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김구선생의 글이 있는 산청 배산서원 培山書院

천부인권 2017. 12. 15. 10:01



2010.8.18. 배산서원 홍살문과 전경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3에는 배산서원(培山書院)이 위치한다. 인근에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 왔다는 목면시배지가 위치하여 함께 방문이 가능하다. 배산서원은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호로 등록 되었으며 합천이씨 문중의 서원이다.





배산서원 앞에 세운 안내판에는 이처럼 소개를 하고 있다.
배산서원(培山書院)은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워진 덕연사(德淵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근의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사액서원으로 되면서 그 서원에서 봉안 된 청향당 이원(李源 1501∼1568)과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의 위패를 따로 모셔와 덕연사를 세웠다. 대원군 때 덕연사는 헐렸으나 1919년에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이 발의하여 문묘와 도동사(道東祠), 강당을 짓고 배산서원이라 하였다. 문묘에는 공자의 진영을 모셨고, 도동사에는 이원, 이광우의 위패와 함께 이원과 교분이 두터웠던 이황, 조식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한 서원에 2개의 사당이 있는 것이 일반서원과 다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인데 중국의 변법자강운동가이자 공양학자인 강유위(康有爲)의 자필 현판이 있고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박은식의 낙성축문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배산서당 정면



배산서당 전경



배산서당 측면



중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글씨




독립운동가 우천(藕泉) 조완구(趙玩九, 1880~1955) 선생의 배산서당 축하 편액


祝 培山書堂剏建

儒者大敎超倫具足僞士亂眞拘學自賊輾轉羼雜恆病臃腫上下二千時輕時重固執變易動靜塞通誤會微言臆斷大同悶世憂道闕有培山探闡索發德業好還闢拘剔腐克講日新爰颺先徽造功千春睠懷往昔此日興感獻頌者忱謂文不敢
藕泉  豊城 趙琬九 謹書


축문 해석
선비의 큰교가 짝을 뛰어나서 구족하도다. 거짓 선비가 진실을 어지럽게 하여 그릇된 학문에 구애되어 스스로 해롭게 하다.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항상 부시럼으로 고생하다. 상하 이천년간에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웠다. 변하고 바꿀 것을 고집하고 동정에 통할 것을 막았다. 미묘한 말씀을 잘못 알고 대동을 그릇되게 판단하다. 세상을 민망하고 도를 걱정하는 것은 배산이 있었다. 탐구하고 천양하고 찾고 발명하니 도덕의 학업이 옳게 돌아왔다. 구속됨을 열고 썩은 것을 깎아서 능히 강마하여 날마다 새롭게 한다. 이에 선조의 아름다운 소리를 떨쳐내니 조작한 공노가 천년을 나가리라. 예전을 생각하니 이날에 감상이 일어났다. 송사를 드리는 자의 정성이 감히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천  풍성 조완구 삼가 쓰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선생의  '축 배산서당 낙성사(祝 培山書堂 落成辭)' 편액





독립운동가 김구선생 축하 편액


祝培山書堂落成
曰若有韓繄古震邦聖人出倡造文明 檀虞相傳至孔大成贊定六經敎祖之宗 道喪千載墜緖茫茫 培山特立幟赤大同祖國文化賴以復明 獨立元氣因此而生 猗歟眞翁千秋造功獻 頌于落用表微衷
白凡 金  九  謹祝


축 배산서당 낙성
왈약 대한은 오래 전부터 진방이라. 성인이 나타나 문명을 창조하셨다. 단군과 우순이 서로 전하다 공자에 와서 크게 이루었다. 육경을 찬정하시니 교조의 종가로다. 도를 잃은 지 천년이나 지나 쇠퇴하여 명맥만 남아 망망하다. 배산이 대동 세계에 기치를 들어 크게 일어나 뭉치니 조국의 문화가 이에 힘입어 다시 밝았다. 독립의 원기가 이로 인해 발생하니 거룩하다 진암옹이 천추에 공업을 지었다. 낙성식에 즈음하여 적은 충심 표하노라. 
백법 김구는 삼가 축하함


* ​진방(震邦)은 인류의 첫아들로서​ 인류 문명의 뿌림과 거둠이다.
* ​육경은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여섯 가지 경서.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악기(樂記)》, 《예기(禮記)》를 이른다.





