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동읍 금산리 김해김씨 금호재 琴湖齋

천부인권 2018. 4. 6. 09:15




2018.12.28 동읍 금산리 김해김씨 재실 금호재



2016.10.26. 금호재 솟을삼문


창원시 의창구 동읍 금산리 418에 위치한 금호재(琴湖齋)는 두대봉 기슭에 있는 김해김씨 판서공 불비(不比)와 아들 수광(秀光), 손 석공(錫貢), 증손 맹손(孟孫) 등을 추모하여 일재강점기인 1924년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여말선초의 문신인 신묵재(愼默齋) 김불비는 창원시 동읍 산남리에서 출생하여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 되었다. 학문을 성취하니 국내에서는 그의 학문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하여 불비(不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재실의 동쪽 구릉에는 김불비 내외 묘(墓)와, 손자 석근·석공 내외의 묘소가 있고, 재실의 후면 구릉에는 김석공의 부인인 숙인전주이씨 묘와 신묵재의 증손자인 김맹손 내외의 묘가 있다.
금호재(琴湖齋)는 선산의 기슭을 깎아 대지 80평에 건평 30평의 재사(齋舍)를 짓고 뜰에는 제단비(祭壇碑)를 세웠다. 경계로 낮은 시멘트 담장을 하고 출입문은 좌우 행랑채의 지붕 보다 높이 솟게 만든 솟을대문을 배치했다. 주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한 재실이다. 중앙대청 2칸에 좌우로 온돌방을 1칸씩 배치하고 앞으로 툇마루를 놓은 중당협실형이다. 재실의 오른쪽에는 제단비 7기가 있다.




2016.10.26 금호재


琴湖齋記
墓之有齋 所以追報祖先 而不忘所本者也 此固天理民彛之不容已焉 而若夫祖先啓佑 奕葉相承 貽厥有址 則後孫瞻慕之誠 得無彌永久而彌深切也哉 昔吾宗人金氏之盛也 有判書愼黙齋公 以名宦赫業 有聞於世一傳而有奉常公之立朝廉直 再傳而有珍原公之莅縣淸白 三四傳而有將士公 及集賢殿參奉公之聯世門蔭焉 四世堂斧之封 皆在府東白月山麓琴山下東湖之上 魚大諫灌圃公題墓道稱揭之 事載州誌 盖金氏之自京居昌原 自珍原公始 而數世之後 移卜金山或仍守舊土 又分布域中諸郡 以十月上丁 共修歲事于此 率歲爲常 方奠掃之際俛仰眺望 則封樹之嚴 儀衛之盛 閱屢百載 歷歷如作日事 陟降昭明 焄蒿悽愴 觸境肹蠁能不爲愀然如 僾然如者乎 判書公 雖墓不在是而實以始基開業之祖 爲來裔所畢霑滋蔭 則以之一体致慕 而歲一際之者 信乎得情文之允合矣 舊無齊宿之所 往在甲子 後孫鍾乃 琪永 鍾顥 以門長老之命 協謀図功 相地于神扉之側而建屋 爲制頗宏緻 門堂庖庫以次就焉 卽琴湖齋是也 於是 洞府改觀 湖山呈秀藏器視濯 各中儀節講親修睦 益敦倫叙 全門傾否之象 於斯可卜 苟非孝思之悅豫先塋 豈有是也 日洪水 琪英 鉉東 榮龍 屬余記其事 余固知不敢 而顧義有所不容自外者 以其爲百世之親也 抑又有一說焉 西南數弓許 越嶝一區 卽所謂琴山者而乃吾家山夜也 翰苑祖以下屢世之封 亦在同原 琴吾把作同調之譜 湖吾視爲一源之水 理餘韻而共和 合分流而會同 則百世之遠 乃一人之身之近耳 詩曰 毋遠伊邇 未知諸宗氏 倘首肯否乎 於其歸申以問之
壬申 霜降節 宗後生 盆城 金柄璘 謹記


