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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날 만난 강익문, 강대수 선대 묘소

천부인권 2018. 3. 2. 00:42

2018.03.01 의령 부림면 박진고개에서 바라 본 낙동강

 

오늘은 특별히 3·1절의 의인들에게 참배를 하는 대신 의령군 낙서면 여의리 산 51번지에 위치한 15대조 강익문(姜翼文), 14대조 강대수(姜大遂) 선조의 묘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합천이 고향인 두 분이지만 부자(父子)의 묘지는 의령군 낙서면의 낙동강을 굽어보는 당지마을 뒷산 입구에 모셨다.

 

마을버스 정류소 풍경

 

당지마을 소개

 

창원에서 출발하여 남지IC에서 나와 박진교로 달리다 보니 세찬 바람이 봄을 시샘하듯 낙동강에 파문을 일게 한다. 의령군 부림면에서 낙서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의 박진고개마루에서 굽이쳐 흘러오는 낙동강의 장엄한 풍광을 마주하며 오늘의 목적지 방향으로 사진으로 남긴다. 이곳은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국토종주 20곳 중 한 구간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우측은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시남리 등이고 좌측은 의령군 낙서면 율산리, 정곡리, 여의리 등이다.
낙서초등학교 앞을 지나 여의보건진료소 건물을 지나니 좌측 산 입구에 선조들의 묘소가 보인다. 요즘은 낙서정수장으로 가는 길이 나있어 묘소 바로 옆까지 차량으로 갈 수 있다.

 

원거리에서 본 선조 묘
당지마을의 끝 집에서 본 선조 묘

잘 관리가 된 묘지는 모두 6분(墳)인데 15대조 익문공(翼文公)의 무덤 옆에 2010년 3월에 세운 국한문 혼용의 비가 있다. 비의 정면에는 자헌대부증예조판서(資憲大夫贈禮曹判書) 당암강공휘익문지비(戇庵姜公諱翼文之碑) 배정부인합천이씨부좌(配貞夫人陜川李氏祔左)라 새겼다.
앞면의 글귀가 마모된 옛 비는 비좌원수(碑座圓首)형으로 높이 123cm, 폭 63cm, 두께 13cm이고 비좌의 가로 넓이는 90cm이다.
오석의 비신은 높이 176cm, 폭 61cm, 두께 31cm이고 비좌는 가로 61cm, 세로 75cm이며, 가첨석은 가로 길이 106cm, 세로 길이 66cm, 높이 68cm이다. 비신에 새긴 묘갈명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찬한 것으로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해 새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익문(姜翼文)의 묘지명(墓誌銘)
증 예조 판서 강공(姜公) 묘지명

 

