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동읍 곡목마을 김해김씨 용계서당 龍溪書堂

천부인권 2018. 4. 13. 08:56



2010.7.20. 곡목마을 용계서당


의창구 동읍 동읍로401번길 64는 조선 말기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해김씨 눌재 김병린(金柄璘)이 만년인 1935년 강학과 수양을 목적으로 건립한 용계서당(龍溪書堂)이 있는 곳이다. 용계서당은 대문인 이정문(履正門)과 본당이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이며, 평면 형태는 대청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좌측에 있는 온돌방은 겸산(兼山)이라 하였고, 우측에 있는 온돌방은 여택(麗澤)이라 하였다. 기단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상단의 한 단은 들여쌓기를 하여 이 중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문에 붙은 이정문(履正門) 편액




용계서당기(龍溪書堂記)
옛날 내가 모시던 조심재(曺深齋) 옹께서는 항상 남쪽 지방의 산천을 유람하셨다. 매번 술을 먹으면 만취하여 헤어지니 남쪽 지방의 지난 일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또 일찍이 한번 탄식하여 말했다. 우리 남방 유학의 계통을 네가 어찌 적실하게 알겠는가? 도산(陶山) 이부자(李夫子)께서 우뚝히 유학의 종주가 된 이래로부터 이대산(李大山) 선생이 있었고, 유정재(柳定齋) 선생이 있었고, 최후에는 김서산(金西山)과 이만구(李晩求) 선생 등이 있었다. 나는 그에 비슷하지도 못하고 서산의 문하에 족적을 의탁하고 이만구 선생의 자리 아래에서 더욱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지금 회산(檜山)의 김눌재(金訥齋) 옹은 실로 만구 선생의 뛰어난 제자이다. 배움에 있어 나와 나란히 하였으나 나이(齒)나 덕행은 모두 나의 형이 되니 내가 감히 벗으로 여기지 못하였다. 내 한번 그 집에 들렀다가 그 정수와 광채를 보니 한 고을의 장로(長老)가 될 만 하였다. 큰 과일은 오히려 먹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 세상을 되돌아보니 오직 큰 과일은 바로 이 노인뿐인 것이니 내 그를 위하여 행동을 삼가고 옷깃을 여미었다.
때로 스스로 생각키로 나이와 학문이 모두 얕고 말과 행동이 모두 어긋나므로 눌재의 생각을 감당할 수 없을까를 두려워하였고 드디어 양보하고 불러나 앉은지 오래다. 그 전에 이미 전에부터 알던 젊은 벗인 안붕언(安朋彦) 군과는 사귐이 깊고 말이 갈수록 깊어서 그 사람됨을 더욱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그 스승 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눌재”라고 답하였다. 뒤에 안군이 눌재옹의 뛰어난 아들인 종하(鍾河)군과 함께 서울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였는데 그 자제 역시 재주와 학문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어섰다. 이때에 돌아간 뒤 두 젊은 벗의 편지가 1년에 반드시 두세번은 있었고 때로는 달마다 빈번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내 비록 눌재옹의 덕행과 용모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스승과 벗 그리고 자제를 보면 이미 그 사람을 상세히 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 내 비록 양보하고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그 그리워하는 정성은 또한 스스로 살피건데 다른 사람에 못지않다고 할 것이다. 최후에 이현섭(李鉉燮)씨와 배문회(裵文會)씨 김종길(金鍾吉)씨 등이 연이은 편지로 나에게 용계서당(龍溪書堂)의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이곳은 눌재옹이 만년에 강학하고 수양하던 곳이다.
수백명의 문하 제자들이 마음을 한결같이 합하여 몇 년이 지날수록 자금이 몇 천으로 불어났고 건물을 지은지 1년이지나 드디어 갑술(甲戌) 겨울에 완성되었다. 그 자리는 구룡산(九龍山) 동쪽 화목동(花木洞) 가장자리이다. 기와집이 다섯 칸에 네 채이고 동서에 각각 한 채로 되어 집도 되고 행랑 되니 집은 이름을 겸산(兼山)이라 하고 행랑은 여택(麗澤)이라 하였다. 가운데 둘은 일을 주관하는 곳으로 삼고 남쪽에 따로 문과 문의 지붕을 올렸다. 문의 이름은 이정(履正)이라 하고 전체의 이름을 ‘용계서당’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중당(中堂)에 편액 하였다. 그 일을 총괄한 것은 실로 눌재옹의 집안  사람인 진하(振河) 군의 힘이 거의 대부분이다. 글과 말이 아름답고 칭송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가득하고 읍하고 양보하며 주선하는데 여러 번 읽어도 싫지 않으니 눌재옹께서 놀지 않았다면 스스로 이러한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동이 일어나 정신이 남으로 향한지 오래되었고 하고 싶은 말들도 많았다. 그 큰 것을 도모하는 자는 스스로 궁벽함이 있으면 홀로 달통하게 하는데 그것을 겸하면 말이 있게 된다. 천하의 선비들이 두 가지 길에서 판단하니 이것이 그 중 한 갈래의 말이다. 만약 눌재옹이라면 과연 어떠한 궁벽함과 달통함이 있을까?
내가 듣기로 눌재옹은 효도와 우애가 본성을 따라 이루어졌고 문장과 덕행이 몸에서 빛났다. 기강을 바로잡을 책임이 없지 않으나 엄영히 군주와 목민관의 교화가 있었다. 솔바람 대바람 소리가 나는 곳에 궁궐이 있으면 그 소리가 멀리 호수와 바닷가에까지 미치니 그 행동과 일들을 생각하며 어찌 오직 홀로 선할 뿐이겠는가. 또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선하려는 도리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계서당은 주역의 건괘(乾卦) 92를 이용한 것이니 비록 보시(報施)의 터전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을해 정월 14일 밀성후인 변영만(卞榮晩) 삼가 쓰다.


