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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봉곡동 밀양박씨 화목재 花木齋

천부인권 2018. 4. 9. 06:57



2018.3.28. 창원시 봉곡동 밀양박씨의 화목재(花木齋) 모습


창원공단이 들어서기 전에 화목재(花木齋)는 창원시 웅남면 목리에 있던 밀양박씨의 재실이었지만 지금은 창원시 봉곡동 167-16번지에 이건했다.
박진영(朴震英)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웅남면 목리에 정착하면서 밀양박씨의 창원 입향조가 되었고 그 후손 박영주 등이 화목재(花木齋)를 지어 조상들의 혼백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화목재 대문에 걸린 여재문(如在門) 편액은 백당 정기헌 선생의 글이다.




담장 넘어로 본 화목재




화목재기(花木齋記)
창원의 목리(木里)는 박씨(朴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선대에 모은(慕隱) 박진영(朴震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별세한 후에는 마을 뒤 화산(花山)에 장사하였고 배(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성공(文成公)의 후예이며 곁에 장사 지냈다. 지금 그 후손 영주(英周), 건선(健善), 기종(其宗), 기영(其榮), 기병(其炳), 기석(其碩), 기숙(其琡), 기진(其軫), 기웅(其熊), 종도(鍾道), 종석(鍾石), 천호(千浩) 등이 그 어른들 및 종족들과 재실을 지어 영령(英靈)과 혼백(魂魄)들이 가까이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사람들이 기거하고 음식으로 서로 접대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의논 하였다. 이에 산과 마을의 이름을 따서 편액(扁額)을 화목재(花木齋)라하고 기영(其榮) 기병(其炳)을 보내니 멀리 찾아와 문 위에 붙일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당시 내가 상복을 입은 기간이라 이 일이 진실로 어려웠다.
옛날 도를 닦는 집안 자손들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들 화목(花木)이라고 하였는데 박씨 집안 고향의 구릉(丘陵)이 우연히 그 이름인 것이다. 사물의 우연이라는 것은 반드시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연을 맞이할 운수에 이르러서 그러한 것이다. 자손의 본성이 올바른 것과 무릇 조상의 음덕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은 또한 비슷한 기맥이 어진 것을 친하고 어진 사람을 존중하는 이치에 감응하여 통하는 것이다. 내 이미 말로 그것을 징험할 수 없지만 꽃을 재배하고 나무를 심는 방도로 말하려 한다. 종자의 근본이 아름답고 반드시 그 기후를 다스리면 그 종목 종목은 이미 구별된다. 반드시 그 토양을 두텁게 한 뒤에 뿌리가 잘 펼쳐지고 꽃이 무성하다. 종중을 돈독하게 하고 가족을 질서정연하게 하면 마을이 다스려질 것이다. 조상에 보답하고 덕을 드러냄은 토양이 두터운 것이다. 박씨는 대대로 이러한 의(義)를 얻음이 있었으므로 신(神)이 안정되고 도는 형통(亨通)하고 이치가 순해지고 기맥이 화창해져 한 고을 화목에 길이 봄바람이 불 것이다.
손후익(孫厚翼) 삼가 쓰다.


花木齋記
昌原之木里 朴氏之居也 先世有慕隱諱震英 始宅于玆 歿而墓于里後之花山 配順興安氏 文成公之後 繼葬焉 今其後孫英周 健善 其宗 其榮 其炳 其碩 其琡 其軫 其熊 鍾道 鍾石 千浩等 謀父老宗族 置齊宿之舍靈魄密邇於陟降 而生人之 起居飮食相接 取山與里之名 扁之曰花木齋 送其榮 其炳 涉遠要余記其楣 當此故常弁髦之時 而玆事誠難矣 昔之道人家子孫之美 多稱花木 而朴氏之桑梓丘壟 偶然而遇 夫事物之偶然者 必有不偶然之道 寓於偶然之數 而子孫之天衷誘發於陰隲者 亦氣類之 有所感通於仁親尊賢之理也歟 余旣無以徵言者 請言栽花種木之方 種子之本嘉 而必治其候 區區已別矣 必厚其工壤 然後本茂義花繁 敦族叙族區之治也 報事象德 壤之厚也 朴氏世世 有終於斯義 則神安道亨 理純氣暢一巷花木 長對春風也
孫厚翼 撰
昌原市 熊南洞 木理里 所在 密城朴氏齋室


