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봉곡동 분성배씨 화수재花樹齋

천부인권 2018. 3. 31. 05:54

 

 

 

2018.03.27 봉곡동 분성배씨 화수재

 

창원시 의창구 봉곡로111번길 39에는 분성배씨 화수재(花樹齋)가 건설되어 있다. 이 건물은 옛 웅남면 목리마을에 있던 재실을 창원공단의 건설로 마을이 사라지자 이곳으로 이건하여 왔다. 화수재기(花樹齋記)에 의하면 분성군(盆城君) 원룡(元龍)의 7세손인 각봉공(覺峰公) 휘 필문(弼文)이 웅남면 목리 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창원에서 세거하게 된 집안이다. 봉곡동에 재건된 화수재의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편액을 단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옛 세거지 목리(木里)는 남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향양문(向陽門)-해(陽)가 뜨는 남쪽 고향을 향(向)해 서 있는 문

 

 

 

 

분성배씨 화수재(花樹齋) 편액과 균시헌(均是軒), 여재실(如在室) 등의 편액 글씨는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 선생이 남긴 것이다. 
  

 

 

 

화수재(花樹齋) 편액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은 창원군 웅남면 완암리 126번지에서 동래정씨 정규엽과 이근수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인물이다. 일찍이 한문과 서예를 배웠으나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후 주시경선생의 문인이 되었고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한일병탄(韓日倂呑)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의 제자가 되었다.

 

 

 

 

균시헌(均是軒)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공도자(公都子)가 인간에 관한 궁금증이 생겨 맹자에게 여쭈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여재실(如在室) 편액

 

여재(如在)란 『예기(禮記)』『중용(中庸)』의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귀신의 성덕이 위대하도다! 보려고 하나 볼 수 없고, 들으려 하나 듣지 못하나니, 사물의 근간이 됨에 빠지지 아니한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제사를 받들게 하니 신령스러움이 상하사방에 가득 차 있다!”』에서 따온 글이다.

 

 

 

 

 

화수재기(花樹齋記)
창원의 남쪽에 화목리(花木里)가 있다 그 산은 천주산(天柱山)으로부터 남으로 뻗은 것이다. 남으로부터 동으로는 구불구불 이어지고 서쪽은 끊어지고 돌이켜 천주산으로 향하여 서려서 앉았다. 푸른 벽랑이 층층이 벽을 이루고 가파르게 솟은 것이 천 길은 되고 첩첩이 봉우리들이 겹쳐 마치 병풍을 두른 듯 둘러쳤다. 그 중간에 넓은 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데 거의 칠, 팔십리는 된다. 또 큰 냇물과 작은 여울이 그 위를 이리저리 이어져 내닫고 마을은 그 서북쪽에 있으며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오랜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 배씨들이 자리 잡은 것은 수백년은 되었다. 마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뭇 산들이 완만하게 이어지고 용이 날고 말이 달리듯 하여 바다에 이르러 그친다. 마을의 남쪽은 또 덕천동(德川洞)이 있는데 높은 등성이가 돌출하니 그곳 골짜기가 아름답고 수려하여 완연히 하나의 명승지를 이룬다. 이곳은 그들의 선조인 각봉공(覺峰公)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공의 휘는 필문(弼文)이며 분성군(盆城君) 원룡(元龍)의 7세손이다. 선산부사(善山府使) 모당공(慕堂公) 계후(季厚)의 후손이다. 공은 선조대에 활과 말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광해군 때 첨정경력(僉正經歷) 직을 지냈는데 갑작스럽게 서궁(西宮)의 일이 생겨 드디어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종적을 감추고 몸을 숨겼다. 공은 처음 밀양에서 태어나 늦게 창원의 오리(梧里)로 옮겼고 그 뒤에 자손들이 각 읍으로 흩어져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그 중 화목에 사는 사람들이 서열로 어른이 되고 또 자리가 공의 묘에 가깝다. 매번 묘사 때에 모두 모이면 반드시 화목으로 가게 되었다.
정해(丁亥) 봄에 멀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논하여 함께 마을 옆에 재실을 한 칸 지었는데 그 규모는 5영(楹) 4가(架)이며 편액은 화수(花樹)라고 하였다. 수(樹)와 목(木)은 그 뜻을 취한다면 같은 의미이다. 이는 당위씨(唐韋氏)의 화수종회(花樹宗會)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배씨의 어른으로 문수(文綉)(라는 분이 있는데 일찍이 그 사실들을 모두 말하면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때 상(喪) 중이어서 마땅하지 않다고 사양하고 물러나 뒷날을 기약 하였다. 지금 문득 4~5년이 지나고 세상의 어지러움이 더욱 심한데 문수씨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아우인 문식(文湜)군이 나를 찾아와 옛 일을 이야기하며 그 때의 약속을 지키려하니 참으로 슬픔이 있지만 또한 차마 끝내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각봉공(覺峰公)은 세상을 구할 그릇을 품고 급류를 갈라 설 용기가 있었으나 그 내면에 쌓은 것을 다 펼치지 못한 것들을 후손들이 발휘할 것을 기다렸다. 이것이 어찌 옛날에 재위에 있으면서 그 덕이 칭송 되지 못하면 반드시 후세에 그르다고 한다는 말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나무에 비유하자면 뿌리가 깊은 것은 그 과일이 반드시 번성하고 그 꽃은 아름답다. 그 씨앗은 천만송이 꽃이 되어 피어나 그 근원은 한 뿌리에서 나간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마을의 이름을 화목으로 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 재실을 지은 것도 그 뜻을 본받아 더욱 뚜렷이 드러내고자 함이다.
내게 배씨들이 잔치도 이 재실에서 하고 또 항상 나에게 오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엇이 선조들이 내려주신 두터운 덕이 아님이 있겠는가.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이 성기고 조밀하고 영화롭고 쇠함이 서로다르지만 순순히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모두 한 선조의 자손이니 한 나무의 뿌리에 가지와 꽃인 것이다. 이것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또 어찌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겠는가. 보아라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가까울 것이다. 이에 글을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김황(金榥) 삼가 쓰다.