龍溪書堂記
向余之陪故曺翁深齋 而尋常作南中海山之遊也 每當酒闌人散 多得聞南中往事 且記嘗一喟然曰 吾南儒學之統 子豈的知之乎 自陶山李夫子 屹然爲聖學宗匠以來 有李大山先生焉 有柳定齋先生焉 最後 有金西山 李晩求諸先生焉 卽吾無 似亦托跡於西山之門 而請益於晩求之席者也 如今檜山之訥齋金翁 實晩求先生之高弟 而於學 與余爲鴈行 於齒與德 乎則皆爲吾見 吾不敢友焉 子盍同吾一至其廬 以望見其精光乎 爲一方之長老 而如碩果之不食 計此世 惟此翁在耳 余爲之動容歛袵 時竊自惟年學皆淺 言動俱舛 恐無以當訥翁意也 則遂遜縮而罷 旣而 與前知少友 安君朋彦 交益密語益深 益奇其爲人 徐問其所師有人乎未 則乃始以訥翁答焉 後此而安君 挈翁喆嗣鍾河君 爲一訪余京寓中 則嗣君 亦才學翩翩人也 自是以還 兩少友之書 不能一歲而無三再 時或月荐至焉 盖余雖 未覿訥翁之德容 而於其師友子弟 不可謂非己得其詳矣 雖曾孫縮而不敢前 其慕用之誠 亦自審不遽在人下也 最後 有李氏鉉燮 裵氏文會 金氏鍾吉 聯書以請其記龍溪書堂者 則乃訥翁晩暮藏修之所 而數百門弟 所齊心合廬 費歲逾紀 儲鈔倍千 營建一載 而遂以甲戌之冬 告成焉者也 据地爲九龍山東花木洞畔 瓦覆凡五楹四架 東西各一架 爲室爲軒 室名兼山 軒號麗澤 中二爲廳事 南別有門屋 門名履正 而總名之曰 龍溪書堂 此則額於中堂者也 董其役者 實翁族子振河君之力 居多焉書辭典 雅稱喩冲遠 揖讓周旋 非遊於訥翁者 自不有此也 余感歎而起 南向神往者爲久 而所欲言者多矣 第擧其大者 自有窮獨澾兼之語來 天下之士 判御二途 是一往之譚耳 如訥齋翁 果何有於窮達渽 以吾所聞翁 孝友成於性 文德煥乎躬 毛無紀綱之責 而儼有君牧之化 宮於松篁之間 而聲被湖海之上 考其行事 寧詎獨獨善而己乎哉 亦其兼善之道 有存焉於其間者矣 然則龍溪之堂 用易乾之九二 雖直謂爲普施之田無不可也是爲記
乙亥正月十四日 密城 後人 卞榮晩 謹書
昌原市 東邑 曲木里 所在 金海金氏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용계서당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