[원문]
培山書堂記
朝鮮爲檀君箕子浚人士 莘莘諷孔經被儒服 奉孔子爲國敎久矣 莊子爲孔子之道配天地 神明育萬物六通四闢 本末精粗其運無乎不在 故孔子爲創敎之聖 卽其運世之粗 迹在春秋 則太平升平據亂三世之異在 禮運則有小康大同之殊 其傳於七十子後學者 有今文之六經 而六緯副之皆 以除民之患 奧深功明矣 惟自漢劉歆僞作古文諸經纂 亂聖統晋唐傳之雖 以朱子才賢不能無蔽焉 故朱子信爲周禮 爲眞周公作贊 其盛水不漏 疑禮運大同爲老子之學說謂 春秋不可解 不知穀公董何之口說于 是太平大同之義斷絶閉塞矣 徒存據亂之說 則不能範圍 區美民主社會之義 遂至孔敎爲新學所疑攻豈不耗哉 夫朱子無得于 六經之能發明四書 然所發明者 猶是據亂之說僅能明 朱子一端偏安割據 而已朝鮮所傳 爲孔敎者實劉歆僞纂之經 朱子割據之敎 非孔子本敎之眞也 培山書堂會諸君悼大道之危 徵憫人心之離 變旣尊聖衛敎 胃險犯難守死善道矣 又能反本復始辨僞求眞 疏附禦侮命李君炳憲渡海 問學訪求眞經 以宏大道孔敎遂東 其在培山書堂也 夫是堂也 故李氏之李退溪先生 曺南冥先生訪淸香堂李公于此 而李松堂李竹閣從學焉 故丹城晋州數郡人士 爲斯堂將 以祀四賢李君忠鎬 退溪先生之裔也 以爲私其家賢不如公 爲尊聖但保舊學 不若講求眞經 故就書堂立文廟 而私之來聖像 而奉歸問廟樂 而學焉將刻 今文諸經說講習 而布傳之孔敎之復元 聖道之光大東國人心風俗之美 其在斯夫 其在斯夫諸君子 遺李君炳憲文累年矣
孔子二千四百七十四年七月五日 康有爲記


[해문]
배산서당기
조선이 단군과 기자의 후가 되어 인사가 많이 나서 공자의 경문을 외고 선비의 옷을 입고 공자를 받들어 국교를 삼은지가 오래 되었다. 장자가 말하되 공자의 도는 천지를 짝하고 신명을 근본하고 만물을 생육하여 육합을 통하고 사방을 열어서 본과 말이 정미하고 굵은 것이 그 힘이 있지 않은 데가 없는 고로 공자가 창교의 성인이 되어 그 세상을 운전하는 굵은 자취가 춘추에 있어서는 태평(太平)과 승평(升平)과 거란(據亂)인 삼세의 차이가 있고 예운에 있어서는 소강(小康)과 대동(大同)의 다른 것이 있고 칠십제자 후학에게 전하신 것은 금문(今文) 육경이 있어 육위(六緯)로 다음해서 모두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니 깊고 밝은지라 한나라 유흠(劉歆)이 고문(古文)의 제경을 위조함으로부터 성통을 어지럽게 하여 진나라와 당나라가 전하니 비록 주자의 재현으로도 능히 그 지위를 가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자가 가짜 주례(周禮)를 참으로 주공(周公)이 저작했다고 믿어 그 말이 물을 담아도 새지 아니한다고 예운(禮運)의 대동(大同)이 노자의 학설로 의심하고 춘추()를 해석하지 못한다 하고 곡공(穀公)과 동하(董何)의 말인 줄 알지 못하니 이에 태평과 대동 주의가 끊어지고 막혔으니 한갓 거란(據亂)의 말만 의존하여 능히 구미(區美)의 민주사회주의를 본받지 못하여 드디어 공자의 유교가 신식학문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대상이 되니 어찌 모순됨이 아니리요. 대개 주자는 육경을 얻지 못하고 다만 사서만 발명하였다. 그러나 발명한 것은 오히려 거란의 말이라 겨우 공자의 일단만 밝혀서 한 모퉁이만 웅거할 뿐이라 조선에 전래한 유교는 실로 유흠의 가짜로 꾸민 경서요 주자의 활거한 교는 공자 본교의 진짜가 아니라 배산서당 유회 제군이 대도(大道)의 위대하고 쇠미함을 슬퍼하고 인심이 떠나고 변함을 민망히 여겨 이미 성인을 높이고 유교를 모시고 험함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범하여 착한 도를 지켜 죽게 하고 또 근본에 돌아오고 처음대로 회복하여 가짜를 분별하고 진짜를 구하여 어모를 소부하여 이군 병헌을 명령하여 바다를 건너 학문을 물어 진짜 경서를 구하여 대도를 깨워서 공교가 동방으로 건너오니 그것이 배산서당에 있도다. 이 서당은 이씨의 땅이니 이퇴계 선생과 조남명 선생이 청향당 이공을 여기에 찾아오고 이송당과 이죽각이 쫓아서 배운 고로 단성과 진주의 두 고을 인사들이 이 서당을 위하여 장차 사현(四賢)을 향사항새 이군 충효는 퇴계선생의 후손이라 써하되 자기집의 현인을 사정두는 것이 공적으로 성인을 위한 것만 같지 못하고 다만 구학만 보존하는 것이 진경(眞經)을 강구하는 것만 갖지 못하다는 고로 서당에 나아가서 문묘를 세워서 항사할새 궐리에 와서 공자 화상을 구하여 받들고 사당의 음악을 물어서 배우고 장차 금문(今文) 제경의 말을 판각하여 강습하고 전포하려 하니 공교의 복원함과 성도의 광대함과 인심과 풍속을 아름답게 함이 이에 있고 이에 있음인저 여러 군자가 이군 병헌을 보내서 글을 구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도다.
공기2474(1923)년 7월 5일 강유위(康有爲)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