금호재기(琴湖齋記)
묘역에 재실이 있는 것은 선조를 추원하여 보답하고 그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하늘의 이치와 백성들의 올바른 윤리가 쉽게 그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선조께서 서로 도우면 대대로 서로 이어져 그 터를 남기게 되니 후손의 우러러 그리워하는 정성이 영원하고도 깊고 절실함을 얻지 않겠는가.
옛날 우리 종중의 김씨가 성대할 때 판서 신묵재공(愼黙齋公)께서 명예로운 벼슬을 하고 그 덕업이 빛나 세상에 이름이 났다. 다음 대에 봉상공(奉常公)께서 조정에 서서 청렴하고 곧았다. 2대를 넘어 진원공(珍原公)은 현감으로 청백리에 올랐고 3~4대를 내려와 장사공(將士公)과 집현전(集賢殿) 참봉공(參奉公)은 연이어 가문에 음덕을 내렸다. 4세 묘당(廟堂)에 봉한 분들은 모두 부(府)의 동쪽 백월산(白月山) 기슭 금산(琴山) 아래 동호(東湖)가 있다. 대간(大諫) 어간포공(魚灌圃公)이 묘도비에 칭송을 다하였고 이 일은 읍지에 실려 있다.
대개 김씨는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와 진원공을 시작으로 수백대를 내려와 금산(金山)으로 이주를 하였고 혹은 옛 땅을 그대로 지키고 혹은 영남의 여러 마을에 분포하였다.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모두 함께 세사를 드리는데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았다. 제사를 드리고 재계를 할 때 아래 위로 쳐다보면 높이 쌓은 무덤과 묘표의 엄숙함과 의례와 위의의 성대함이 수백년을 지나도 그 또렷함이 엊그제의 일 같도다. 신의 오르내림이 밝고 향불이 오르는 모습이 처량하니 그 경계 접하니 그 울림이 천지에 가득하니 능히 슬퍼하지 않으며 아련해 하지 않으리오. 판서공의 묘는 비록 여기에 없지만 실제 업을 열기 시작한 조상으로써 후손이 그 은혜와 음덕을 입었으므로 그 모든 것을 지극히 연모하고 일년에 한번 제사를 올리는 것은 그 내용과 형식에 크게 화합하는 것이다.
옛날에 재실이 없었던바 지난 갑자년에 후손인 종내(鍾乃), 기영(琪永), 종호(鍾顥)가 문중 장로들의 명으로 계획하고 공사할 것을 모여서 의논하여 묘당 가까이에 집을 세우게 되니 그 규모가 자못 크고도 아름다웠다. 문과 묘당과 부엌 창고 등이 차례로 갖추어 지니 금호재(琴湖齋)가 이것 이다. 이에 고을의 모습이 새로워지고 산천이 그 정기가 빼어나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되어 각기 예의와 절도에 맞고 강학하고 화목하게 되어 더욱 윤리와 차례가 돈독해졌다. 온 가문의 기울어진 형상이 모두 이옷에 점쳐지니 진실로 효성스런 생각으로 조상들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하루는 홍수(洪水), 기영(琪英), 현동(鉉東), 영룡(榮龍) 등이 나에게 이일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그 의리상 스스로 외면할 수 없는 면이 있는데 오랜 세월 친밀한 집안이고 한원조(翰苑祖) 이하 여러 대의 무덤이 모두 같은 산자락에 있다. 거문고는 곧 내가 잡아 같은 곡조의 악보를 지은 것이고 호수는 내가 보아 한 근원의 맥이 되는 것이니 이치의 여운이 같이 올려 갈라진 유파를 합하여 함께 모이면 백세대의 아득한 먼 거리가 모두 한사람의 몸과 같이 가까워 질 것이다. 시경에 어머니는 멀ㄹ고 저는 가까우니라고 하였으니 모르겠도다. 여러 종중의 어른들이 수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그 돌아가는 곳에서 그 질문을 그대로 하리라.
임신(壬申)년 가을에 종족의 후손인 분성(盆城) 김병린(金柄璘)이 삼가 쓰다.




측면에서 본 금호재


琴湖齋上樑文-원문

 述夫愼風水筮幽宅先世之軆魄賴以安虔香火立明宮后昆之誠力庶乎竭玆焉 致愛致愨是曰肯構肯堂恭惟愼默齋金公盆城世家麗代卿輔英材卓越早登崧 陽間席之前名位爀烜際遇漢社定鼎之后繼以奉常老蒙殊異之聖恩况復珍原公得淸白之輿誦六友亭之淸德克趾美而有聲三適堂之宏猷遹追謨而無替 生而承蔭聯世沒而托軆同岡骨肉相依必有氣脉之流注堂斧竝附便同昭穆之 成行儀衛壯麗螭首龜趺閱百千㥘謹守不泐樽俎潔淸牲酒魚麵垂四百載孝思 無窮只欠數畒之宮自先世而經紀苟艱一夜之宿孰非孫而咨嗟詢宗族而合力 殫心咸歸追遠之厚命匠氏而獻圖敦事那無不日之成大祝奉禮之廳且寬且大 兩序堂廡之屬不儉不奢東阼西階宗支之升降威儀秩秩凉軒燠室工倕之裁度 規模恢恢春而雨秋而霜君子履之必怵愴聽于戶見于位精英降之若監歆睠彼 舊居山南之桑梓維敬薦此新物湖上之蘋藻尙存敢陳邪許之呼庸替斯干之頌 兒郞偉拋樑東扶桑初日入簾櫳晨興灑掃衣冠整齊肅身心問主翁兒郞偉拋樑

西月山磅礴與天齊巨靈亭毒流金峽所以堪輿術不迷兒郞偉拋樑南石橋蘆荻 碧毿毿當年杖屨逍遙地尙有精輝懷不堪兒郞偉拋樑北遙瞻衆曜拱辰極一家 連附戚臣班父詔子賢無忝德兒郞偉拋樑上滿阡楸檜春無恙精靈陟降山之阿 能使諸神暗護養兒郞偉拋樑下門前湖水澄而瀉一源千派逝如斯試看諸孫同 祖也伏願上樑之后百靈撝噤萬福騈臻地勢維持等岡陵之久棟宇鞏固如盤石 之安薦歲事用上丁夙夜兢兢業業匪懈念爾祖修厥德百世繼繼承承彌昌

