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고사리 신덕마을 의령남씨 덕천재 德泉齋

천부인권 2018. 3. 25. 15:34



2018.3.20. 진전면 고사리 신덕마을 의령남씨 덕천재 전경


창원시 진전면 거락2길 89에는 의령남씨 덕천재(宜寧南氏 德泉齋)가 있다. 고사리 거락마을과 진전천을 두고 마주하는 이 작은 마을의 이름은 신덕리(新德里)이다. 이곳에는 두문동 서원(杜門洞 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는 의령남씨(宜寧南氏) 병제(丙齊) 남을진(南乙珍)의 후손들이 세운 덕천재(德泉齋)가 있고 그 옆에는 “처사의령남공기적비(處士宜寧南公紀績碑)”가 세워져 있다.



진전면 고사리 신덕마을 의령남씨 덕천재



진전면 고사리 신덕마을 의령남씨 덕천재 일신문




일신문(日新門) 편액





덕천재 역문(德泉齋 譯文)
재실(齋室)이 함안(咸安)고을의 신덕리(新德里)에 있으니 신덕리(新德里)의 옛 이름은 원천(圓泉)이였다. 옛날 이름과 지금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이름을 짓게 된 것이 덕천(德泉)이다. 덕천재(德泉齋)라고 하는 것은 신덕리(新德里)에 사는 남씨(南氏)들이 1년에 한번씩 제사(祭祀) 지내며 제계(齊戒)를 밝힐 장소(場所)를 삼기 위(爲)하여 지은 곳이다. 남씨(南氏)는 바로 문안공(文安公)이신 병제선생(丙齊先生) 휘(諱)을진(乙珍) 어른의 후손(后孫)이니 선생께서는 고려조(高麗朝)에 문하부사(門下府事)를 지내신 분으로 국운(國運)이 장차(張次) 망(亡)하게 되어 감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사천(沙川) 땅에 은거(隱居)하시자 태조(太祖; 이성계)께서 沙川伯(군수)으로 봉(封)하셨으나 받지 않으시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岳山)에 있는 엄굴중(嚴窟中)으로 들어가시어 머리를 풀고 통곡(痛哭)하시가 돌아 가셨는데 양주(楊州)에 있는 정절사(旌節祠)에서 제향(祭享)을 하고 있다. 병제선생(丙齊先生)의 증손(曾孫)되시는 휘(諱) 의(椅)라는 분은 단종조(端宗朝)에 벼슬이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육품관(正六品官)])이셨는데 세조(世潮: [광묘(光廟)])께서 즉위(卽位)하시자 남(南)쪽 진주(晉州)의 두곡(杜谷)에 내려와 은둔(隱遯)하시며 그곳 산의 이름을 망의산(望義山)이라 하고 그분의 정자(亭子)를 지곡헌(止谷軒)이라 하였다. 그분의 뜻은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행적(行蹟)은 다르나 의리(義理)는 같은 것이었다. 현손(玄孫;[고손(高孫)])되시는 영(暎)이라는 분이 처음으로 이곳(함안 신덕리)으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두곡(杜谷)과의 거리는 일사(一舍; 한번 쉬어 갈 정도의 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집은 깊숙하고 산세(山勢)가 막히어 가(可)히 은거(隱居)하기에 알맞았고 샘물은 달고 토지는 기름지니 또한 가(可)히 밭갈이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자손들이 인(因)하여 자리 잡아 살게 된 것이다. 지금 구대(九代)와 십대(十代)에 이르도록 호수(戶數)가 수십호(數十戶)에 불과하나 해마다 제사(祭祀)를 드리는 일과 향을 피우는 것은 매우 경건(敬虔)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자손(子孫)들이 제숙(齊宿; 제사를 드리며 머무는 집)할 곳이 없어서 깊은 한(恨)을 여겨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수년전에 여러 일가들이 서로 더불어 의론(議論)하여 말하기를 “묘(墓)”에는 반드시 제사(祭祀)를 모셔야 하며 제사를 모실 때에는 반드시 제계(齊戒)를 올리며 제계(齊戒)를 올리자면 반드시 장소(場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안이 장소를 마련할 겨를이 없었던 것은 반드시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하였음이 아니지만 정성(精誠)이 지극(至極)하다면 물자(物資)는 따라오기 마련이니 어찌하여 서로 힘쓰지 아니하랴 하고는 그제야 각자(各自)가 힘대로 자본(資本)을 내고 가슴속 깊이 우러나는 정성으로 벼를 저축(貯蓄)하여 충분히 경비(經費)의 비용(費用)이 마련되자 또 다시 서로 의론(議論)하기를 친진(親盡; [고조이상(高祖以上)])의 묘소(墓所)가 모두 10리 내지 20리에 불과(不過)한 거리에 있으면서 힘이 모자라 능(能)히 각각의 분암(墳菴)을 두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집 한 채를 자손들이 살고있는 곳에 지어 놓고 춘추(春秋)의 상로지절(霜露之節)에 제계(齊戒)를 밝히고 목욕(沐浴)할 장소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하여 또 조석(朝夕)으로 출입하는 여가(餘暇)에 문중(門中)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과업(課業)을 학문(學問)한다면 이는 후일에 두 가지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할 수 있지 않겠느냐하였더니 모두가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드디어 신덕리(新德里)의 남쪽에 터를 살펴 선택하여 기둥 넷에 삼간짜리를 지어 완성(完城)을 보았으니 이른바 ‘덕천제(德泉齊)’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낙성(洛成)을 보자 또다시 재실(齋室)을 완성하였으니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다하여 나에게 기문을 요청(要請)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세적(世蹟)을 잘 아는 사람은 오종장(吾宗丈)만한 분이 없다 이르면서 감(敢)히 요청(要請)하노니 바라건데 한마디 말씀을 베풀어 주시어 관성(觀省: 그 글귀를 읽어 보며 자신을 반성하여 보는 것)할 자료(資料)를 제시(提示)하여 달라”하였다. 내가 기문을 지어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그 말씀이여! “당(堂)”을 지어놓고 관성(觀省)할 글귀가 없다면 빈것일 뿐이다. 신덕(新德)이나 원천(圓泉)이 비록 이 마을의 이름을 인용(引用)하여 재실(齋室)의 이름을 삼았다면 어찌하여 마을의 이름이 그러하였을 뿐이였겠느냐? 이윤(伊尹)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신궐덕(維新厥德;오직 그 덕을 새롭게 하자)”이라 하셨으니 이 말은 덕(德)을 나아가 닦으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이며 자사(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연천여연(淵泉如淵; 샘의 근원이 못과 같다.)”하셨으니 이 말은 샘의 고요하고 깊음이 근본이였다는 것이다. 지금 일가들이 조선(祖先)에게 정성을 다하여 능(能)히 추원(追遠; 오래된 옛 조상을 추모함)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근본이 있는 것이며 여러 일가들이 화목(和睦)하여 더욱 돈회(惇廻; 집안 일가들이 서로 정을 두터이함)에 힘쓴다면 이것이 바로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돈회(惇廻)하는 도는 사랑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사랑하게 되면 서로가 두터이 지낼것이며 추원(追遠)하는 예(禮)는 제사를 모시는 것보다 중(重)한 것이 없으나 제사(祭祀)를 모실 때에는 마치 조상(祖上)님이 곁에 계시는 듯 하여야 한다하셨다. “이것으로서 관성(觀省)을 삼아 각자가 경건(敬虔)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재실(齋室)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지만 혹시(或時)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한갓 당실(堂室)을 아름답게 지어놓은 것과 천두(阡豆; 제물을 담은 그릇)에 풍성(豊盛)하게 차려놓은 것만으로서 스스로 능사(能事)를 삼아 길이길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자랑을 한다면 비단 식자(識者)들에게 많이 더럽게 여김을 받을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님들의 영혼(靈魂)께서도 어찌 즐거움이 기쁜마음으로 편안히 자시겠는가?”하였더니 뭇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 감(敢)히 공경(恭敬)히 받들지 않을소냐?”하였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노라.
壬寅(1962)十月下浣에 집안사람(族人) 계진(啓震)이 기록하다.