 

花樹齋記
昌原之南 有花木里 其山 自天柱山而南又自南而東逶西折 還向天柱而盤距 蒼崖層璧 削立千仞 重蜂疊巒 環圍如屛 中間平野廣輸 洽七八十里 大川小澗 橫貫交絡 而里處其西北 閭閻櫛比 老槐森列 裵氏之宅于是 盖數百年矣 循里而西 羣山綿亘 龍飛馬馳遇海而亭 里南又 有德川洞 爰有高嶝突出 祠壑明媚靜秀 宛成一名邱者 卽其先祖覺峰公 衣履之攸藏也 公諱弼文 盆城君元龍之七世孫 善山府使慕堂公季厚之玄孫也 公堂 宣廟朝 以弓馬 被選登虎榜 至光海時 歷職僉正經歷俄而 西宮事作遂掛冠南歸 晦跡以汲身 公始生於密陽 晩移昌之梧里 其後子孫 散在各邑 數艾甚衍 而其居花木里者 於叙 爲長且地近公墓也 每歲時聚會 必以花木爲歸 丁亥春 詢謀遠近 共起一齋於里側 爲制五楹四架 扁曰花樹樹與木取義則同 而傳諸唐韋氏花樹宗會之故事也 裵氏長老有 曰文綉嘗具其事實 而要余爲記 余時方居憂 辭謝未副 而退俟後期 今更四五年 世紛益甚 而文綉氏遽己不留 其季文湜君 重來訪余 爲道其故 而追尋前諾 俯仰愴然 亦不忍終負也 竊惟覺蜂公 抱需世之器 而決急流之勇 其所蘊蓄未展者 乃待後嗣而發焉 豈古所謂位不稱德者 必有後非耶 譬諸樹木 根之深者 其枝必蕃而花之麗乎枝者 千葩萬蘂 原是一根之發也 由是推之 里之得名花木 殆不偶然 而於以爲齋 其義益較著矣 凡諸裵氏之 燕歡于是齋者 且當常念我之有今日 何莫非先祖垂裕之厚 而後屬之分 雖有疎密榮悴之不同 循而上之 均是宣祖之子孫 一樹之根而枝而花焉 是惡得而忽之 又惡可以彼此差殊 觀也若是其幾矣乎 因書而爲記
金榥撰
昌原市 熊南面 木洞 所在 盆城裵氏齋室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

