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 의창구 동읍 화양리 451번지는 김해김씨 김귀(金龜)의 유덕을 기리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도남서원은 향사나 강학보다 후손의 화합을 목적으로 1980년에 건설되었다. 이때 사당(祠堂)인 구봉사(九峰祠)도 함께 건립했다. 도남서원과 구봉사(九峰祠)는 약 3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각각 독립된 형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도남서원은 정문인 불사문(不舍門)과 강당으로 이루어졌으며, 강당은 정면 4칸에 유리문을 덧댄 현대식 건물이다. 구봉사(九峰祠)는 정면 3칸으로 일반 가옥의 대문과 같은 출입문은 유정문(由正門)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이곳에 모신 김귀(金龜)는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지만 당시 세력가인 이극돈(李克墩)의 무고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다가 창원으로 낙향한 인물이다.
道南書院記
昌原之 花木金氏之世庄也 世世以文學行誼爲嶠南望族 而有肇基之祖曰 琴山先生經學文章 負望一世位至 議政府左參贊 而以堯舜君民之志 服勤見忤於羣小海紱南下奠居 此地遂絶意仕進懷 仁由義超然於物外當世 而所與交許者 惟佔畢齋 金文忠公 濯纓 金文愍公數人 而己矣遺文遺跡相應不小 而寥寥無聞惟有畢齊之挽曰 如何經術士倏謝 聖明朝鄕閭應 雪涕墳土酒頻澆於 此而足徵先生之大槩也 歷年幾五百年之久 子姓繁衍數可 以千數而名文 巨筆間世不絶享于祠者 前有柳溪谷川兩先生 返于有訥齋先生 道學文章天振于世蔚有所不可過者於戱其盛矣守 若非先生隱德之格于神天 而神天爲之保佑之 則安能有若是也 前年士林己修崇仁契 追慕先生之風猷者深矣向 丙辰春龍溪菜儀之後 以先生之祠事士論旣定 內外相應九峰祠宇 當年而成焉道南講堂隔年 而經始之 胄孫成學代花木 全宗主動 而勞焉焦焉 龍洞派宗 漢陽貞河鍾河國會議員 晉州章河 馬山柄坤各隨力 而罄心焉龍洞柄讚勸獎之 壽河斗河正吉動力焉費 若干歲月 而事竟就成於是焉內外門欄正正堂堂 而山川爲之就聿焉旣落 成學奉趙命濟裵文準 孫永旭金正植金榮熙趙光濟聯函 而諸記於余曰 吾門不運攸 堂族叔遽作 不幸憤恨莫及吾文之所夙知者也 而吾叔棄世前幾日召成學 而警之曰 吾年近一甲 而未遂所志之 先業氣弱精襄力勵不强則君身在宗冑不無其責 且誠與勇能任其事也 幸勉强焉唯命之後夙夜不倦孜孜焉諸事之至 此者實攸堂叔之所意成 而成學之與諸宗所遂命者也 幸吾文勿辭焉余耋 而昏無以爲應 而其言之懇摯情不可 固辭則乃擧手 以頌之曰先生百世師也 先守五百年前 而慍于羣小之日雍容卑黙 如有鑄無窮之德 冥冥之中 向宇五百年後 而道南書院興威儀逮逮宇 多士陟降之際 而遺風尙巍巍焉於守先生之風山之高兮 水之長方矣爲之記
庚申五月端午節 盆城 裵文會 謹記
도남서원기(道南書院記)
창원의 화목(花木)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대대로 문학과 행의(行誼)로 교남(嶠南)지방(地方)에 명망이 높았다. 그 입향조는 금산선생(琴山先生)으로 벼슬이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러 강직한 도의로 임금을 섬기다가 이극돈(李克墩)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유배 오게 되었다. 드디어 벼슬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인의(仁義)를 보존하며 속세를 벗어나 초연히 살았다. 당시의 알고 교류한 사람들은 점필재(佔畢齋) 김문충공(金文忠公)과 탁영(濯纓) 김문민공(金文愍公) 등 몇몇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500년이 지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수가 천여명이 넘고 중간 대에 서원에 향사를 받는 사람이 유계(柳溪) 곡천(谷川) 두 분 선생이 계시고 근세에 눌재선생(訥齋先生)이 도학과 문장으로 세상에 크게 떨치어 그 울연함을 막을 수 없었다.
아! 그 성대함이여 선생의 음덕이 천지신령에 감동을 끼치고 천지신명 보우하시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지난번 병진(丙辰)년 봄에 용계서당(龍溪書堂) 석채(釋菜) 후에 금산선생 재실을 짓는 일로 공론이 이미 정해지고 내외에서 서로 도와서 구봉사우(九峰祠宇)가 그 해에 이루어졌고 도남강당(道南講堂)은 다음 해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 종손 성학(成學)이 화목(花木)의 전 종중을 대표하여 그 일을 주동하였고 용동파종(龍洞派宗)인 한양(漢陽)의 정하, 국회의원 종하(鍾河), 진주의 장하(章河), 마산의 병곤(柄坤)이 각기 그 힘에 따라 마음을 기울였다. 마산(馬山)의 상진(尙辰), 용인(龍仁)의 영원(榮元)과 용동(龍洞)의 장원(章元)과 병찬(柄讚) 두 사람이 그 일을 근장(勤獎)하고 수하(壽河), 성백(成百), 길하(吉河), 두하(斗河), 정길(正吉)이 동역(董役)을 맡았다. 약간의 세월이 지났지만 끝내 일이 성취 되었다. 이 때 안 밖으로 문과 난간이 정정당당(正正堂堂)해 졌고 산천이 엄숙하게 되었다.
낙성식에서 성학(成學)이 조명제(趙命濟) 배문준(裵文準) 손자 영욱(永旭)과 김정식(金正植) 김영희(金榮熙) 조광제(趙光濟) 등의 연서(聯書)를 받들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늙고 정신이 혼미하여 응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에 붓을 들어 송덕하였다.
선생은 백대의 스승이요 오백년 전에 먼저 나셔서 도야된 무궁한 덕이 그늘에 가려진 것 같았다. 오백년 뒤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위의(威儀)가 흥하고 성대하고 많은 선비들이 오르내릴 때에 그 남겨진 덕풍이 우뚝하고 높으니 아! 선생의 덕풍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이 흐르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경신(1980) 5월 단오절에 분성 배문회(裵文會) 삼가 기록한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도남서당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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