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내서읍 상곡리 성주이씨 읍산재 揖山齋

천부인권 2018. 4. 7. 09:47



2017.1.18. 내서읍 상곡리 읍산재


창원시 내서읍 상곡리 14-5에 위치한 읍산재(揖山齋)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 이순유(李純由)를 비롯한 선조들의 덕을 추모하여 후손들의 중론을 모아 이상화(李相華)가 건립한 재실이다. 또 그 뒤쪽에는 상곡에 살았던 이원순(李元淳)이 고종(高宗)이 서거하자 애도하며 통곡했던 곳에 아들 이상화(李相華)가 아버지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37년에 비(碑)와 대(臺)를 세우고 서대(西臺)라 이름 했다.






揖山齋記
匡廬山一支磅礡嵂凡 西顧北走 如勇將健夫 拔劍執戟 奮揚作氣勢走未十里 伏而又起 淑氣亭毒 如龍盤而 虎蹲者 一山也山之下 有谷繚而曲深且郭 含烟雲桃李花竹藏鳥獸牢籠百熊者 揖谷也 又有巨川 發源於匡山之下 千回萬轉 收衆壑而北流 滾滾㶁㶁 至于揖山之前 泓涵渟濇 淸榮秀澈 善鑑萬類者 匡川也 其山川之秀麗回護處 豈不有靈且異乎 昔聞堪與眼慧者 過此而揖曰 元氣之所鍾 巨靈之所盤 有種德人居之 則子姓式繁 門戶昌大云 其後有星州李氏 之祖遯庵公 誅茅卜居 名其谷曰 揖谷矣 子孫世之 先塋俱在焉 其家風世德 爲鄕黨之所欽也 往年癸未 諸宗合議 肯構一齋于先塋密邇之地 歲時奠墓 則齊戒之於斯 或有宗事 則聚議於斯 敦叙彛倫於斯 講討文學於斯 顧今世界狂瀾倒流 域中之喬木世家 莫不淪沈 而惟揖谷李氏周守山樊 耕讀爲業 人稱家給 揖谷一區便如勳華日月 其於城市之囂塵 㥘海之風湖 無一人以觸形而動心者 此奚遜於李愿之盤谷也耶 今其後孫相華 尤切慕先之志 役是齋而殫盡心力 終成輪奐之美 誠矣哉 齋以揖山者因其地而名之 盖示不忘於祖先也 夫子孫之不忘本者 人倫之常天性之彛也 然人人不能盡其倫性 故孟子曰 人小則慕父母 知好色則慕小艾 凡人隨處移心 故孟子所以發此語也嗟乎 終身慕父母者 尙此鮮矣 況於祖先有沒世不忘者乎 居是齋而顧名思義 不忘其本 能盡其人倫之常 天性之彛 盡可謂揖山齋之名實相符也 豈亶以揖谷中烟雲花竹鳥獸 爲景物役而已哉 齋後有西臺 相華君先君子小廬公元淳 哀吾王之賓天 登臺痛哭 不勝風泉之感 其炳炳朗朗低名 節足以使人興起故幷爲之記
周哲會 撰


읍산재기(揖山齋記)
광려산(匡廬山) 한 가지가 뒤엉키며 우뚝 솟아 서쪽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내달으니 마치 용맹한 장수나 굳센 장정이 칼을 뽑아들고 창을 세워 그 기세를 뽐내는 듯하다. 십리를 못달려 다시 숙였다가 또 일어나니 조용한 기운 머물러 크지는 것이 마치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버티고 앉은 듯하며 하나의 산이 되었다. 산의 아래에는 골짜기가 감돌아 깊고도 높으니 아름다운 구름을 머금고 복사꽃 대숲에 짐승들이 깃들어 온갖 자태를 머금었으니 이곳이 읍산(揖山)이다. 다시 큰 하천이 흐르는데 광려산에서 발원하여 천만번 굽이쳐서 수많은 골짜기 물을 모아 북쪽으로 흐른다. 질펀하고 호탕하게 흘러 읍산 앞에 이르면 고요하게 감돌아 머무니 맑은 여울이 바닥까지 보이니 좋은 거울에 온 만상이 비치는 듯하니 이것이 광천(匡川)이다. 그 산천의 수려함이 감돌아 보호하는 곳에 어찌 신령스러움과 신이함이 없겠는가. 들으니 옛날에 천지에 지혜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읍하고 말하기를 “원기(元氣)의 중심이 되고 거대한 신령이 서린 곳이니 덕을 닦은 사람이 이곳에 살면 자손이 번성할 것이고 문호가 창성하고 크질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그 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조상인 둔암공(遯庵公)이 띠집을 짓고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읍곡(揖谷)이라 하였다. 자손들이 대대로 이어지고 선조들의 무덤이 모두 이곳에 있게 되니 그 가풍(家風)과 대대로 이어지는 덕에 온 고을이 흠모하는 바가 되었다.
지난 계미(癸未)에 여러 종중이 합의하여 선조의 묘역 아주 가까운 곳에 재실을 지어 세시(歲時) 때 묘사를 지내면서 이곳에서 재계를 하고 혹 집안의 일이 있을 때 이곳에 모여 의논하고 또 이곳에서 집안의 질서와 윤리를 올바르게 하고 학문을 강학하고 토론하려고 하였다. 지금 세계의 광란과 잘못된 유행으로 온 고을의 오래된 집안조차 침윤되어 가라앉지 않음이 없는데 오직 읍곡의 이씨들은 산에 일하며 수양하고 들일을 하면서 독서하는 업을 굳게 지키고 사람들은 온화하고 집안은 넉넉하니 읍곡의 한 마을이 마치 요순시절과 같으니 일반 시중의 속된 기운과 거친 신문명의 물결에도 어느 한 사람도 오염되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이 어찌 이원(李愿)이 반곡(盤谷)으로 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 후손 상화(相華)가 더욱 간절히 선조를 추모하는 뜻이 있어 이 재실을 짓는데 마음과 힘을 다 쏟아 끝내 크고 빛나는 아름다운 재실을 이루었으니 그 정성이 크다.
재실을 ‘읍산(揖山)’이라고 한 것은 그 지명을 따른 것이고 선조를 잊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릇 자손이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인륜의 일상적인 도리이며 하늘이 내린 본성의 떳떳함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능히 그 윤리와 본성을 다하지 못하는 까닭에 맹자께서 “사람이 어릴 때는 부모를 연모하지만 색을 좋아함을 알게 되면 여자를 좋아하게 된다.”고 하셨으니 무릇 사람은 처하는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까닭에 맹자께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아아! 평생 부모를 연모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문 것인데 하물며 선조가 돌아가신 뒤 대대로 잊지 않음이겠는가. 이 재실에 와서 그 이름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하고 그 근본을 잊지 않으면 능히 인륜의 일상적 도리와 천성의 떳떳함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니 읍산재의 이름과 실로 부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읍곡의 안개와 구름 꽃과 대나무, 짐승들이 어찌 다만 경물의 역할 뿐이겠는가. 재실 뒤에 서대(西臺)가 있는데 상화군의 부친이신 소려공(小廬公) 원순(元淳)과 나의 왕고(王考)이신 보천(寶天)께서 이곳에 올라 통곡하며 조상을 그리워하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빛나고도 맑은 명분과 절개를 갖추고 있으니 족히 사람들의 감흥을 일으킬만 하다 이에 아울러 기문을 쓴다.
주철회(周哲會) 쓰다.


[출처 및 참조]
창원디지털문화대전-상곡마을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




읍산재 뒤쪽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