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시락리 김해김씨 탁조정 濯潮亭

천부인권 2018. 1. 29. 11:41



2015.4.30. 진전면 시락리 김해김씨 탁조정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시락본동길 34에는 김해김씨의 재실인 탁조정이 있다. 처음 이곳에 탁조정을 건립할 당시에는 이 정자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 것이다. 낮은 흙돌담장으로 둘러싼 탁조정은 한적한 시골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빈집이긴 하지만 구경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재실이다. 지붕은 전통 기와가 아닌 일본식 기와형식을 본딴 철판재이지만 전체적으로 아담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2015년 당시에는 집 앞 화단에 가이즈카향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이후 이 향나무는 베어 버렸다. 집에 그늘이 생기고 미관상 나무가 건물을 압도하는 모양이라 잘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전통공간에 일본나무가 있는 것이 싫어서 잘랐을 수도 있다. 

 



정면에서 본 탁조정



탁조정중건운


濯潮亭重建韻
吾祖當年卜此溟
觀潮仍築濯潮亭
登臨鷗鷲皆翔狎
吟嘃魚龍亦出聽
安貯琴書尋所樂
庭栽蘭菊掇餘馨
重營只在追先美
豈爲靈區得勝形
不肖孫尙俊拜稿




탁조정 중건기


濯潮亭重建記
亭乃近古處士金公時昌之燕居室而名之曰濯潮者盖隱於海而託意於古之儒子歌也然而潮旣非止水則必淸濁之有時而其無纓足之斷辭汛云濯奚哉公以潮海之姿由由然混一淸濁不露其形迹而濯吾所濯歟及洪陵之末島夷橫流宗枋陸沈先王之典章文物墜地無餘公知其不可挽回慨然無意於世惟以扶持門戶導化村俗爲己任立宗親而收衆族膽學田而將村秀殖洞契以助貧窮時與騷人墨客觴詠自適以美吾性情人或勸之仕則曰非分也於虖偉哉此非淸者而能然乎至若化機所運朝暮之千奇百怪隨潮而進隨潮而退天地之無窮變態摠入於亭之胸抱者公巳開襟藥觀而自得於心矣濯何足言也人之尙論在不究公超然自潔之志徒以是亭求公濯則其赤淺矣乎亭狹且圯不可久遠其孫尙俊葺而廣之以其所自述家狀及雲廬權公泰會所撰遺事請余以記余不辭而書此以歸之以備余異日登覽之資焉
檀紀 四二八四年 辛卯殷春上浣 全州李康瑄


탁조정중건기(濯潮亭重建記)


정자는 근세에 처사 김시창(金時昌)이 편안히 살던 집으로 이름을 탁조(濯潮)라 한 것은 바닷가에 은둔하고 옛날의 *유자가(儒子歌)에 뜻을 가탁(假託)한 것이다. 그러나 조수가 이미 그치지 않으면 물은 반드시 청탁(淸濁)이 때가있고 물이 맑으면 갓을 씻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는 결단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무엇 때문에 탁(濯)이라 하였을까?
공은 바닷물 같은 넓은 자태(姿態)로 스스로 만족하며 청탁이 혼연(混然)히 하나가 되어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내가 씻고자 하는 바를 씻는 것이다. 홍릉(洪陵 고종의 능호) 말엽에 왜구가 쳐들어와 종실(宗室)을 유린(蹂躪)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자 선왕의 전장(典章)과 문물이 다 땅에 떨어지고 남은 것이 없었다.
공이 국권을 회복할 수 없음을 알고 분개(憤慨)하여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문호를 부지(扶持)하고 마을의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여 종친을 세우고 여러 종족들과 함께 소출로 학교의 경비에 충당하는 전답을 넉넉하게 거두어 마을 수재들의 학비로 하였고, 동계(洞契)의 재산을 늘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때 풍류객 및 시인들과 함께 한잔 술에 시 한수를 읊는 것으로 스스로 유유자적하여 우리의 타고난 성품을 아름답게 하였다.
사람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라고 권유하면 분수가 아니라 하였으니 아아! 위대하도다 이는 청렴한 사람이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을까?
큰 배가 드나들적에 아침저녁으로 일어나는 천태만상의 조수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가는 천지의 무궁한 변화의 모습이 정자 안에 다 들어와 공이 있어 마음을 열고 즐겁게 보고 스스로 마음을 만족하게 여겼으니 탁(濯)은 말할 것이 없다.
사람들의 공론이 공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공은 초연하게 스스로 깨끗한 뜻으로 하였으니 한갓 이 정자로 공의 탁(濯)을 구하려면 그 앎이 또한 천박하다.
정자가 좁고 허물어져 오래 갈 수 없어서 그 손자 상준(尙俊)이 보수하고 넓혀 스스로 지은 가장(家狀)과 운려(雲廬) 권공(權公) 태회(泰會)가 지은 유사를 가지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써서 돌려보내고 내가 훗날 이 정자에 올라가 구경 할 때에 도움을 갖추고자 한다.
단기 4284(서기 1951)년 신묘 2월 상순에
전주 이강선이 짓다.


* 유자가(儒子歌)-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夫辭) 말미(末尾)滄浪之水淸兮어든 可以濯吾纓이요 滄浪之水濁兮어든 可以濯吾足이로다.(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으리.)”[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령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