덕천재(德泉齋) 편액




德泉齋記
齋於咸州之新德 新德舊名圓泉 通今舊而名之曰 德泉齋 者南氏之居新德 者爲其歲一祭齊明之所而起也 南氏卽文安公丙齊先生 諱乙珍之后先生 以麗朝門下府事 見國運將訖退 隱于沙川 太祖封沙川伯不受 入積城紺岳山嚴窟中 被髮痛哭以終 焉享楊州旌節祠 曾孫諱椅端宗朝中修撰 及光廟受禪 南遯于晉州之杜谷 名其山曰望義 扁其軒曰止谷 其志與六臣跡殊而義同也 玄孫暎始居于此距杜谷 未滿一舍宅幽而勢阻可以隱泉甘而土肥亦可以耕 子孫仍以奠居 至今九代十代戶不過數十 而歲修祀事苾芬甚虔然 而惟以子孫齊宿之無 其所深以爲恨者久矣累年 前諸族相與謀曰 墓必祭祭必齊齊必有 其所而吾家之所 未遑者未必非誠之不足也 誠之至則物亦終之境相勉哉於是 各力出資赤誠蓄租至於可 以經用則又相與謀曰 親盡墓所皆不過十里二十里之遙 而力絀未能各置墳菴則無寧築一屋於 子孫所居之地 春秋霜露之節 以爲齊明湢浴之所 且朝夕出入之暇 令門子弟學文課業於 其中是於爲後不 其爲兩全者乎或曰 可遂相址於新德之陽 以成四楹三袈之構所謂德泉齊者是也 旣落又以爲齋成 而不可無記要 余以記曰 知吾家世蹟者 莫如吾宗丈是 以取請願一言惠之示觀省之資也 余作而曰旨哉言乎 堂構而無觀省則虛 而巳新德圓泉雖是里名引 而爲齋名則豈徒然乎 哉伊尹曰維新厥德此言德之進修而日新也 子思曰此言泉之靜深而有本也 今諸宗誠於祖先 而能思追遠則 斯爲有本矣睦於宗族 而益無惇徐則 斯爲日新矣然 而惇叙之道莫過於愛愛則相厚也 追遠之禮莫重於祭祭必如在也 以是觀省而各虔無怠則庶無愧乎 斯齋之名矣如或不然而徒 以堂構之美籩豆之豊 自爲能事而永譽於人之耳目 則非但爲識者之所鄙 在天祖宗之靈豈肯悅豫而安亨乎 衆曰唯敢不敬承是爲記
壬寅十月下浣族人啓震記




덕천재상량문(德泉齋上樑文)




여재실(如在室)-조상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