 

 

 

花樹齋上樑文
通萬姓皆有祖之人孰不追遠而報本 參九族是同宗之列允合講睦而敍倫 見突兀於一朝 期蕃榮於千歲 於惟訓練院僉正裵公諱弼文 武烈苗裔 判尹玄孫 時當昏朝遭値西宮之變 志在勇退和答北風詩 用覺峰而揭軒盖取元亮歸田賦 問檜山而奠礎且託仲連蹈海盟 睠德川之一邊 有幽宮之四尺 三百年風雨不壞神明顧臨 八九世香火靡愆賢孝繼出 阡表已立縱昌黎之有銘 墳庵未成奈後山之無記 事有待於今日 得合謀於諸宗 相基地於桑梓之村念昔杖屨 伐木材於楸檟之麓異他室宮 非亟非徐至三年而略就 不奢不儉止四架而稍寬 歌花樹而揭楣 詠松竹而飮落 花香滿園弄兒孫而忘憂 樹陰交庭集老少而致樂 陳亭之楊花見笑富貴非所求 田家之荊樹爲枯兄弟豈相折 念善繼而善述 貴有始而有終 置潔田學田可以祭祖而敎子 立恤庫稅庫亦足救貧而納公 洞設白鹿之規講五倫次第 士如緇衣之好致四方往來 玆因上樑之升 敢陳聚族之頌 兒郞偉抛樑東 朝朝海旭照窓紅 從容睡覺當年意 後覺應思先覺翁 兒郞偉抛樑南 德川楸栢近烟嵐 晦峰大筆銘詞在 不比尋常俗士談 兒郞偉抛樑西 崔鄭臺亭馬海堤 月照海兮海涵月 每從淸夜散玻瓈 兒郞偉抛樑北 天柱亭亭撑北極 男兒氣像能如斯 一笑無難鎭萬國 兒郞偉抛樑上 秋霜春雨異其狀 莫言凡物因時遷 旺極生衰衰極旺 兒郞偉抛樑下 南川晝夜淸流瀉 不能十里入滄溟 請看小終爲大者 伏願上樑之後 地靈旣護 天神且臨 花木長春伴楚榠而開落 棟宇多壽與魯殿而兄弟 人人孝且慈不啻安豊之董 世世和而睦復見江州之陳
大韓民國 壬辰 雨水節 光州 盧根容 撰

 