歲壬申至月 上澣 商山 金相頊 記


금호재상량문-해문

말하노니 풍수를 가려 삼가고 묘지 터를 신중히 점치는 것은 선대 조상의 몸과 영혼이 편안케 함이다. 제사를 정성드려 모시고 묘당을 세우는 것은 후손이 정성으로 힘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지극한 사랑과 정성인가. 이것은 조상의 사업을 자손이 이어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건대 판서 신묵재(愼默齋) 김공(金公)은 분성(盆城)의 대를 이은 집이다. 나라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과 영재가 탁월하여 일찍 우뚝한 자리에 올랐다. 명성과 지위가 빛나니 한(漢)나라 도읍을 정했을 때의 즈음에 이르렀다. 조상을 계승하고 받들어 특히 임금님의 특별한 성은을 입었다. 진원공(珍原公)께서 청백리로 칭송을 받은 것과 육우정(六友亭)의 맑은 덕이 지극히 아름답고 명성이 있는 것과 삼적당(三適堂)의 웅장함을 좇아 추모하며 그 제사가 빠짐이 없는 것 등은 살아서는 그 음덕을 이어 대대로 이어주고 죽어서는 몸을 같은 언덕에 의탁하는 것이니 골육이 서로 의지하는 하는 것은 반드시 기맥의 흐름이 있는 것이다.
묘당과 사당이 두루 갖추어지고 소목(昭穆)이 차례를 이루었다. 의례와 위의가 정제되고 비석에 용머리와 거북 기대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삼가 지켜져 깎이지 않았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동안 정성스런 재물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40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효성스런 정성은 끝이 없도다. 다만 몇 칸의 재실이 없이 몇 대를 내려와 하룻밤 잠자고 재계하는 것도 어려 우니 어떤 자손이 탄식하지 않으리오. 종중에 의논하고 힘을 합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설계도를 올리게 하고 마음을 다하여 모두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올리니 이 돈독한 일이 어찌 조만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리. 제사를 드리고 예를 받드는 재실이 또한 넓고도 넉넉하다. 양쪽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지으니 너무 소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도다. 동쪽과 서쪽의 층계를 종중의 종파와 지파가 오르내리니 그 의의가 아름답다. 탁 트인 지붕과 온아한 방들은 장인의 손을 따라 지어져 그 제도와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봄비 가을 서리를 군자들이 밟아 가면 반드시 놀라고도 공손할 것이다. 들어서면서 듣고, 자리에 서서 본다면 정령이 내려오는 것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분명하리라. 저 옛 살던 곳 산 남쪽의 고향을 보면 오로지 공경스러울 것이다. 이 새로운 재물을 올리는데 물가의 소박한 채소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감히 ‘아허차’ 하는 소리를 펼치고 다음으로 ‘어랑차’하는 노래를 지어 본다.
어랑차 들보를 동으로 던져라. 동해의 아침 주렴으로 들어오니 새벽에 일어나 씻고 쓸고 의관 갖추고 심신을 깨끗이 하여 조물주에 기도하라.
어랑차 들보를 서편으로 던져라. 월산은 높고 높아 하늘에 닿았고 큰영령 빼어나 금협(金峽)으로 흐르니 천지가 미혹되지 않게 이어지는 까닭이리라.
어랑차 들보를 남으로 던져라. 돌다리 갈대꽃 푸르고 아득한 곳 당시 막대 짚고 소요하던 곳이니 그 정신 남았으니 그리움 더하네.
어랑차 들보를 북으로 던져라. 아득히 별들 보니 북극성 둘렀고 한 집안 사람 모두 신하의 반열로 이어 지네 어버이 밝고 자식 어질어 덕을 더럽히지 않네.
어랑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언덕 가득 오동 솔 봄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정령이 산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여러 신들이 암암리 보호하고 길러주리.
어랑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문 앞의 호수는 맑고도 맑은데 한 근원의 수만 갈래 흘러감이 이렇듯이 여러 자손들이 모두 같은 조상인 것을 보는 듯.
엎드려 바란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온갖 영령 위로하고 만 가지 복 생겨나서 땅의 힘 유지되어 언덕배기 오래 가듯 재실이 공고하여 경석 같이 안정되어 제사를 올릴 때 윗사람 아랫사람 새벽이고 밤이고 전전궁궁 열심히 하고 게으름이 없이하여 이 조상 큰 덕 닦은 것을 생각하여 영원토록 이어져 창성하게 하소서.
임신년(1932) 동짓달(음력 11월) 상한 상산 김상욱 삼가 씀.




금호재 편액



제단비군



금호재 밖 입구에 세운 제단비



동쪽 구릉에 자리한 선조 묘



불비공의 묘소와 비석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 금호재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창원대학교 박물관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