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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여항초 분교 입구 김상집·전익진 장학추모비

천부인권 2018. 2. 20. 06:03



2016.10.17. 지제 김상집, 인암 전익진 양선생 장학추모비


진전면 고사리 542번지는 현재 여항청소년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옛 여항초등학교 분교이다. 이곳 입구에는 비석이 두 개 서있다. 작은 비는 한문으로 적혀 있으며 정면에는 “金祥集·田益鎭 二君獎學紀念碑(김상집·전익진 이군장학기념비)”라 적었고 뒷면에는 두 분의 행적을 기록 했다.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귀부와 비신 및 이수를 갖춘 비가 세워졌는데 비신에 새긴 글은 국한문 혼용체이다. 전면에는 “志齊 金祥集·仁菴 田益鎭 兩先生獎學追慕碑(지제 김상집·인암 전익진 양선생장학추모비)”라 새기고 뒷면에는 두 분의 행적을 기록 했다. 그 행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金祥集·田益鎭 二君獎學紀念碑(김상집·전익진 이군장학기념비



志齊 金祥集·仁菴 田益鎭 兩先生獎學追慕碑(지제 김상집·인암 전익진 양선생장학추모비)



폐교가 된 후 여항청소년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항초등학교 분교



장학추모비문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 구국청년(救國靑年)으로 애국충절(愛國忠節)의 신앙으로 향리의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희사하여 학교를 창설하시는 등 후세를 위하여 빛나는 공적을 남기신 두 어른이 계시는데 지제 김상집(志齊 金祥集), 인암 전익진(仁菴 田益鎭) 선생이시다. 지재 김상집 선생은 1888년에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 백암에서 출생하시어 어릴 때부터 재질(才質)이 뛰어났으며 용력(勇力)이 출가하였고 의분(義憤)에 있어 남보다 앞장서시는 기백(氣魄)을 지닌 분으로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이 투철(透徹)하셨다. 인암 전익진(仁菴 田益鎭) 선생은 1894년 함안군 여항면 금암리 상촌에서 출생하셨는데 성품이 강직담대(剛直膽大)하고 총명하셨다. 두 어른의 업적을 회고(回顧)하여 보면 조선조 말엽 때 왜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애국충절의 정신으로 구국운동에 참여함에 있어 동지 조계승(曺啓承), 이희석(李喜錫), 안재영(安在塋), 박로일(朴魯一), 남병희(南秉熙) 선생 등과 3·1운동 독립만세 민중봉기에 대한 거사를 사전 모의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시고 거사 당일 함안읍내에서 만세를 부르시던 중 왜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옥중에서 시대의 발전과 사회 진보를 선각(先覺)하시어 출옥 즉시 향리에 돌아오시어 전 재산을 육영 사업의 기금으로 하여 사립 창동학교(私立 昌東學校) 설립을 위시(爲始)하여 여항공립보통학교(艅航公立普通學校)의 승격 과정까지 온갖 풍상(風霜)과 고난을 겪으시고 동시에 우국지심(憂國之心)으로 항시 구국운동의 선두에 서서 상해임시정부 재정(財政)을 담당하신 이교재(李敎載) 선생과 긴밀 연락하시면서 군자금 조달(調達)에 진력하셨다.
이러한 애국 충정과 향토 발전을 위한 애향심을 평생토록 애국애족의 신념으로 일관하시면서, 지제 김상집 선생은 55세에, 인암 전익전 선생은 49세를 일기로 평생의 소원이시던 조국광복의 기쁨을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니 그 한이야 말로 어찌 필언(筆言)으로 다하리요. 이에 양(兩) 선생의 후예는 김상집 선생의 아들에 재기(在基), 손(孫)에는 학성(學晟) 학용(學龍) 학신(學伸)이다. 전익진(田益鎭) 선생의 자(子)로 수용(秀容), 태용(泰容), 용국(溶國) 등이다.
이에 우리 향민들은 양(兩) 선생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동시에 이를 추모코저 이 비를 세우나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두 선생의 행적은 영원히 빛나리라. 이 비를 건립함에 있어 김봉식(金鳳植)여사, 이현순(李鉉淳), 이이수(李二洙), 이동용(李東龍), 이동인(李東仁), 홍순정(洪淳政) 등(等)의 성의를 치하하는 바이다.
1979년 5월 5일
平山後人 素石 申喆錫(평산후인 소석 신철석)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

지제 김상집, 인암 전익진 양선생 장학추모비(197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