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사림동 순흥안씨 퇴산서당 退山書堂

천부인권 2018. 4. 1. 12:08



2018.3.29. 사림동 퇴산서당 경덕문


창원시 의창구 창이대로343번길 94-4에는 순흥안씨 퇴산서당이 위치해 있는데 ‘창원의집’과 관련이 깊은 재실(齋室)이다. 처음에는 인진란 때 전사한 안민과 그의 장자 안신갑 부자를 기리기 위해 봉림 적암 아래 세운 사우(祠宇)였으나 서당으로 사용했다. 효종(孝宗) 3년에 창건되어 철종(哲宗) 5년(1854)에 화재로 소실되고 광복 이후 1957년 현재의 자리에 중건하여 서당으로 운영하다가 1990년 중건 했다. 솟을삼문은 맞배지붕으로 경덕문(敬德門)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순흥안씨 직장공파 모헌공대종회 퇴산서당 전경



경덕문(敬德門) 편액



퇴산서당(退山書堂)



완산 이우섭(完山 李雨燮)이 쓴 퇴산서당(退山書堂) 편액




퇴산서당기(退山書堂記)
정병산은 창원 남쪽 경계에 있다. 웅장하고 빼어나 우뚝 솟은 모양이 갑옷과 투구를 갖춘 병사가 전쟁에 임하여 굽히지 않는 굳센 기상이 있는 것 같으므로 산이 이 이름을 얻은 것이다. 산 전체 줄기 중에서 한 가지가 꿈틀이며 내려와 불쑥 솟았다가 문득 가라앉아 깊고도 아늑한 곳에 골짜기가 열렸으니 이곳이 퇴촌으로 안씨의 세거이다.
마을 앞에는 개울이 있고 그 옆에 우뚝 높이 솟아 산뜻한 것은 퇴산서당(退山書堂)이다. 안씨들이 그 선조인 모헌(茅軒) 장암(壯庵) 두 선생을 위하여 지어 그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안씨는 동방의 학문을 처음 연 회헌(晦軒) 선생의 후손으로 순흥을 본관으로 한다.
중세에 교위(校尉)인 창공(昌恭)이 처음 함안 모곡에 거주한 뒤 4대를 전하여 부호군(副護軍) 명갑(明甲)이 다시 창원 퇴촌으로 이사하였는데 모헌의 아들이고 장암의 아우이다. 그 후손인 교연(敎演)군이 두 선생의 두릉원우(杜陵院宇)와 봉림별묘(鳳林別廟)가 모두 잡초가 무성한 것을 개탄하여 본 군과 김해의 모든 종중들에게 봉림에 이 서당을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나 보존하고 관리하기 용이하여 퇴촌으로 결정되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것은 기축(己丑)이나 임진년에 풍조가 더욱 혼란스러워 일의 조리를 모두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을 마치고 유학자인 안성호(安性鎬) 명호(命鎬)가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벗의 의리를 생각하니 세상을 혼자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드디어 손을 씻고 붓을 들어 글을 썼다.
옛날 나라가 생긴 뒤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데 살아서 그 충성을 다하고 죽어서 충성을 이루는 것은 그 충성이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일을 듣는 사람은 모골이 송연해 하면서 오직 죽어서는 되지만 살아서는 불가하다고 생각하니 그 연유가 무엇인가. 죽음은 진실로 인간 최대의 어려운 일인데 쉽게 그것을 하는 경우는 오직 자질이 바르고 기질이 참되어 도리를 볼 수 없다면 가능하겠는가. 은나라에 세 사람의 어진 사람이 있은 뒤에야 사람들은 비간(比干)의 죽음을 칭송하게 되었고, 진나라에 세 사람의 좋은 신하가 있었으므로 시인들이 모두 세 사람의 순절을 읊었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脽陽)의 전투에서 죽으니 한공(韓公)이 그 전기(傳記)를 썼고 유충헌(劉忠顯)이 정강(靖康)의 난에 죽으니 주자가 그 충성을 장려했다.
대대 모든 말의 이루어짐과 잘못되는 것은 계획한바 아니나 왕을 섬기는 것으로 죽으면 천고에 그 이름이 빛나니 죽어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이다. 아아! 두 분 선생께서는 왜적의 난리와 노략을 당하여 성패(成敗)의 공은 이충무공이나 곽충익공과 같은 여러 현인들에게는 뒤지지만 모헌(茅軒)이 이때에 사헌부감찰로 김해 감로사(甘露寺)에서 승려들과 의병을 일으켜 입석강(立石江) 가에서 적을 만나 굽히지 않고 죽으니 적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조선의 충신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장암이 그 변고를 듣고 분주히 달려가 시신을 안고 돌아와 선산에 장사하였다. 그 뒤 집을 나와 부친의 일을 계승하여 적장수의 목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깨어 골을 마셨다. 황석(黃石)에서 산음(山陰)으로 갔을 때 적을 만나 스스로 그 세력이 궁벽한 줄을 알고 환아정(換鵝亭)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일을 나라에서 듣고 정려를 내리고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내렸다. 교지를 내려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고 나라의 치욕을 씻었다. 최소계(崔蘇溪)의 실기(實記)에 형 순(珣)과 안신갑(安信甲) 이달(李達)이 한 목소리로 의병을 일으켜 끝내 큰 공훈을 세웠다. 중흥지(中興誌)에 말하기를 계사(癸巳)에 왜적들이 웅천에 진을 쳤을 때 최강(崔堈)이 병사를 진격하여 공격하니 그 형 순(珣)이 군량미를 조달하고 이달과 안신갑이 좌우의 날개가 되어 대응하였다. 산서록(山西錄)에 당시 날랜 장수가 둘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이 안신갑이고 다른 한 사람이 정기룡(鄭起龍)이다. 전쟁터를 돌아 다닌지 5년이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공의 충성과 의리를 알 수 있고 대략 바라보아도 아름답고 성대 하도다. 그 아버지가 있으니 이러한 아들이 있는 것이다. 그 충성과 의리가 높은 혼백은 김학봉(金鶴峰) 곽존재(郭存齋) 조중봉(趙重峰)과 더불어 촉석루와 황석강 금산 사이에 높이 드날린다. 허성재(許性齋) 유강고(柳江皐) 두 분 선생께서 묘표(墓表)와 행장(行狀)을 지었다.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갖추어져 있고 실질적이면서도 아름다우니 절절한 이것이 당의 기문이니 어찌 사족을 덧붙이는 일이 없었는가. 아! 여러 안씨들께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임진(壬辰 : 1952년) 수요절(秀葽節 ; 4월)에 광주 노근용