공(公)의 휘(諱)는 익문(翼文)이요. 자(字)는 군우(君遇)요. 호(號)는 당암(戇庵)이다. 성은 강씨(姜氏)이니 본래 진양(晉陽) 사람이다. 그 4세조 승전(承顓)이 합천(陜川)으로 옮겨 온 뒤로부터 드디어 합천 사람이 되었다. 그 조부는 인수(仁壽)요. 아버지는 세탁(世倬)인데 자손들의 귀함으로 인해서 인수에게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세탁에게는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증직했다.
공은 젊어서는 사부(詞賦)로 명예를 이루다가 22세인 기축(己丑, 1589년 선조 22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39세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했으며, 무신(戊申, 1608년 선조 41년)에 성균관 학유로서 시강원 설서(成均館學諭兼侍講院設書)를 겸했다. 광해군 원년인 기유(己酉, 1609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승진했는데, 4년 사이에 세 번 정언(正言)이 되고 네 번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여섯 번 지평(持平)이 되고, 다섯 번 문학(文學)이 되었다. 계축(癸丑, 1613년 광해군 5년)에 장령(掌令)으로서 필선(弼善)에 옮기고, 다시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고쳤고, 또 두 번째로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큰 옥사(獄事)가 있어,1)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일을 간(諫)하다가 이를 형률로 다스리자고 의논하자, 공은 이 말을 쫓지 않아 비로소 시의(時議)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듬해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광해군이 영창 대군을 죽이자, 정온(鄭蘊) 공이 상소하여 극언(極言)하매, 대역(大逆)으로 죽일 것을 논하는지라, 공은 즉시 거짓으로 병이 났다 하여 사직하였는데, 장남인 강대수(姜大遂)가 사간원에 있으면서 역시 쟁론(爭論)하다가 죄를 얻었고, 공은 충원 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마침내 구속되어 옥(獄)에 갇혀 있은 지 9년이었다. 혹자가 사사로이 말하기를, “구속되어 있음은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사태가 급박한데, 어찌 자제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여 이 일을 말하도록 하지 않는가? 그러면 갇혀 있는 것 또한 석방될 것이다.”하였으나, 공은 개연히 죽음으로써 거절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광해군 15년)에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정온 공은 풀려날 수 있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전적(典籍)이 되매 논하는 자들이 앞서의 사건을 말하며 이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동도공(東都公, 아들 강대수를 말함)이 상소하여 그 사건의 시종(始終)을 갖추어 진술하여 이를 해명하였다. 다음 해에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다시 제용감 정이 되었는데, 들어가 사직하고 즉시 전리(田里)로 내려가 한가하게 스스로 즐기며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많은 자에게 내리는 은전(恩典)으로써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후에 추은(推恩)의 예에 의해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증직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화려한 집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옷은 몸에 편한 것을 취했고 음식은 입에 맞는 것을 취했을 따름이다. 항상 자제들에게 경계시키기를, “늙은 애비 때문에 오욕(汚辱)을 당함이 없도록 하라.”하였으며, 성질이 성실하고 신중하여 겉모양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고 남과 함께 할 때는 겉으로 드러냄이 없었으며,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선한 자들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공은 융경(隆慶) 3년인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 정월 13일에 태어나 인조 27년(1649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81세였다. 의령(宜寧)의 낙서(洛西)에 장사지냈는데,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 또한 89세에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강대수(姜大遂)는 동도 윤(東都尹)으로 세 번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강휘연(姜徽衍)ㆍ강휘만(姜徽萬)이고, 사위 세 사람은 현감인 이당규(李堂揆)와 김정익(金庭翊)ㆍ이시격(李時格)이며, 또 서출(庶出)의 아들 강휘윤(姜徽尹)과 사위 이명길(李命吉)이 있다. 차남 강대적(姜大適)은 강휘민(姜徽敏)ㆍ강휘중(姜徽重)ㆍ강휘망(姜徽望)을 낳았고, 사위 두 사람은 조화(趙璍)ㆍ오선기(吳善基)이며, 서출의 아들은 강휘준(姜徽俊)ㆍ강휘걸(姜徽傑)이다. 막내 강대연(姜大延)은 강휘정(姜徽鼎)ㆍ강휘진(姜徽晉)을 낳았고, 사위 세 사람은 이두추(李斗樞)ㆍ김옥(金鋈)ㆍ송정태(宋廷泰)이다. 공의 장녀는 별제(別提) 이여한(李汝漢)에게 시집가서 4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정유우(鄭有佑)ㆍ안시추(安時追)ㆍ이의겸(李義謙)ㆍ하자혼(河自渾)이다. 차녀는 참봉(參奉) 정유숙(鄭惟熟)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성실하면서도 곧았고 질박하면서도 순후하였으므로, 장수하는 길상(吉祥)이 있었을 뿐더러, 게다가 자손들까지 번성하였도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양천 허목 지음
묘갈명(墓碣銘)이 세구(世久)하여 기명이 혼미하여 문자불명 하므로 인(因)하여 원문을 번역개신봉수(翻譯改新奉竪)
임진 2010년 3월 일 담암공 14대손 한영(漢榮) 삼가 세우다.

 

각주
1) 1613년 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함. 대북파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洋甲) 등을 문초할 때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어 영창의 외조부이며 인목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시키고 영창 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하였다가 죽인 사건.

 

 

 