화수재상량문(花樹齋上樑文)
세상의 모든 성씨를 통틀어 보아도 모두 그 시조가 되는 사람이 있으니 누군들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그 근본에 보답하려 하지 않겠는가. 구족에 속하는 온 집안이 모두 갖은 종족의 반열이니 화목함을 강론하고 인륜의 질서를 펼치는 것이 매우 합당한 것이다. 한 나라의 조정에서 우뚝 그 두각을 드러내어 천년토록 번영을 기약한다. 생각건대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배필문(裵弼文)¹⁾ 공은 무열(武烈)공의 후손이며 판윤(判尹)공의 현손이다. 조정이 혼란스러운 때를 만나 서궁(西宮)의 변란²⁾을 당하고는 용기있게 물러나 북풍시(北風詩)에 화답할 뜻을 굳혔다. 각봉(覺峰)이라는 이름을 처마에 걸어둔 것은 대개 원량(元亮)의 귀전부(歸田賦)³⁾에서 취한 것이다. 회산(檜山)이 어디인가를 물어 새롭게 초석을 놓고 제사를 드린 것은 노중연(魯仲連)이 동해에 은거한 맹서⁴⁾에 의탁한 것이다. 덕천(德川)마을 한쪽을 살펴보면 사척(四尺)의 무덤이 있다. 삼백년(三百年)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명(神明)이 돌보았기 때문이리라. 팔구세(八九世)동안 제사를 드리는 향불이 끄지지 않았던 것은 어질고 효성스런 후손이 이어 났기 때문이리라. 무덤의 표석은 이미 서서 한창려(韓昌黎)⁵⁾와 같은 명문장가의 비명(碑銘)이 있으나 재실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진후산(陳後山)⁶⁾과 같은 시인의 기문이 없을 것인가.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려고 오늘을 기다렸으니 여러 종족의 합치된 의논이 있었다. 이에 오랜 세거지가 된 옹남면 화목에 터를 닦은 것은 각봉공(覺峰公)의 무덤이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마을 뒤 산록에서 목재를 벌목하여 새롭게 재실을 지으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절히 삼년이 지나면서 대략 이루어졌다. 사치스럽지도 검소하지도 않게 네 칸을 지었으니 제법 넓은 편이다. 화수(花樹)와 같은 종중의 번성을 노래하여 문설주 위에 걸고 송죽매란(松竹梅蘭)과 같은 벗들을 노래하며 술 마시고 낙성을 한다. 꽃향기 뜨락에 가득하니 어린 손자들을 놀리며 근심을 잊고 나무 그늘이 마당에 드리워 시원하니 남녀노소가 모였으니 그 즐거움이 지극하다. 정자 가에 늘어선 버들꽃을 보며 웃고 즐기니 부귀를 구할 필요도 없고 시골집의 가시나무가 말랐으니 형제가 어찌 단절될 것인가.⁷⁾ 선조의 업을 잘이어 후손들에게 잘 전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에 시작과 끝이 있음을 귀하게 여긴다. 제사드릴 논밭과 학업에 쓸 논밭이 갖추어졌으니 조상을 세사하고 후손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백성을 구휼하고 세금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으니 가난을 구제하고 공물을 헌납하기에 족하다. 고을에 백록동(白鹿洞)의 서원과 같은 규율을 세우니 오륜과 질서를 강론할 수 있게 되었고 선비들이 어진 이를 좋아함이 치의(緇衣)⁸⁾와 같으니 사방에서 왕래하며 덕을 닦는다. 이는 상량을 올림으로 인한 것이니 감히 온 종중의 송축하는 노래를 부른다. 어랑차 들보 동으로 던져라. 아침 바다 위의 빛나는 해 창에 비쳐 불으면 조용히 잠깨어 당시의 뜻을 생각하면 깨친 후손은 응당 선각옹(先覺翁) 생각하겠지. 어랑차 들보 남으로 던져라. 덕천(德川) 언덕에 심은 나무 허리에 남기가 둘렀는데 회봉(晦峰)⁹⁾의 큰 글이 비명에 새겨졌으니 일상의 속된 선비 비할 바 아니리. 어랑차 들보 서편으로 던져라. 최고운 월영대 정한강의 관해정은 마산 바다 언덕에 있는데 달은 바다 비추고 바다는 달을 품었네 맑은 달 뜬 밤마다 유리알 같은 물결 흩어지리. 어랑차 들보 북으로 던져라. 천주산은 우뚝 솟아 북극을 지탱하니 남아의 기상은 이와 같으리니 한바탕 웃음으로 온 세상 진압하리. 어랑차 들보 위로 던져라. 봄비 가을서리 그 풍경 다르지만 사물이 시류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마라 태극처럼 왕성하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왕성해지리니.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남천(南川)은 밤낮없이 맑은 물 흘려내니 십리 먼 낙동강에 쉬이 들어가리 보아라 작은 냇물도 끝내 큰 바다를 이루니. 엎드러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 지령(地靈)이 보호하고 천신(天神)이 굽어보아 화목(花木)이 긴 봄은 명사나무처럼 오랜 생명 누려 수천년의 봄과 수천년의 가을을 누리고 재실의 기둥과 지붕은 오랜 생명을 누려 노전(魯殿)¹⁰⁾과 형제처럼 되게 하소서. 사람마다 효성스럽고 자애로워 안풍(安豊)의 동중서와 같이 되게 하고 대대로 화목하여 다시 강주의 진씨(陳氏)¹¹⁾와 같이 되게 하소서
대한민국 임진(1952) 2월 광주 노근용盧根容 짓다.

