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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율티리 황치석 포효비

천부인권 2017. 12. 1. 06:21



2017.1.14. 황치석 포효비


합포구 진전면 율티리 344-2번지는 암하마을에서 율티마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지금은 마을 뒤쪽으로 4차선도로가 있어 이곳에 서있는 “율티리 황치석포효비”는 마을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보기 힘들다. 이 비의 바닥은 시멘트로 네모나게 깔고 그 중앙에 비를 세운 형태인데 비단과 비신 및 가첨석을 갖춘 완전한 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비를 세운 이유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황치석(黃致奭 1909~1950)이란 분이 이웃과 잘 지내고 부모에게 효자였으나 1950년 7월 6·25동란으로 어머니와 함께 유탄을 맞아 사망하자 이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웠다. 특히 율티고개는 해병대진동지구전첩비를 세울 정도로 전쟁의 중심지였고 많은 양민들이 학살을 당한 곳이다.





“율티리 황치석포효비”는 민족의 비극으로 인한 개인의 삶이 파괴된 현장을 보여주는 비이기도 하고 근세(近世)까지 이 지역의 덕목이 효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황치석의 자는 주현으로 창원에서 계출(系出)된 고려시중 충준공의 후손이다. 이씨조선에서 휘 탕향의 시호는 문간이고 휘 위(瑋)를 낳으니 위는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직을 받았다. 또 삼대를 지나서 휘 준명의 호는 집은공으로 황군의 중세현조이다. 증조는 두식이고 할아버지 유수는 돈녕부 도정의 직을 받았고 고는 태성이요 할머니는 밀양박씨 이다. 군은 어려서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는데 장년이 되자 더욱 돈독하였다. 혼인으로 분가하여 따로 살림을 살아도 저녁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봐드리고 아침에 문안을 드리는 예절을 조금도 개을리 하지 아니하여 이웃마을에 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6·25동란은 우리나라에 일찍 없었던 큰 변란으로 삼진일원이 격전하는 장소가 되어 바야흐로 폭탄소리와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시체가 들판에 가득 쌓이고 마을은 진토가 되었을 때에 군이 어머니를 모시고 처자식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나가다가 노모가 유탄에 맞아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때에 군이 급히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호곡하다가 군도 포격을 맞아 함께 죽으니 이때가 1950년 7월 17일이었다. 군은 기사(1909년)에 태어났으니 이때가 42세였다. 아아! 참혹하구나. 배우자는 남양 홍씨의 여식이요 아들은 주현(柱鉉)이고 딸은 성주 이상제에게 출가하였다. 군의 맏형 치경씨가 삼진 유림들의 의론을 따라 비석을 대로변에 세워 군의 효행을 포창하려고 권오봉씨가 지은 전을 가지고 나에게 명을 청하니 자못 신빙성이 있다. 전을 살피고 근거하여 명하노니 아아! 황군의 효는 대저 누구와 짝하겠는가? 한갓 어머니만 있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았구나! 그 태어나고 죽음을 어머니와 함께 한 것을 보였도다. 마침내 그 목숨 잃었으니 망망한 것은 하늘이로구나. 작은 돌에 밝게 새겼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아 쳐다보아라. 군의 효를 포상한 것은 실로 경박한 풍속을 교화하는데 힘쓰게 한 것이다.


분성 김종하가 짓고 쓰다.
경진(1964)년 칠월에 삼진유림일동이 세우다.




黃致奭褒孝碑-원문


黃君致奭字周鉉系出昌原高麗侍中忠俊之後也李氏朝鮮有諱湯鄕諡號文簡是生諱瑋遊退陶門文科贈都承旨三傳而有諱俊命號樵隱爲君之中世顯祖也曾祖斗式祖有秀贈敦寧府都正考兌性妣密陽朴氏君自幼孝於父母友于兄弟壯而盡篤迨其析産以居晨昏定省之節一不少懈頗有譽聞於隣里庚寅動亂爲吾邦振古所未有之大變而三鎭圈尤爲激戰之場方爆音掀天砲響動地積屍盈野閭里化爲焦土于時君奉母携妻孥出避于他所老母爲流彈所中惻于路中君急抱母號哭又被爆擊同時隕命實是年七月十七日而距其生己酉儡年四十二嗚呼慘哉配南陽洪氏男注鉉黎女適星州李相帝君之伯兄致卿氏泛三鎭士林之論方伐石竪于孔路之側褒君之孝以權氏五鳳所爲傳請余爲銘文頗可憑信乃按據而爲之銘曰嗟黃君孝夫孰與論凌有其母不知有身其生其死視母偕焉竟隕厥命茫茫者天片石昭楊過者必燭君之孝褒實勵薄俗


盆城 金鍾河 撰 幷書
甲申 七月 日 三鎭士林一同


* 김종하,『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 1962)를 편찬함-창원에서는 김해김씨를 곡목 김씨라 부르기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