贈禮曹判書姜公墓誌銘

公諱翼文。字君遇。號戇庵。姓姜氏。本晉陽人。自其四世祖承顓徙陜川。遂爲陜人。大父仁壽。父世倬。以子孫之貴。追爵仁壽爲司憲府執義。世倬爲同副承旨。公少以詞賊。致名譽。二十二己丑。進士。三十九丙午。增廣及第。戊申。以成均學諭兼講院說書。光海元年己酉。以禮曹佐郞。四年之間。三爲正言。四爲獻納。六爲持平。五爲文學。癸丑。以掌令移弼善。改濟用監正。又再爲司諫。時有大獄。李文翼公德馨諫永昌事。論以按律。公不肯從。始貳於時議。甲寅。光海殺永昌。鄭公蘊上疏極言。以大逆論死。公卽僞疾辭官。而長男大遂在諫院。亦以爭論得罪。公貶忠原縣監。卒爲所中。滔於縲絏者九年。或私說曰。縲絏良苦。方今廢母妃事急。何不令子弟上疏言此事。囚且釋矣。公慨然以死拒之。癸亥。仁祖旣反正。公遂得釋。辛未。爲典籍。有論者。言前事欲沮之。東都公上疏。具陳終始其事。乃釋。明年。由奉禮。復爲濟用監正。入謝卽去。歸田里。閑暇自娛。以壽考終。以齒典。陞通政。後推恩例。追爵禮曹判書。公平生不喜華靡。衣取便體。食取適口而已。常戒子弟曰。毋以老父故受汗。性愨愼。不事外飾。與人無表襮。見不善與之不少假。以故不善者多不說。公生於隆慶三年正月十三日。歿於我仁祖二十七年五月七日。爲八十一。葬於宜寧之洛西。貞夫人陜川李氏。亦八十九。歿而祔葬。生三男二女。長男大遂。守東都尹。三娶而生二男三女。男徽衍,徽萬。壻三人。縣監李堂揆,金庭翊,李時格。又有庶出子徽,潤。壻李命吉。次男大適生徽敏,徽重,徽望。壻二人。趙璍,吳善基。又庶出子徽俊,徽傑。少男大延生微鼎,徽晉。壻三人。李斗樞,金鋈,宋廷泰。長女適別提李汝漢。有四女。壻鄭有佑, 安時進,李義謙,河自渾。次女適參奉鄭惟熟。銘曰。
愨而直。質而淳。惟壽考之祺。又以子孫之振振。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陽川許穆 謹記

 

 

당암공과 정부인 합천이씨 묘소

14대조 비의 정면에는 가선대부병조참의(嘉善大夫兵曹參議) 한사강공휘대수지비(寒沙姜公諱大遂之碑) 배정부인성산이씨(配貞夫人星山李氏) 배정부인연일정씨부좌(配貞夫人延日鄭氏祔左)라 새겼다.
옛 비는 비좌원수(碑座圓首)형으로 높이 140cm, 폭 64cm, 두께 14cm이고 비좌의 가로 넓이는 90cm, 세로 폭 50cm이다.
오석의 비신은 높이 176cm, 폭 61cm, 두께 31cm이고 비좌는 가로 61cm, 세로 75cm이며, 가첨석은 가로 길이 106cm, 세로 길이 66cm, 높이 68cm이다. 비신에 새긴 묘갈명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찬한 것으로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해 새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대수(姜大遂)의 묘갈명(墓碣銘) 허목(許穆)
승정원 우승지 강공(姜公) 묘갈명

 

