲 淸江浴罷眠沙岸 未識渠邊亦到愁 ○錦溪黃俊良贈詩曰早辭世網纏江 社歸爲伴釣石漱 餘憩詩壇忝奉盥 ○又爭走紅塵似病狂 獨超群醉出名場 湖光侵褟琴書淨 花氣薰人杖履香 彩筆吐虹凌紫電 靑蛇藏匣澟淸霜 江風山月閒田地 幾月登臨倒玉觴○記
繇陝川治東南行 穿長林涉大川 谷轉村盡 斷岸阧起 川回岸下 而亭據其上 此周氏浩然亭也 庭中老木千尋 滄流白沙之十里 晻映於山光野色之閒者 坐而見也 南望翠屛干雲屛下 棧道五里行人之往來者 累累如貫繩也 今年夏余從黃侍郞 與三嘉趙使君 往游焉主人出迎貌古 而禮肅問亭之始終曰 吾五世祖 禮安公所作也 燬于島夷吾叔嘗新之圮不支 吾又修之也 問禮安公行蹟出 遺事及遺文略干 篇蓋公愼齋之從姪也 從退溪遊與門下 諸賢相好 早擇科第奉命專對力求 外補以遂雅趣 惟以文簿爲羈馬仕宦爲桎梏投紱高 厲優遊於斯亭之上 不待問亭之名 而浩然之趣可想 余與三嘉使君相視而笑曰 州縣勞碌田園莽穢悠悠 令日我輩爲何如人也 黃公曰禮安公墓 吾將刻之矣 亭則子其識之遂爲記
詩曰山色參差擁檻靑 層崖突兀自成亭 淸沙影抱滄江窄 老木陰收白日停 遊客初來慙墨綬 古人不見仰蒼屛 賢孫何幸重新日 太史懸詩敵斗星 知丹城縣蔡希範記 題詠江流湛湛碧峰峨 先哲遺踪一夢過 水與山回成勢窈 地因人顯得聲多 琴臺松影懸明月 鶴瀨漁澄漾綠波 地聲曾無遺債恨 相隨韻士有羊何 石門退士尹鳳五蔡希範記文 李瀰重修記 金始煐上樑文 後孫足閑公仁甲肯構傳守
호연정기(浩然亭記)
호연정은 합천읍 동쪽 10리 천곡면泉谷面 황강黃江 위에 있으니 도사都事 이요당二樂堂 주이周怡가 명예와 물욕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하고 장수한 곳인데 호연浩然히 돌아온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정자 위에 읍선대揖仙臺와 아래에 청금대聽琴臺가 있다. 종숙 신재愼齋 세붕世鵬과 퇴계 이황李滉과 금계 황준량黃俊良과 월천 조목趙穆과 같이 도를 의논하고 강마하던 곳이다. 염퇴시恬退詩에 마음속에 품은 회포도 연명을 생각하니 어찌 큰 포부를 갖고 작은 고을에 지체하리요 천석 좋고 단풍 짙은 이곳에서 부귀영화 다 버리고 일개 서생 되겠노라!
백구시白鷗詩에 10리 평호平湖상에서 자유로이 놀고 거니니 담박한 생애는 자연 풍경을 벗을 삼을 뿐이로다. 강물에 목욕하고 모래밭에 누웠으니 알지 못해라 여기에 또한 근심이 찾아올까? 금계 황준량이 시를 보내어 이르되 일찍 벼슬길을 사양하고 강정에서 백구와 짝하도다. 조석釣石에서 몸을 씻고 쉬며 시 읊는 자리에서 정신 맑게 하노라. 또 세상 사람들은 명리를 다투어서 미친 듯이 날뛰는데 홀로 뭇사람 취중에서 벗어나 벼슬자리 떠났구나. 호수 빛이 서당에 들어오니 거문고와 책이 맑아지고 꽃기운이 사람을 훈습薰濕하니 지팡이조차 향기롭구나. 글씨는 무지개를 토하니 자전紫電을 능가하고 청불쇠靑不釗 감춰두니 추상같이 늠름하다. 강바람 솔솔 불고 산달 밝은 못 위에서 몇 번이나 올라와서 배주盃酒로 즐기는고. 기문記文에
합천군사에서 동남으로 가니 장림長林을 뚫고 대천을 건너서 골짜기를 돌아 마을이 전개하고 단안斷岸이 우뚝 솟아 강물이 도는 아래에 정자가 있으니 이것이 주씨周氏의 호연정浩然亭이라. 천길 고목이 뜰에 서있고 맑은 강물이 10리 백사장을 흐르면서 산빛과 들빛 사이에 비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있다. 남으로 푸른 절벽과 구름이 병풍 되는 아래 개비리 5리길에 오가는 행인들이 마치 줄을 타고 가는 듯하다.
