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율티리 전주이씨 경사재 敬思齋

천부인권 2017. 12. 3. 06:01



2017.1.14. 진전면 경사재 입구 풍경


합포구 진전면 율티리 310번지는 전주이씨 율정 이훤(李暄)을 추모하는 경사재라는 재실이 있다. 율티마을 뒤편 산자락에 있어 마을과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이다. 건물 입구 절개지에는 팽나무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어 그 품격을 더하고 절개지를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무산부정공 종각(全州李氏 孝寧大君派 茂山副正公 宗閣)이라는 비판이 서있다. 대문에는 “돈인문(敦忍門)”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고 본채에는 “경사재(敬思齋)”라는 편액이 자리한다.





경사재기
옛 어모장군 율정(栗汀) 이공 휘 훤(暄) 및 배우자 숙부인 최씨의 묘가 진해현 옥녀봉 아래 율티(栗峙)의 축좌 언덕에 있다. 지금 그 후손들이 묘도(墓道) 아래에 재실을 지어 놓고 해마다 시향(時享)을 받들고 또 재계(齋戒)하고 유숙(留宿)하며 학업을 익힐 장소가 갖추어졌다. 경은재라고 현판하고 후손 수영(秀暎)이 그 역을 주간(主幹)하며 정성을 다하고 부지런 하였다. 일찍 나를 맞이하여 구경하게 하고 그 사실을 말하면서 기문을 요구하였다. 근원이 같은 후손으로 어찌 그 비문을 읽어보고 대개 그 일생을 상고(詳考)할 수 있었다. 정이공(靖李公)은 효령대군의 칠세손으로 이미 왕족으로 복록의 음덕을 받아 학문이 넓고 문견(聞見)이 많으며 경륜이 넉넉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뽑히어 명성을 떨쳐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에게 은택을 내리는 뜻을 궁구(窮究)함이 있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품(性稟)이 평온하고 조용하여 벼슬과 부귀를 버기 뜬 구름같이 하고 사리에 밝아 자기를 잘 보전하여 한 지방의 모범이 되었다. 이로부터 나라에서 여러번 청직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셨다.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조용히 지낸 것 또한 대군의 풍운(風韻)을 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로 자손이 크게 번성(繁盛)하고 문유(文儒)가 배출되어 대대로 시례(詩禮)로 사로 전하여 문중이 혁혁(奕奕)함은 지방의 씨족으로서는 견주기가 드물다. 공이 덕을 쌓아 음우(陰佑)를 물려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재실의 터를 잡으니 앞이 탁 트여 박으며 위로 우러러 보면 간이 비단 병풍(屛風)같이 둘러싸고 아래로 굽어보면 바닷물은 거울같이 밝아 올라가보면 굉장(宏壯)하고 볼만한 광경이 악양(岳陽)의 경치와 비슷하여 먼 산을 머금고 긴 강을 삼켜 아침 햇볕과 저녁노을에 기상이 만가지 천가지며 상하의 하늘빛이 한결같은 푸름이 만경(萬頃)이나 된다. 고요한 달그림자는 구슬 같이 밝은 물에 잠긴듯한데 고기 잡는 노래 서로 화답(和答)하니 어찌 동정호의 경치와 차판(磋辦)한가? 마음이 비고 정신이 온화하여 영예(榮譽)와 욕됨을 다 잊어 범희문(范希文)이 지은 것이 어찌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합치 되었는가? 대개 지령(地靈)의 발복은 마땅히 더디고 빠름이 있으며 또 인사의 느낌과 풍기(風氣)의 열림을 기다려 조짐이 되는 것이다. 이 재사(齋舍)와 지경(地境)이 서로 만난 것이 천고에 비장(秘藏)한 경치를 열었으니 인사와 지령이 서로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이공(靖李公) 종중은 누세(累世)에 서둘지 못하였던 일에 마음을 두어 정신을 다하고 山海는 모습을 바꾸어 人事는 이미 느낌이 있고 풍기는 바야흐로 열림이 있도다. 지령의 발복이 끝내 다함이 있을까? 시경(詩經) 소아(小雅)에서(선조가 집 담장 아래 심어 자손에게 물려 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절하여 공경한다하였다.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선인들의 손때가 묻어 오히려 공경하는데 하물며 선인의 체백(軆魄)이 묻히고 정령(精靈)이 척강(陟降)하는데 있어서랴! 여러 후손들이 해마다 시향(時享)을 지낼 때에 이 재실에서 재계하고 유숙하면서 감히 율정공(栗汀公)의 유풍과 적덕(積德)을 공경(恭敬)하며 사모하지 않을손가? 공경히 추모하는 뜻 또한 효우(孝友)와 목족(睦族)과 수신과 불과할 따름이다. 율정공의 전광을 승습(承襲)하여 여러 후손들에게 가문의 법도를 물려주는 것도 진실로 경사의 도에 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배움을 기다려 밝히게 되니 학문은 실로 사우들의 강마(講磨)에 힘입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정이공의 종중인들이 모의(謀議)를 모아 선조를 숭상하는데 시대의 조류(潮流)가 변하여 경체문질(敬體文質)이 예전에 비하여 손색(遜色)이 있으므로 그 단점을 보완하여 미루어 넓힐 것이며 진실로 스승을 찾고 벗을 취하여 학문에 나아가며 효우와 목족과 수신과 성찰의 도를 다하면 겨우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다하는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다시 문덕의 선비가 화려하게 배출 되면 선세(先世)가 물려준 영향을 멀리서 접하여 율정공의 아름다운 후손으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로서 기문을 삼으니 힘쓸지어다.


