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의령읍 동동리 1134-1(백산로 43)에는 의령의 충효열 본보기가 되는 칠정려각(七旌閭閣)이 있는 곳이다. 의령고등학교와 백산로 사이에 건설된 이 정려각은 진양강씨 2충 4효 1열의 탁행(卓行)을 모든 배성들에게 포장(襃獎)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건물이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의령 칠정려(宜寧 七旌閭)
경상남도 기념물 제35호
의령군 의령읍 동동리 1134-1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충효열의 탁행을 포양하고 그 마을 거리에 정려을 세워 세간의 귀감으로 교화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정려는 진양강씨 2충4효1열의 삼강문이다. 건물의 위치와 원형을 옛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제1려는 어머니를 섬긴 진사 강우(姜瑀)의 효행을 영조 갑자년(1744)에 기린 효정이고, 제2려는 어버이를 섬긴 강우의 아우 진사 강서(姜瑞)의 효행을 중종 갑진년(1544)에 기린 효정으로서 남명 조식선생이 강서의 묘문에 형제 효행을 기록하고 있다. 제3려는 강서의 아들 충렬공 사월정 강수남(姜壽男)이 임진왜란에 경기도 삭령전투에서 순국한 충절을 숙종 임진년(1712)에 기린 충정이며, 제4려는 강우의 손자 이조참의 강기룡(姜起龍)이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진주성에서 순국한 충절을 철종 신유년(1861)에 기린 충정이니 즉 조손부자 형제숙질의 일문충효이다. 제5려는 충렬공 9세손 강시주(姜時周)의 처 김해허씨가 부군의 옥사에 목숨을 받쳐 원정한 열행을 고종 임오년(1882)에 기린 열정이고, 제6·7려는 강우의 9세손 강재중(姜在重)과 함안조씨 부부의 효성이 지극하니 꿩, 자라의 영응(靈應)이 있었다는 효행을 고종 을사년(1905)에 기린 쌍효각이다.』
칠정려 연역(七旌閭 沿歷)
제1려 강우(第一旅 姜瑀)
자 백규 호 모암 청풍군수혜증손남명종유(字伯圭號慕庵淸風郡守徯曾孫南冥從遊)
연산을묘 1495년 출생
중종계유 1512년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중종정축 1517년 3월 2일 모부인중상일에 거려계서(母夫人中祥日 居廬繼逝)
영조갑자 1744년 효정(孝旅)
현종정미 1847년 충효사에 제향 손초정언룡동호기룡형제배향(忠孝祠祭享孫草亭彦龍東湖起龍兄弟配享)
第一閭 姜瑀
字 伯圭 號 慕庵, 淸風郡守 徯의 曾孫, 南冥從遊
燕山 乙卯 1495年 出生
中宗 癸酉 1513年 成均進士
中宗 丁丑 1517年 3月 2日 母夫人 中祥日에 居盧繼逝
英祖 甲子 1744年 孝旌
憲宗 丁未 1847年 忠孝祠 祭享 孫 草亭 彦龍, 東湖 紀龍 兄弟 配享
제2려 강서(第二旅 姜瑞)
자 숙규 호 매곡 진사 우의 제 남명문인(字叔圭 號梅谷 進士瑀 弟 南冥門人)
중종경오 1510년 출생
중종정유 1537년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중종경자 1540년 5월 24일 부상에 침점멸성(父喪 枕苫滅性)
중종갑진 1544년 효정(孝旅)
第二閭 姜瑞
字 叔圭 號 梅谷, 進士 瑀의 弟, 南冥門入
中宗 庚午 1510年 出生
中宗 丁酉 1537年 成均進士
中宗 庚子 1540年 5月 24日 父喪 枕苦滅性
中宗 甲辰 1544年 孝旌
충열공 사월정 휘 수남 충정 문기
행실이 뛰어난 선비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을 버리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사뭇 후세의 명예와 일신의 영달을 바라면서 하는 것이 아니오라 그 혈맥에 약동하는 정의가 불타서 행동으로 나타 남으로서 그 지조와 그 공적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바이니 나는 강기상 수남이 임진왜란에 순절한 그 절개를 마음 깊이 통감하는 바이로다. 