退山書堂記
精兵山在 昌原南境雄秀特立有苦介胃之士 臨亂不屈之象山之得名以是也 産之中一枝蜿蜒而 下載起載伏窮窕開壑者曰 退村安氏世居也 村之前臨溪而突兀蕭灑者曰 退山書堂 安氏 爲其先祖 茅軒壯庵兩先生 成之而其㮄以村也 安氏東方倡學之 宗晦軒夫子誌後本順興人 中世校尉 諱昌恭始居咸安茅谷四傳副護軍 諱明甲 又移昌原退村 於茅軒子也 於壯庵弟也 胄孫敎演君慨兩先生 杜陵院宇鳳林別廟俱爲 茂草謀議本郡及 金海僉宗築是堂舍 鳳林而退村爲守護之便也 經始己丑 告功壬辰以 風潮益盪全喪頭緖也 旣畢安斯文性鎬 命鎬 囑根容以爲記余惟 朋友之意不可孤世 遂盥手抽管而書之曰 自古有國以來臣之 事君有生而 盡忠者有死而 毛骨竦然獨於死 而不於 生其故何也 死固人生最大難事而 容易爲之不有獨稟 正氣眞見道理可能之乎 所以旣有三仁而 後人多稱比干之死秦有三良 而詩人皆書三子之殉 張巡許遠死於 脽陽之戰而韓公叙其傳 劉忠顯死於靖康之亂而 朱子獎其忠大率言之 成敗非所計惟死於 王事則 千古病病死猶不死也 嗚呼 兩先生當龍蛇之訌 剿賊成功當讓與李忠武郭忠翼諸賢然 茅軒時以司憲府監察在 金海甘露寺與緇徒倡義 立石江上遇賊不屈而死賊義之 朝鮮忠臣 壯庵聞變奔往負屍歸葬先壟出家 僮繼父事斬賊將平 盛常碎頭飮腦之將赴黃石至 山陰亦遇賊 自知勢窮投換鵝亭深潭而死事聞 命旌贈掌隷院 判決事 下敎曰復父讐雪國耻崔蘇溪 實記曰 與兄珣及安信甲 李達同 聲倡義 終樹大勳中興誌曰 癸巳賊屯聚 熊川崔堈進兵攻之 其兄珣調兵食 李達 安信甲 爲左右翼以應之山西錄曰 當時驍將有 二人一則安信甲 一則鄭起龍 轉戰五載觀此可以知公 忠義侵略也猗歟盛哉 有是父而 有是子想 其忠魂義 魄與金鶴峰 郭存齋 趙重峰 翶翔於 矗石黃石錦山之間也 許性齋 柳江皐 爲兩先生 有墓表 有狀文約而 備實而 華區區是堂之記 倘無爲盡蛇之足也 耶抑諸安氏納之否乎
壬辰 秀葽節 光州 盧根容
昌原市 士林洞 退村 所在 順興安氏 退山書堂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




사헌부감찰모헌선생순절유적(司憲府監察茅軒先生殉節遺蹟)



추증병조판서행초계군수장암선생순절유적(追贈兵曹判書行草溪郡守壯菴先生殉節遺蹟)



통정대부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퇴산선조유적(通政大夫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退山先祖遺蹟)



퇴산서당중건기(退山書堂重建記)





모헌정사(茅軒精舍)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