공의 휘는 대수(大遂)요, 자는 학안(學顔)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다. 그 선대(先代)는 본래 진주(晉州) 사람으로 고려 태사(高麗太師)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여러 대에 걸쳐 합천(陜川)에 살면서 합천 사람이 되었다. 증조 강인수(姜仁壽)는 증 사헌부 집의(贈司憲府執義)요, 조부 강세탁(姜世倬)은 증 동부승지(贈同副承旨)이며, 아버지 강익문(姜翼文)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는데, 공이 귀하게 되면서 3세 추은1)(推恩)이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9년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10월 3일에 공이 태어나니 총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젊어서부터 재주 있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사모하여 더불어 사귀려 하였다. 20세에 생진시(生進試)에 뽑혔고 다음 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강원 겸설서(侍講院兼說書)에 처음 제수되고 이어서 사서(司書)에 승진되었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되었다. 다음 해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려 할 때 정온(鄭蘊) 공이 간(諫)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공이 쟁론(爭論)다가 함께 죄를 얻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바야흐로 존귀한 자리에 등용되었는데, 공이 일찍이 가리켜 말하기를, “사의(私意)를 우겨대는 데 고집이 세고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뻐한다.”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매우 미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연이어 해치려 하여 처음에는 관직을 삭탈(削奪)하더니 마침내는 회양(淮陽)에 부처2)(付處)하였다. 공은 쓰라린 고통을 참고 힘써 행하여 곤고(困苦)에 처하여도 바른 자세를 잃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슬기롭게 여겼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봄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하고 공을 풀어주어 영변부 판관(寧邊府判官)을 삼았다가 곧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제수하였으며 가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에 정언(正言)으로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기고 곧 장령 겸 편수관(掌令兼編修官)으로 승진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다시 장령,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 공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영남으로 나아가 경상도 장정들에게 효유(曉諭)하여 의병(義兵)을 모았으나 3월에 오랑캐와 화친(和親)하여 의병들을 해산하였다. 4월에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였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주부(主簿)ㆍ시정(寺正)이 되었으며,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순천 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로 나가 3년 만에 병으로 관직을 떠났는데, 마땅히 파직(罷職)이 되어야 하나 임금이 체직(遞職)을 명할 뿐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고, 다음 해 봄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곧 부교리 겸 경연 시독관(副校理兼經筵侍讀官)으로 승진하고, 여름에 군자감 정 겸 시강원 문학(軍資監正兼侍講院文學)으로 옮겼으며, 가을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는 다시 부름을 받아 수찬이 되었고, 이듬해 갑술년(甲戌年)에는 홍문관에 재직하면서 추숭(追崇)의 실례(失禮)를 논(論)하였는데, 무릇 다섯 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려 수천 마디의 말을 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가을에는 사간(司諫)을 거쳐 제용감 정으로 옮겼고, 겨울에는 암행 어사(暗行御史)로 호서(湖西) 지방을 염문(廉問)하여 수령으로서 더욱 심하게 법에 따르지 않는 자를 파직시켰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9년) 봄에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무인년(戊寅年)에 다시 사간으로서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으며, 다음 해에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면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고,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에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된 지 3년 만에 병으로 파직이 되었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 봄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이 되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고, 여름에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옮겼다가 곧 참의(參議)로 승진하여 해서(海西)의 군안적폐 변통사(軍案積弊變通事)를 논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겨울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고 다음 해 겨울에 부호군(副護軍)으로서 동궁(東宮)의 상제(喪制)에 관한 소(疏)를 올렸다.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다시 밀양 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로 나갔는데, 다음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효종(孝宗) 원년 경인년(庚寅年, 1650년)에 구언(求言)의 교지(敎旨)에 의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고, 겨울에 다시 판결사로서 두 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다음 해 3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된 지 1년 만에 관직을 떠났는데, 그 뒤 연이은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9년) 봄에 또 구언(求言)의 교지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말하였는데, ‘사치(奢侈)가 지나치고 사의(私意)가 멋대로 행해진다.’는 경계의 말을 올렸다.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7년) 4월 19일에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의령(宜寧)의 낙동강(洛東江) 서쪽에 장사지냈는데, 임금이 예(禮)로써 사제(賜祭)하였으며, 원근(遠近)에서 모두 ‘현대부(賢大夫)가 죽었다.’ 하였다.
공이 벼슬길에 나선 지 50년 가까이 정성스럽고 삼가서 도움이 되는 바 많았으며, 또 고을을 다스리는 데 유능하여 그곳을 떠난 뒤에는 모두 송덕비를 세웠다. 만년에 자호(自號)를 한사만은(寒沙晩隱)이라 하고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괘(卦) 하나씩을 외우며 깊이 잠겨 음미(吟味)하였고, 석천 서재(石泉書齋)를 지어 배우려는 자를 기다렸으며, 그 고을에는 이연 서원(伊淵書院)을, 직녕(直寧)에는 덕곡 서원(德谷書院)을 지어 선비들의 일에 마음을 쏟았는데,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면 공은 유학(儒學)을 중히 여겼으며 온화 단아한 것을 숭상하여 ‘공ㆍ검ㆍ겸ㆍ렴(恭儉謙廉)’을 평생 행하는 대법(大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공은 세 번 장가들었는데, 2남 3녀를 두었다. 전부인(前夫人)은 종실(宗室) 영제군(寧堤君) 이석령(李錫齡)의 딸로서 아들 강휘연(姜徽衍) 하나를 두었고, 후부인(後夫人)은 참봉(參奉) 이각(李殼)의 딸로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강휘만(姜徽萬)이요, 사위 3인은 현령(縣令) 이당규(李堂揆), 사인(士人) 김정익(金庭翊), 이시격(李時格)이며, 말취(末娶) 정 부인(鄭夫人)은 현감 정훤(鄭暄)의 딸로서 낳아 기르지 못하였다. 또 측실(側室)이 있었는데, 아들은 강휘윤(姜徽潤)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정성스럽고 삼감은 대부(大夫)의 문채요. 검소하고 공손함은 대부의 법도라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양천 허목 지음
묘갈명(墓碣銘)이 세구(世久)하여 기명이 혼미하여 문자불명 하므로 인(因)하여 원문을 번역개신봉수(翻譯改新奉竪)
임진 2010년 3월 일 담암공 13대손 한영(漢榮) 삼가 세우다.