1979년 대한에 이우섭이 기록하다.





敬思齋記-원문
故禦侮將軍栗汀李公諱暄曁其配淑夫人崔氏衣履之葬在鎭海縣玉女峰下栗峙負丑之原今其裔孫就隧下肯構一舍以奉歲事且備齊宿肄業之所而扁之曰敬恩齋後孫秀暎幹其役誠勤嘗邀予登覽因道其事要文以記之揆以同源豈敢辭娛惟公靖陵時人讀牲石之銘而槪考其生平矣靖李公孝寧大君七世孫而旣席天潢笰祿之蔭博學多聞優有經綸則玉署紫雲若可以攀援顯庸以究其致君澤民之志而素性恬靜視軒冕富貴澹然如浮雲明哲保身爲一方著龜矣由是自朝家屢降淸秩而終不起鞱自靖其亦有襲於大君之風者歟厥後孫支丕蕃文儒輩出世以詩禮文欄之奕鄕族罕比寔公積德錫蔭之所由起則可見源深而流是齋也長也占址爽塏仰挹錦屛之圍俯臨風灣之鏡登臨壯觀有似乎巴陵之勝銜遠山呑長江朝暉夕陰氣像萬千上下天光一碧萬頃靜影沈璧漁歌互答何其髣髴乎洞庭之景也心曠神怡寵辱俱忘希文之述亦何其與予所欲言資不謀而合也盖地靈之發宣有遲有速亦待夫人事之感風氣之開而爲之機焉比齋與境之相遇而有以闢千古秘藏之勝則可謂人地相得矣華宗乃能留心於累世未遑之擧殫誠鳩財成此傑構使洞壑增輝山海改觀是其人事己感矣風氣方開矣地靈之發宣其有終窮乎詩曰維桑與梓式恭敬止桑梓是先人手澤之所淹而尙且敬止况先人軆魄之所臧而精靈涉降之地乎諸後孫之歲時齊宿於斯齋者敢不敬思栗汀公之風猷德懿乎敬思之義亦不過曰孝睦修省而己栗汀公之所以承       襲前光而垂諸後謨者固不越乎是道而必待學以明而學則實賴師友講磨而成之今垂宗之鳩謀崇先而以時潮翻盪經禮文質之有遜于往昔故摘其所短而推以擴焉爲能尋師取友以就其學而盡孝睦修省之道則不僅止報本之盡其誠而己復有文德之斐然輩出遙接先世之遺響無愧爲栗汀公之嘉孫也是爲記以勖之


己未 大寒 李雨燮 記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1931.6~2007.7.20)
자는 화윤(華潤)이고, 호는 화재(華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생지는 경상남도 김해(金海) 장유면 월봉서원이다.
중종(中宗)의 아들 덕양군(德陽君)의 14세손이며, 부친은 영남의 유학자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이다. 부인은 김문협이다.
부친의 가르침으로 『천자문(千字文)』‧『소학(小學)』‧『대학(大學)』과 십삼경(十三經)을 배웠고, 20대에 합천(陜川)의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 강습과 문장을 수학하였다. 평생 상투를 틀고 도포와 갓 차림으로 살았고, 월봉서원(月峰書院)‧월봉서당(月峰書堂)을 지키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또 전국의 유명한 문화유적 중수기(重修記)와 묘갈명(墓碣銘)을 많이 남겼다.
이이(李珥)‧전우(田愚)‧오진영(吳震泳)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후예로서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로 일컬어진다.
주요저술로는 2000년에 성리학 관련 글과 한시(漢詩)‧금석문(金石文) 등을 모아 출간한 전27권의 『화재문집(華齋文集)』과 사후 간행된 전17권의 『화재속집(華齋續集)』이 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이홍규‧이광규‧이봉규‧이준규이다.




경사재기 편액


출쳐 및 참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마산문화지(2004.1)-마산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