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형제애가 빛나는 밀양 여주이씨 삼은정 三隱亭

천부인권 2018. 4. 15. 08:02

 

2011.5.15. 밀양 부북면 퇴로리 삼은정

 

밀양시 부북면 퇴로로 279-97에는 물고기[漁], 나무[樵], 술[酒]을 숨기고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삼은정(三隱亭)이라는 고택이 있다. 삼은정은 용재(庸齋) 이명구(李命九 1852~1925)가 만년에 지은 장수소(藏修所)로 광무 8년(1904)에 창건하고 여생을 보냈던 집이다.
겸근(謙謹)한 산림아사(山林雅士)로 동소남(董召南)과 도연명(陶淵明)의 생애를 흠모하였고, 1903년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지만 행직(行職)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삼은정 기문(記文)은 그의 형 항재옹(恒齋翁) 익구(翊九)가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형제애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삼은정은 평범한 땅에 집을 지으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변모시킨 곳으로 당시 연못과 정원을 꾸미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다.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삼나무, 대왕송, 금송. 화백, 등 외래 나무를 심었는가 하면, 적송, 전나무, 편백나무, 주목나무, 배롱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회양목, 비자나무, 팽나무, 산딸나무, 명자나무, 동백나무, 무환자나무 등 흔치 않는 나무들을 심어 나무 백화점을 연상케 한다. 아마도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미래의 먹거리를 예견한 예지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은정(三隱亭) 편액
용재(庸齋) 편액

 

