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녕 술정리 진양하씨 초가(경상남도 중요민속자료 제10호)

천부인권 2017. 3. 25. 21:19



2009.10.14. 억새로 지붕을 이은 술정리 진양하씨 외삼문 초가


창녕읍 술정리 29번지에 위치한 창녕 술정리 진양하씨초가(昌寧 述亭里 晉陽河氏草家)는 1968년 11월 25일 중요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건축물 문화재이다. 국보 제34호인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이 속한 사찰 건물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쯤에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한다. 술정리 진양하씨 고택이 남향을 하고 있는데 남쪽방향의 일직선상에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이 서있다. 또한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에서부터 이 초가고택에 이르기까지 거의 평지와 같으나 집 뒤에 있는 2단의 화계를 보면 2.5m 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려 이 땅의 지형이 여기에서 前低後高(전저후고)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의 외삼문은 중앙에 대문을 달고 좌우에 방과 광을 두어 공간을 활용 했으며,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는 것은 이곳 인근은 억새가 많이 생산되어 이를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보통의 초가는 볏짚으로 지붕을 잇지만 해마다 지붕을 이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억새나, 물억새 또는 갈대로 지붕을 만들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어 힘은 들지만 이런 재료로 지붕을 이은 예로는 ‘김해 장방리 갈대집’이 있다.




<2009.10.14 안채가는 곳에서 본 사랑채 입구 모습>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반쯤만 사랑채가 위치하고 좌측의 문으로 출입을 하게 되어 있으며, 안채로 가려면 사랑채의 우측 담장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의 팔작지붕 와가이며, 뒤쪽은 안채의 앞마당과 공유를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남쪽지역 토호들의 집들에서 주로 나타나며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를 통해 남·여의 활동영역이 달랐음을 암시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된 이 안채의 초옥은 일반적인 초가3칸이 아니라 4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칸의 간격도 꽤 넓어 평민이 살던 초옥과는 집의 규모가 다른 집이다. 이곳을 방문할 당시가 10월이라 도심의 주택에서는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이 집안 곳곳에는 鷄冠花(계관화)라 부르는 붉은 닭의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꽃이 피어 있어 전통사상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맨드라미를 집안에 심는 이유는 큰 벼슬을 하라는 뜻도 있지만 특별한 약이 없던 시절에 하혈이나 자궁출혈, 생리통, 습진, 비염, 축농증 등의 민간요법으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청마루 위쪽은 대들보와 천정이 드러나 있어 자연스런 모습이다.




<안채의 부엌 모습>



<측면에서 본 진양하씨 안채 모습>


이곳 안내판에는 『이 집은 아담한 사랑채 뒤편으로 초가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안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보통 초가삼간이라 부르는 일자형 홑집이다. 오른쪽의 첫 칸이 부엌이며 다음 칸이 안방이고 이어서 대청, 그리고 건너방이 차례대로 있는 각각 1칸씩 된 4칸 집이다.
자연석으로 댓돌을 만들고 죽담[잡석과 흙을 섞어서 쌓은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죽담 높이는 장대의 두벌대 높이로 하였다. 대청 앞쪽과 부엌문 앞에 층계를 두고 죽담에 오르내릴 수 있게 꾸몄다. 주춧돌은 산석을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다. 그 위에 방주[네모진 기둥]를 세웠으며 기둥 높이는 높지 않는 편이나 기둥과 기둥 사이의 주칸은 비교적 넓어서 안정감이 있다.
기둥 사이의 벽은 중깃을 엮고 맞벽으로 친 것인데 원래는 흙담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대식 공법의 분벽으로 바꾸었다. 이런 변형은 안방과 건너방의 미닫이에서도 볼 수 있다. 완자무늬의 미닫이가 달렸으나 이는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간에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두 짝 판문도 역시 개조되어 엿 맛을 잃었다.
남방의 집은 대개 高床形(고상형)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많으나 집은 오히려 산곡간의 低床式(저상식)의 집처럼 전퇴를 생략하고 있으며, 방 앞에 쪽마루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당초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 된다. 이러한 집의 골격이 토방의 봉당 구성에서 연유되는 것이라 믿어진다. 집의 필요에 따라 골격에 새로운 요소들이 가미되었던 것이라 해석 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약간씩의 첨가와 변화가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에서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처마는 남쪽 특성에 따라 깊게 구성 되었고 기둥 높이를 1이라 기준하면 처마 깊이가 거의 1에 가깝다고 할 정도 이다. 이러한 점은 살림집을 연구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붕은 이엉 대신 억새풀을 이었다. 억새풀로 이은 것은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감각에서도 엿스럽다. 그리고 앞마당은 편평하고 반듯하게 하였고 뒷마당에는 花階(화계)가 있고 있고 동산이 만들어져 있으며 몇 그루의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뒤마당으로 가면서 본 농기구와 장작 등>



<일반 양반집의 전통적 화계 구조의 전형을 보여 준다.>



<잘 정된 된 화계와 뒤마당>





안채의 앞마당과 사랑채의 뒤마당이 하나인 공간으로 공유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