왜적이 우리나라의 빈틈을 타고 침략하여 올 때에 감사 심 대 충장공이 군사를 삭령에 주둔하면서 공을 막료로 삼으려고 하거늘 공이 이때 낭관의 벼슬로서 이름이 들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격서로 부름을 받고 기꺼이 나아가니 터럭만이라도 적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심공이 적을 경멸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는 바가 없지 아니하므로 공이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비할 바를 말하였으나 심공이 마침내 고치질 않았다. 임진 10월 18일 적이 과연 불시에 습격하여오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흩어졌으나 공은 피 비속에 서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아니하고 활을 쏘아 적을 사살하다가 화살은 떨어지고 힘도 다되니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입었던 전포를 벗어 두 종자에게 주면서 너희들은 나와함께 죽어도 유익함이 없을 것이니 재빨리 탈출하여 살아나도록 하고 내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여 종사를 잇도록 하여 달라 하면서 너희들이 나의 시체를 찾지 못하거든 내가 입던 이 옷을 염하여 묻어라 하고 곧 심공과 같이 적의 칼에 해를 당하니 끝내 옆을 지키던 한 노복 검산이 시체를 안고 절통하게 울면서 주인이 나라를 위해 갔으니 종인들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 명을 아울렀다. 공이 전장에 나아갈 때 집안 사람에게 고별하면서 나는 이제 적과 싸울 것이니 만일 불행하면 내 몸을 전쟁터에서 찾게 될 것이라 붉은 실로 상투를 동여매면서 이 실이 표식이 될 것이라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공의 시체를 찾지 못했으나 머리를 찾을 수 있었음은 공이 표식한 바 붉은 실줄이 상투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남긴 옷으로서 머리만 염하여 고양 박사리 선산에 장사하였으니 오! 통곡할 일이로다. 공의 선고 진사공의 정려가 의령읍 바드리에 있은지 근 이백년에 퇴폐하여 자손들이 지금 중수하였고 이때 마침 공의 충절을 담는 정려가 나라에서 내리나니 전후 충효의 거룩한 그 슬기를 드러낼 집을 짓게 되었는데 공의 5세손 참봉 찬과 독우 윤이 함께 와서 기문을 나에게 청하거늘 이에 감히 그 사실을 뽑아 기록하였다. 아! 위대하여라 공의 높은 충성과 크나큰 절의를 선조대왕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하며 도승지를 증직하고 광해군 초년에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숙종 35년에 또 이조판서를 증직하며 시호를 충열이라 내리고 숙종 38년에는 경연신하들이 심공의 정표와 같이 정려하기를 주청하여 일체정려(一體旌閭)하라는 네 글자를 어필로서 내렸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일이로다. 공의 충절이 여기에 더욱이 금산의 이름까지 조정에 알려져서 호역을 면하여 주었으니 슬퍼하고 영화스러운 특전이 극진하다 하겠다. 배대 뒤에 충신과 의사들은 감동하고 흥기할지로다.
참판 제남 권환 지음
제3려 강수남(第三旅 姜壽男)
자 인수 호 사월정 정진사서의 자 생부는 충순위수(字仁叟號沙月亭進士瑞子生父忠順衛璹)
명종임자 1552년 출생 의령돈대산사월정지에서 서식강도(宜寧遯垈山沙月亭址 棲息講道)
선조경진 1580년 별시문과주서 전적양성 현감호병정랑 역임(別試文科注書典籍陽城縣監戶兵正郎 歷任)
선조임진 1592년 충장공심대종사관으로 출전(忠壯公沈垈從事官 出戰)
선조임진 1592년 10월 18일 삭령전에서 순절(朔寜戰 殉節)
선조무신 1608년 8월 28일 치제증도승지(致祭贈都承旨)
광해기유 1609년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숙종기축 1709년 증이조판서사시충열(贈吏曹判書賜諡忠烈)
숙종임진 1712년 어필특서일체정려4자(御筆特書一體旌閭四字)
정종신해 1791년 10월 18일 삭령표절사사액치제(朔寜表節祠賜額致祭)
의령정곡 어강서원제향(宜寧井谷 漁江書院祭享)
융희기유 1909년 사월정중건제향(沙月亭重建祭享)
第三閭 姜壽男
字 仁叟 號 沙月亭, 進士 瑞의 子, 生父 忠順衛 璹
明宗 壬子 1552年 出生 宜寧遯垈山 沙月亭址 棲息講道
宣祖 庚辰 1580年 別試文科 注書 典籍 陽城縣監 戶, 兵曹 正郞 歷任
