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양촌리 효자 변경섭 기실비

천부인권 2018. 2. 19. 17:43



2016.10.17. 효자 변경섭 비


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294-9번지는 양촌마을회관 옆 도로변에 위치하며 이곳에는 초계변씨 송전 경섭(松田 敬燮)의 지극한 효행을 귀감으로 삼고자 종문에서 세운 ‘효자변경섭기실비(孝子卞敬燮記實碑)’가 있다.
이 비는 팔의사로(옛 국도2호)에 접하여 붉은 벽돌 담장 안에 세웠는데 비단, 비신, 가첨석을 갖춘 효자비로 비신에 새긴 글자는 국한문 혼용체이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근대사의 단면을 보는듯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효자변경섭기실비


공의 이름은 경섭이요 호는 송전(松田)이니 초계인으로 여조(麗朝)의 문화시중 문열공(文烈公) 휘(諱) 연실(延實)은 시조이고 8세에 문하평리(門下評理) 휘 윤(贇)은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분이며 임난의 원종공신 증병조판서 휘 연수(延壽)12대조이다. 아버지는 휘 상익(相翼)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여진(呂鎭)의 따님이다.
공은 1914년 갑인삼월육일(甲寅三月六日)에 양존리(良村里)에서 출생하니 유소(幼少)로 성효기순(性孝氣純)하였다. 공이 15세 때 아버지께서 향년 47세로 별세하니 애통자훼(哀痛自毁)함이 지극하여 향리가 감읍(感泣)하였다. 조실부친(早失父親)한 슬픔을 이후 편모(偏母)의 지체구양(志體俱養)에 몸바쳐 효도에 무위(無爲)하여 신성혼정(晨省昏定)과 조봉모양(朝奉暮養)의 정성을 다하였다. 모친께서 병환으로 20여년을 기와(起臥)가 부자유하니 그 수족이 되어 항상근측(恒常近側)에서 대탕(待湯)하고 조석을 동식하여 편뇨(便尿)를 손수 받아 타(他)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모친께서 백수로 돌아가심에 종상(終喪)토록 애절하니 향린(鄕隣)이 가탄(嘉嘆)하였다. 1973년에 창원군수는 공을 표창(表彰)하여 투철(透徹)한 애국심과 효심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에 ㅇ파장서 왔다고 하였고 1985년에 보건사회부장관(保健社會部長官)은 표창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존경하여 효친경로사상(孝親敬老思想)을 몸소 실천하였다라고 밝혔으며 1986년에 오문대종회(吾門大宗會)는 공의 지효를 가납(嘉納)하여 포상(褒賞)하였다. 공은 위선봉사(爲先奉祀)에 경성이엄(敬誠以嚴)하여 문중의 지주요 후진의 귀감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국광복후 민족의 사상혼란 속에서 건국의 주석(柱石)이 되고자 애국운동에 앞장서 마산창원반공연맹운영위원과 대한청년단 진전면단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의 자유와 민생적통일(民生的統一)을 위하여 국민화합에 몸바쳤으며 6·25동란 후에는 후반지역의 민생치안과 사회안정을 위하여 향토방위대장(鄕土防衛隊長)으로 위국충정(爲國衷情)을 다하였다. 오늘날 사회의 인심이 각박(刻薄)하면 할수록 우리는 공의 효와 충을 흠모(欽慕)하게 된다. 2000년8월15일에 졸(卒)하니 배(配)는 밀양박씨다. 공의 사윤(嗣胤) 재성(在盛)과 재학(在學)이 찾아와서 그 아버지의 지극한 효심과 노고를 말하며 길이남을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형제의 효성은 공에서 물려 받아 또한 그 아들의 대(代)로 이어질 것이니 효가 효를 낳는 것이라 이에 찬하니 오문삼계지후예혜(吾門三繼之後裔兮)여 능양백수지자모(能養白壽之慈母)로다 승계두문청절혜(承繼杜門請節兮)여 위계민족화합(爲計民族和合)이로다. 수운태산지숭수혜(誰云泰山之崇秀兮)여 모급인성덕품지고고(莫及人性德品之孤高)로다 차지수석지성전혜(此地竪石之盛典兮)여 묘곤백세지청풍(苗昆百世之淸風)이리라.
사종제 지섭 찬병서(四從弟 志燮 撰幷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