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고성 내산리 고분군(固城 內山里 古墳群)

천부인권 2018. 1. 10. 08:40



2018.01.09. 고성 내산리 고분군 모습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188-10에는 1963년 1월 21일 국가 사적 제120호로 지정이 된 ‘고성 내산리 고분군’이 있다. 면적은 186,135㎡ 크기이다. 창원에서 창포리를 지나 고성군 동해면을 잇는 동진교를 지나고 77번 도로에서 1010도로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우측 전방에 고분군이 보인다. 동진교에서 약 6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곳에 세운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고성군 동해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여 창원방면의 진해만에 급접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28기 정도 이지만 61기 가량의 봉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었다하나 많은 도굴과 파괴의 피해를 입었다. 1997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형 봉토분인 제8호분과 제34호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확인 되었다.
첫째 고분의 봉토는 인공으로 다져 쌓아 올려져 지역적 고분축조의 특색을 나타 낸다.
둘째 중앙의 주과[제8호분]과 돌방[제34호분]을 중심으로 같은 봉토 내에 여러 개의 돌덧널이 함께 만들어져 있어 고성 송학군 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 가야고분의 특색을 보여 준다.
셋째 고리장식대부장경호와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 큰칼과 철화살촉 등의 철기, 귀걸이와 반지 등의 금은장신구, 발걸이와 운주(雲珠) 등의 마구(馬具)들이 출토 되었다.
넷째 34호분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굴식돌방무덤의 모양도 백제와 동일한 특색을 보여준다.
제8호와 제34호분은 출토된 토기와 마구로 보아 6세기 전반에서 중엽 경에 만들어 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가야세력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일 것이다.』





고분군의 특징으로는 미리 흙이나 돌로써 봉분을 쌓아 올린 분구(墳丘)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분구묘 양식이다. 영남지역에서 분구묘 양식이 발견된 경우는 고성지역이 유일하다. 분구 내부에서 확인되는 다곽식(多槨式) 구조는 가야시대 묘의 특징이기도 하면서 혈연공동체적 성격을 가지는 백제시대 묘와 연관성이 보인다.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가야 후기의 토기양식 외에 신라계 토기, 백제계 토기, 왜계의 마구류 등이 함께 보인다. 이로 볼 때 6세기 전반에 고분군을 축조한 정치세력이 해안에 급접한 지리적 조건을 배경으로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면서 고성 송학동 고분군 세력과 함께 가야사를 주도했음을 보여 준다.
고성 내산리 고분군의 주도 세력은 뱃길을 이용하여 바다건너 왜와 교류하고 육로를 통해서 다른 가야 및 백제 세력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 고분군은 가야의 해상 관문이었던 소가야의 찬란했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입구에 문처럼 서 있는 소나무 두그루


고성 송학리 고분군은 넓은 평야를 가진 곳에 위치 했는데 이곳 동해면 내산리 일대는 평야가 없고 산과 바다가 인접해 있다. 사람이 안정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농사가 잘 되고 많은 지역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내산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바닷가 쪽에 위치 했다. 농업보다 어업과 무역을 하기 위해 이런 곳에 삶의 터를 잡았을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 고분군의 세력은 과연 동이족의 후예였을까. 궁금해 진다.




고분군의 다른 방향



고분군 안내표지판




이곳 내산리 고분군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게 하는 개간한 것으로 추정 되는 논




논에 필요한 물을 담기 위해 만든 둠벙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 본 내산리 고분군 모습


멧돼지가 봉분을 파헤친 흔적이 남아 있다. 심하게 훼손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얕게 묻힌 뿌리식물이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