화목재상량문(花木齋上樑文)
나무가 마을을 감싸고 꽃이 산을 덮으니 재실에 그것을 합하여 화목(花木)이라 하였다. 조상이 산이 되고 후손이 마을을 이루어 그 기맥이 감응하니 조상과 자손이다. 조상의 업을 계승하고 경영하여 몇 년이 지나 그것이 들어날 날이 몇 일 남지 않았다.
생각건대 밀성박씨(密城朴氏)는 실로 해동의 이름난 가문이다. 골포(骨浦)에 들어와 머무른지 수십 세대가 지나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포구 가까운 곳에 별이 늘어선 것같이 수백 집이 숲같이 총총히 들어섰고 수많은 조상들과 후손들은 수를 헤일 수 없이 많으며 높은 벼슬과 명성을 날린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은 두루 다 아는 사실이다. 저 화산의 봉우리를 다듬어 예부터 조상 대대의 장례를 지내니 좌측은 소(昭)를 배열시키고 우측은 목(穆)을 배열시켰으니 이들이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다. 비석을 세우니 관직과 품계가 드러났다. 그러나 600년 제사를 받드는 동안 서너 칸의 재계하고 잠잘 재실을 짓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직 본가가 당연함을 잃은 것이겠는가. 이 모두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고 애석해 할 것이다. 주작(朱雀)과 현무(玄武)가 있는 남북의 지세(地勢)를 가운데로 하여 자리를 펼치고 돌을 옮기고 재복을 사들여 자손등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창한 것이다. 부엌의 위치는 제자리를 잡고 가히 제사의 음식을 정결히 마련할 만하고 뜰과 문이 제자리를 분명히 잡으니 손님과 주인이 예의를 지키기 알맞게 되었다.. 이것이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즐거움이 아니라 조상을 존중하고 종족이 화목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니 정성을 드리면 드러나게 되고 사랑하면 존재하게 되니 영령과 혼백이 아련히 들어왔다가 엄숙히 나가는 것을 보는 것 같으니 자손들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재실에 모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일이 빠짐이 없으니 두 곳에 모두 선조들의 기반과 후손의 터전을 크게 열었으니 들보 올리는 일을 도우려 감히 짧은 가락을 시험한다.
어랑차 들보를 동으로 올려라. 정병산(精兵山) 위로 새벽해 붉고 태양신 넓은 빛살 새벽을 넘어선 듯 그 행로 지금 다 말 못하리.
어랑차 들보를 남으로 던져라. 장산(長山)의 봄빛은 남빛처럼 푸른데 두호(斗湖)의 남긴 자취 책 속에 남았네 그 속에 바다를 담은 줄 누가 알리오.
어랑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라. 회원(檜原)의 옛터에 풀빛이 무성한데 잔 띄운 계곡물 몇 년이나 된 일인가 온통 푸른 하늘빛 바다와 같아.
어랑차 들보를 북으로 던져라. 천주산(天柱山) 푸른색 태고적 그대로인데 영롱히 연마한 돌 글씨 남아 있으니 여와의 솜씨는 진정 알기 힘들어.
어랑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별과 달 총총히 푸른 빛 쏟아내고 이 땅의 모든 생명 모두 눈 아래이고 바람에 휘파람부니 기상이 상쾌하네.
어랑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질펀히 흐르는 물 쉬지 않으니 아무리 작더라도 어찌 가벼이 하리 끝내 바다로 가서 파도가 되거니.
업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뒤에 꽃빛은 더 곱고 나무뿌리 더욱 굳세어 대대로 부귀롭고 복과 은택으로 우리 삶 더 두터워지고 사람마다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화목하여 반드시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가 두터워질 것이다.
정종호 삼가 짓다.


花木齋上樑文
里以木山以花合以齋曰花木 祖以山孫以里感以氣者祖孫 繼之營之有年輪焉奐焉不日 恭惟密城朴氏 實爲海東名家 入骨浦而雲屯累十世繩繩繼 繼近海門而星列數百冡林林叢叢 烈魄肖孫焉用車載而斗量 高困長緩不可僂計而周知 截彼花山之峰 自來世葬之地 左昭而右穆便是父子祖孫 龜頭而螭跌乃見 官職品秩 然而六百年祭享之供 不遑四三棟齊宿之堂 豈惟本家之失當均行路之嗟惜 朱崔玄武南北之 地勢中寬 運石輸材姓孫之心力幷昌 廚庖之位置正直可合蘋藻潔蠲 庭戶之折旋分明不悖賓主揖讓 此非吟風弄月之可樂 果是尊祖睦族之所由慤 則箸愛則存 如見靈魄僾然入肅然出盡是雲仍 歷千禩而無愆齋舍之蒐歲事之謹 合兩地而肇錫祖先之兆後孫之居 爲助脩樑 敢試短引 兒郞偉抛樑東 精兵山岳曉暾紅明翁大陳如晨隔 行旅至今說不窮 兒郞偉抛樑南 長山春色碧如藍 斗湖遺蹟藏書在 誰識其中有海涵 兒郞偉抛樑西 檜原墟畔草凄凄 流觴曲水何年事 一碧天光海與齊 兒郞偉抛樑北 天柱蒼蒼太古色 錬石玲瓏今尙文 女媧手段誠難測 兒郞偉抛樑上 星月垂垂碧落曠 大地羣生皆眼底 臨風一嘯氣豪爽 兒郞偉抛樑下 汨汨溪流流不舍 雖小那能輕忽之 終歸入海波濤者 伏願上樑之後 花色增鮮 根本益固 世世富貴福澤將厚吾之生 人人孝友睦婣必敬天之道
鄭宗鎬 撰
昌原市 熊南洞 木洞 所在 密城朴氏齋室




화목재(花木齋) 편액 백당선생 글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