 

각주
1) 추은(推恩) : 2품 이상 관원의 죽은 부ㆍ조부ㆍ증조에게 증직(贈職)을 내리던 일.
2) 부처(付處) : 중도 부처(中途付處)의 준말. 유배(流配)에 처한 죄인에게 그 정상을 참작하여 배소(配所)를 가는 도중의 한 곳을 지정하여 거처하게 하는 일.

 

承政院右承旨姜公墓碣銘

公諱大遂。字學顏。姓姜氏。其先本晉陽人。高麗太師民瞻之後也。累世居陜川。爲陜人。曾祖仁壽。贈司憲府執義。祖世倬。贈同副承旨。父翼文。司諫院司諫贈禮曹判書。以公貴故。得推恩三世。母貞夫人陜川李氏。萬曆十九年辛卯十月三日公生。聰明嗜學。自少時。得才名甚盛。聞者多慕與之交。三十。選國子試。後年。登第。初授侍講院兼說書。尋陞司書。遷司諫院正言。明年甲寅。光海殺永昌。鄭公蘊諫而當死。公以爭論。幷得罪。時鄭仁弘方貴用。公嘗指之曰。執拗私意。喜人佞已。以故深疾之。至此。因擠陷不已。初削官。竟付處淮陽。公刻苦勵行。能得處困之正。人皆賢之。癸亥春。仁祖旣反正。釋爲寧邊府判官。卽改戶曹佐郞。秋。陞禮曹正郞。明年。以正言移司憲府持平。尋陞掌令兼編修官。丙寅。復爲掌令知製敎。丁卯。有虜亂。爲號召使鄭公經世從事。出嶺南。募諭尙慶子弟。收召義兵。三月。虜旣和親。乃罷兵。四月。陞司諫院司諫。累轉宗簿寺正。戊辰。出順天。三年。以病去。當罷。上命遞職而已。辛未。入玉堂。爲副修撰兼經筵檢討官。後年春。陞修撰。尋陞副校理兼經筵侍讀官。夏。改軍資監正兼侍講院文學。秋。出爲靈光。癸酉。復召爲修撰。甲戌。在玉堂。論追崇之失禮。凡五箚累千言。乙亥秋。由司諫。移濟用監正。冬。以繡衣。廉問湖西。去守令不用法尤甚者。丁丑春。爲副應敎。戊寅夏。復以司諫。出南原。明年。陞通政。爲東萊。辛巳。爲晉川。三年。以疾罷。甲申春。爲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至右承旨。夏。改兵曹參知。尋陞參議。論海西軍案積弊變通事。上從之。冬。出尹東都。明年冬。以副護軍。上東宮喪制疏。丁亥。由判決事。復出密陽。明年。以父憂去。孝宗元年庚寅。應旨上萬言疏。冬。復以判決事。再入政院。後年三月。爲全州大尹。一年去。此後連有召命。而以母老皆不起。丙申春。又應旨言時事。有奢侈太盛。私意橫流之戒。戊戌四月十九日卒。年六十八。葬宜寧洛西。上以禮賜祭。而遠近皆曰。賢大夫亡矣。公立朝近五十年。恪心謹愼。裨益旣多。而又賢於治郡。去後皆有遺愛。晩年自號寒沙晩隱。好讀易。日誦一卦。以潛玩焉。作石泉書齋。以待學者。同郡。作伊淵書院。宜寧。作德谷書院。眷眷於儒者緖業。而考其家狀。公重儒術。尙溫雅。恭儉謙廉。爲平生受用之大法云。公三娶而有二男三女。前夫人宗室寧堤君錫齡之女。生一男。曰徽衍。後夫人參奉李殻之女。生一男三女。男曰徽萬。壻三人。縣令李堂揆,士人金庭翊,李時格。末娶鄭夫人。縣監暄之女。無子。又有側室子。曰徽潤。銘曰。
惟恪惟謹。惟大夫之飭也。惟儉惟恭。惟大夫之式也。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陽川許穆 謹記


출처 및 참고

묘지의 번역 비문 참조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강익문[姜翼文]의 묘지명(墓誌銘) 허목(許穆)

한사선생문집-한가람전산(주)/강한영(199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