금년 여름에 내가 황시랑黃侍郞과 삼가三嘉의 조사군趙使君을 따라 놀러가니 주인이 맞이 하는데 의관을 정제하고 예의 바른지라 정자의 내력을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우리 5대조 예안공禮安公이 지었는데 1592년 임란에 탔고 숙부가 세웠으나 지탱하지 못했음으로 내가 수리했다.」하고 또 예안공의 행적을 물으니 유사遺事와 유문 몇 권에 나왔으니 공은 진재愼齋의 당질이라. 퇴계退溪를 따르는 유림으로 퇴계 문하의 제현과 친교가 두터웠다. 일찍 과거에 올라 왕사를 도우고 외직을 희망하여 맑은 취미를 이루었다. 문부에 얽매이고 벼슬에 속박됨이 싫증이 나서 관직을 버리고 이 정자 위에서 소요逍遙하니 정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도 호연의 기상을 상상하겠도다. 내가 삼가현감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고을살이 하느라고 고향전원 다 묶는다. 이럭저럭하는 우리들은 뭣 하는 사람인고. 황공黃公이 말하기를 예안공 묘갈명은 내가 지을 것이니 정자는 자네가 기록하라. 그래서 드디어 썼다. 시詩에 웅긋중긋한 푸른 산은 난간으로 둘러있고 울퉁불퉁한 층층대는 자연의 정자로다. 모래밭에 그림자 내리니 강물은 흘러 뚫고 노거수에 그늘 짙으니 가는 해도 멈추노라. 나그네 처음오니 관인官印 찬게 부끄럽고 옛 사람 못보고 유적만 우러른다.
현손賢孫이 다행이도 옛 모습 가줬으며, 태사공이 시를 현판 했으니 북두성과 짝이로다. 단성현감 채희범蔡希範 기록하다. 제시題詩에 꽃다운 강물은 담다하고 푸른 산봉우리 높도다. 선철先哲의 남긴 자취에 꿈같이 지내노라. 산수는 돌고 흘러 요지경을 이루었고 땅은 훌륭한 사람을 인연하여 값어치가 많도다. 금대琴臺의 솔그림자에는 명월이 달려 있고 학뢰鶴瀨의 고깃불은 창파에 일렁인다. 이름난 승지에 빚진 한이 없으니 양하羊何와 같은 시인을 따라 여기 왔노라. 석문퇴사 윤봉오尹鳳五(1688~1769) 채희범蔡希範의 기문과 이미李瀰의 중수기와 김시영金始煐의 상량문이 있고 후손 족한공 인갑仁甲이 지어서 대대로 지키고 있다.
기둥사이에서 보는 풍경
기둥사이에서 보는 풍경
호연정 뒤쪽
호연정 서쪽
호연정 주씨 종훈
영모제
정문격인 사주문
돈목사로 통하는 협문
관리사인 돈목사
호연정의 관리사인 돈목사(敦睦舍)는 서쪽에 있고, 돈목사의 서쪽에는 주이선생의 제사공간인 추원재(追遠齋)가 위치하고 있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은 "조상의 덕을 추모(追慕)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恩惠)를 갚는다."는 뜻이다.
돈목사(敦睦舍) 편액
추원재(追遠齋)
호연정(浩然亭)의 주인 주이(周怡)의 아호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知者樂水),인자요산(仁者樂山) 에서 인용한 것이라 하는데,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아래의 문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니
知 者 動 仁 者 靜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사람은 정적이며
知 者 樂 仁 者 水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추원재 편액
출처 및 참고
합천군 율곡면 홈페이지-설화·지명유래
다음백과-경
합천누정록-합천문화원/합천군/세기인쇄(2002.2.20)
'역사의 기록 > 문화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지여중고등학교에 있는 성요셉성당 (0) | 2017.08.06 |
---|---|
위라리칠층석탑과 화천박물관 (0) | 2017.07.08 |
의령군 미연서원을 이의정이라 부르는 이유 (0) | 2017.04.07 |
창녕 술정리 진양하씨 초가(경상남도 중요민속자료 제10호) (0) | 2017.03.25 |
창녕 직교리 당간지주 (0) | 2017.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