宣祖 壬辰 1592年 忠壯公 沈岱 從事官 出戰
宣祖 壬辰 1592年 10月 18日 朔寧戰 殉節
宣祖 戊申 1608年 8月 28日 致祭 贈都承旨
光海 己酉 1609年 贈 史曹參判
肅宗 己丑 1709年 贈史曹判書 賜諡忠烈
肅宗 壬辰 1712年 御筆特書一體 旌閭四字
正宗 辛亥 1791年 10月 18日 朔寧 表節祠 賜額致祭
宣寧 井谷 漁江書院 祭享
隆熙 己酉 1909年 沙月亭 重建 祭享
제4려 강기룡(第四旅 姜起龍)
자 응문 호 동호 직장복남의 자 진사우의 본생손(字應文號東湖直長福男子進士瑀本生孫)
생년불전음전력부위(生年不傳蔭展力副尉)
선소임진 1592년 창의하여 진주성에 들어감(倡義 晉州城)
선조계사 1593년 6월회일 순절(六月晦日 殉節)
헌종정미 1847년 백형초정공과 같이 충효사 배향(伯兄草亭公 忠孝祠 配享)
철종신유 1861년 증이조참의충정(贈吏曹參議忠旌)
제5려 허씨(第五旅 許氏)
충렬공 수남9세손 시주의 처 진사 만형의 왕대부인(忠烈公壽男九世孫時周妻進士萬馨王大夫人)
김해허씨 도사돈의 6세손(金海許氏 都事燉 六世孫)
부군의 옥사에 수명원정(夫君 獄事 授命原情)
고종임오 1882년 열정(烈旌)
제6려 강재중(第六旅 姜在重)
자 거보 호 수재 진사우의 9세손(字擧甫號修齋 進士瑀 九世孫)
부부구효지극(夫婦俱孝至極)
고종을사 1905년 효정(孝旌)
제7려 강효부 조씨(第七旅 姜孝婦趙氏)
효자강재중의 처 함안조씨 생육신 여후(孝子姜在重妻咸安趙氏生六臣旅后)
고종을사 1905년 쌍효정(雙孝亭)
참의동호공휘기룡충정려기
이조 철종 12년 가을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부위 강기룡에게 정려 명이 내리셨다. 영남 관찰사는 의령 고을에 명령하여 성 동쪽 옛 마을에 나아가 목공을 불러 정려를 지으니 아! 거룩한 일이로다. 이 마을에는 옛적부터 강씨의 세 정려가 있으니 그는 진사 휘 우와 그 아우 진사 휘 서의 효행 정려이니 남명선생이 지은 묘문에 그 사행을 증거 할 수 있고 또 그 조카 경기도사 휘 수남이 임진왜란 때 삭령에서 순절하여 충절로서 정려를 세우며 시호를 충열이라 하고 선조께서 친히 지은 제문이 해와 별처럼 밝아 있는데 또 이번 부위공의 정려가 아울러 네 정려가 되었다. 진사고 휘 우는 공의 생정 조부 되시고 찰방공 휘 언룡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거름강과 화왕산성에서 공을 세우니 학봉 김선생이 그 공을 나라에 장계하였으며 곽충익공과 시종을 같이 하였다. 찰방공은 공의 생정 백씨이니 한 집안에 세 충신이 때를 같이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옛 사람이 이르는바 신령스러운 지초는 그 뿌리가 깊으며 맑은 샘물은 그 근원이 길다고 하였음은 이러한 일을 두고 이름이리라. 진양성이 초위 되었을 때 공은 성을 지키는 직접 책임이 아니어 몸을 피할 수도 있을지로되 의병을 일으키고 용맹을 떨쳐 호남 삼의사와 함께 외로운 성을 굳게 지키다가 마침내 촉석루에서 순절하니 때는 즉 계사년 6월 그믐이었다. 이 사실이 여지승람과 읍지에 실려 있으니 그룩한 그 충절이 뜻있는 지사들의 눈물을 뿌리게 하였으니 근래 많은 선비들이 조정에 알림으로서 정려을 명령하고 이조참의를 증직하고 백씨는 좌승지를 증직하니 조정에서 내리는 은전이 지극하였다. 공의 후손 치화가 시영을 한 종족이라 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거늘 의로움을 사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충절을 경모하여 기꺼이 말하게 되었다. 옛날 주부자께서 충민절 사당에 글을 써 이르기를 포위된 고성에서 생사를 결심하니 성은 떨어지고 몸도 같이 떨어지니 황화 깊은 물에 우뚝선 산과 같도다. 북받친 의분으로 위태로움에 다달아서는 그 마음 물과 같이 담담하고 나라 위한 충절은 천고에 살았도다 하였으니 내 또한 이 기문에 그와 같이 이르노라.
문헌공 성사 강시영 지음
■ 姜時永(1788~미상)-正祖 戊申生 字 汝亮 號 星沙 右議政 士尙의 9世孫이며 承旨浚欽의 子이다. 文科에 올라 禮曹判書를 지내고 고종이 즉위한 뒤 홍문관제학, 의정부우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文憲公이다. 강시영은 글씨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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