 

【주석】
배필문(裵弼文)¹⁾ : 배필문(裵弼文): 자는 성뢰(聖뢰)요, 호는 각봉(覺峯)이니, 분성인으로 선조조에 武로 宣傳官이 되고, 광해정란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서궁(西宮)의 변란²⁾ : 인목대비 폐비사건, 이이첨이 소북파(小北派)의 영의정 유영경과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했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함과 아울러 강화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한 영창대군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
귀전부(歸田賦)³⁾ : 도연명(陶淵明 : 365~427) : 자(字)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이다. 이름은 잠(潛)이며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말한다. 그 이전에 후한(後漢) 장충(張衝)의 <귀전부(歸田賦> 즉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삿일을 한다는 내용의 부(賦)도 있다.
노중연(魯仲連)이 동해에 은거한 맹서⁴⁾ : 노중련(魯仲連)은 주(周)나라 말엽 제나라 양민왕 때 사람으로 진(秦)나라를 제왕(帝王)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정의를 주장하시어 벼슬이나 포상도 마다하고 동해상에 은거하시며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강기(綱紀)를 수립하여 춘추(春秋)시대에 큰 공을 세우시니 사가(史家)들이 칭찬하고 사림(士林)에서 받들었다. 소동파(蘇東坡)나 이백(李白)같은 문사들이 천하사(天下士)라고 극찬하였다.
한창려(韓昌黎)⁵⁾ : 한유(韓愈 : 768—824) 당나라 때의 대 문장가로 하남성 맹주(孟州) 사람이다. 자는 퇴지(退之),호는 창려(昌黎).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郎)을 역임하였으므로 한이부(韓吏部)라고도 불림. 시호는 문공(文公). 유종원(柳宗元)과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창도(倡導)하였음.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진후산(陳後山)⁶⁾ : 진사도(陳師道 : 1053-1102) 자는 이상(履常) 또는 무기(無己), 호는 후산거사(後山居士)이다. 북송(北宋)의 시인으로 황정견과 쌍벽을 이룬다.
어찌 단절될 것인가.⁷⁾ :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오류선생전>의 내용을 차용하여 쓴 것이다.
치의(緇衣)⁸⁾ : 『예기(禮記)』 “子曰 好賢如緇衣 어진이를 좋아하는 일이 치의와 같다.”에서 나온 것이다.
회봉(晦峰)⁹⁾ :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 : 1870-1946) 그는 27세(1896년) 때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 나아가 많은 성리학적 저술을 남기며, 일제강점 후인 52세(1921년) 때는 「國性論」을, 74세(1943년) 때는 ?東儒學案?을 짓는다. 「국성론」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성이 예의임을 강조하고, 나라의 존망이 자기의 국성을 잘 지키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의 고유한 국성인 예의를 확립한 위에 기술․경제․군사 등 서양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동유학안?은 동문 張志淵의 ?朝鮮儒敎淵源?과 함께 한국 유학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홍원식, 이진상의 철학사상과 그 후예들,에서 참조)
노전(魯殿)¹⁰⁾ : 한(漢)의 노공왕(魯共王)이 세운 전각. 『문선(文選)』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의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의 서(序)에 보면 “노영광전은 한 경제(景帝)와 정희(程姬)의 아들인 공왕 유여가 세운 것이다. …중략…서경의 미앙궁과 건장궁 등의 전각들이 다 무너지고 난 뒤에도 노공왕이 세운 영광전(靈光殿) 만이 우뚝 선 채 보존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강주진씨(江州陳氏)¹¹⁾ : 강주는 지금의 구강부로 진씨는 진포(陳褒)를 말하는 것으로 10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
『소학(小學)』355 「외편(外篇)」 <선행(善行)> 실명륜 제52장
강주(江州)의 진씨(陳氏)는 종족이 700명이 되었는데, 식사 때마다 넓은 자리를 마련하고 어른과 어린이가 차례대로 앉아서 함께 먹었다. 축견(畜犬) 100마리가 있어서 한 우리에 함께 먹었는데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모든 개가 먹지 않았다.

 

 

 

 

 

 

출처 및 참조
창원의 누정-박태성/불휘미디어(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