삼은정기(三隱亭記)
삼은정(三隱亭)은 읍의 북쪽 20리 화악산 아래 사문동(沙門洞)에 있으니 곧 내 아우 명숙(命叔)이 지은 것이다. 화악산은 실로 우리 고을의 진산(鎭山)인데 그 동쪽 한 갈래가 굼실굼실 굽이쳐 10여리를 가다가 갑자기 우뚝 높다랗게 일어선 곳을 돛대산[帆山]이라 한다. 돛대산에서 남쪽으로 몇 백 걸음 내려가 지세가 평탄하여 널따랗게 열린 골짜기가 곧 사문동이다. 옛 노인들이 전하기로는 옛날에 사찰이 있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라 하는데 시대가 아득하여 그런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명숙(命叔)이 그 땅을 얻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정자를 지을만 하다. 내가 이곳에 집을 짓고 단장하여 여생을 마치기에 충분하다.” 고 했다. 마침내 갑진년 3월에 일을 시작하여 넉달만에 낙성하였다. 그 제도는 모두 4칸으로 2칸은 방으로 하고 2칸은 거실로 하였으며 당의 앞뒤로는 모두 작은 마루를 내달았는데 다만 완성은 하되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 검소함을 밝힘이다. 매양 틈나면 나는 명숙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가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간혹 즐기다가 돌아오는 것도 잊었다.
대체로 이 정자는 비록 기묘하고 빼어난 경관은 없어도 그윽하고 고요하며 상쾌함이 절로 한 구역을 이루었고 뒤로는 높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들에 임하고 있다. 좌우로 두 봉우리가 마주 우뚝 서서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듯 하고 시냇물이 골짜기 가운데서 발원하여 숲을 뚫고 졸졸 흘러 정자 남쪽의 무논으로 넘쳐 든다. 무논은 몇 백 평이 됨직한데 연못을 파서 연을 심으려 하였으나 아직은 이루지 못하였다. 또 서쪽 헌함 아래에는 서늘한 샘물이 있어 한여름에 마시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샘물 곁에 감나무 두 세 그루를 심어 짙은 녹음이 뜰에 가득히 앉아서 더위를 피할만 하다. 동쪽으로 10여 걸음가면 밤나무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해마다 몇 섬을 거두며, 그 사이에는 봉숭아와 오얏, 매실과 살구 따위가 가지와 줄기가 서로 어울려서 무성한 과수원을 이루니 이는 깊숙한데 알맞은 것이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면 시야가 활짝 열려 사방으로 막힘이 없고 평야가 아득하고 맑은 아지랑이가 어른거려 용두(龍頭)와 마암(馬巖), 옥교(玉較) 여러 봉우리가 혹은 가까이 혹은 멀리서 잠깐 끊어졌다 곧장 일어나 모두가 기묘한 모습을 다투고 예쁜 자태를 자랑하는데 모두 책상 앞의 물건이 되었다. 김해의 무척산(無隻山)같은 것은 백리나 먼데도 안개 연기 아득한 너머로 완연히 그 자태를 드러내어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데 이는 곧 넓게 트인 곳에 알맞음이다. 유종원(柳宗元)이 이른바 노니는 데는 두 가지 적합한 것이 있다고 한 것은 이 정자의 경치가 아니겠는가! 무릇 천하 만물은 사람을 기다려 완성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산의 한 구역은 수백 년 동안 하늘과 땅이 아껴 숨겨두었다가 명숙을 기다려 그 이름을 이룬 것일까?
정자의 이름은 오래도록 확정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명숙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얻었습니다. 이 골짜기는 평소 사문(沙門)이라 일컫는데 사문은 삼음(三隱)과 음이 근사하니 삼은으로 내 정자에 편액하면 되겠습니까?”했다. 이에 내가 “삼은의 뜻은 무슨 근거인가?”라 물었더니 명숙이 말하기를 “나는 재능이 성글고 학문이 없는데다 성격 또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적어 이미 세상에 할 일이 없으니 나는 장차 아침에 산에서 나무하고 저녁에 물에서 고기 잡고 돌아와서는 섶나무를 태우고 물고기를 익혀서 술잔을 끌어다 술을 따라 도도하게 취하리니 은거의 낙은 이만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고기 잡는데 숨고, 나무하는데 숨고, 술에 숨어 모두 삼은이 됩니다. 형께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좋다! 이는 비록 명숙의 겸사(謙辭)에서 나온 것이나 처음부터 실제의 말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옛 사람도 즐겼다. 동소남(董召南)이 혹 산으로 혹 물가에 거처한 것은 고기잡이와 나무하는데 숨은 것이요 도연명(陶淵明)이 취했다가 깬 것은 술에 은거한 것이다. 이제 그대는 고기잡이를 능사로 삼지 말고, 동소남의 지극한 행실을 배우고 한갓 술잔만을 장물(長物)로 여기지 말고 도연명의 맑은 수양을 본받는다면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대는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고 부지런히 힘쓰다가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중도에 중지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자못 부지런 하고 검소하여 비록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치졸한 처지를 지키지만 마땅히 해야할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진실하게 행하여 기어코 이루고 난 뒤에 그만 둔다.그러므로 마침내 능히 관직에 나가서 침랑(寢郞)의 선발에 응하였다. 이제 또 은거할 곳을 경영하여 수양하는 장소로 삼으니 여기서 일을 생각하는 것이 주밀하고 남겨줄 계획이 원대함을 알 수 있다. 어찌 가상하지 않는가! 정자는 마을에서 멀지 않고 또한 내가 거쳐하는 한서암과 서로 바라다 보인다. 만약 하늘의 신령한 보살핌으로 내가 수 삼년 더 살게 된다면 마땅히 그대와 함께 옷자락과 지팡이를 나란히 하여 하루 종일 서쪽별서(別墅)와 동쪽 정자 사이로 내왕하며 혹은 바둑을 두면서 도끼자루 썩히고 혹은 빈객과 벗의 모임에서 권하고 응대한다면 인간세상의 낙이 이보다 더할게 무엇이겠는가? 다만 중제(仲弟)가 세상을 일찍 떠나 묘소의 나무가 한 아름 넘었으니 세상에 이처럼 결함(缺陷) 있는지라 어찌 감회가 서글퍼 눈물이 따라 나오지 않겠는가?”
명숙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해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명숙이 세상의 글을 잘하는 사람에게 청하여 그 마루의 들보를 빛내지 아니하고 반드시 제 형제의 거친 글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다른 사람의 좋게 하는 말이 천륜의 지기가 제 실상에 맞는 말을 해주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 정자를 지은 시말과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적어 새겨서 삼은정기로 삼는다.
갑진년(1904) 가을 백형(伯兄) 항재옹(恒齋翁) 익구(翊九) 記

 

三隱亭記 
三隱亭在府治北二十里 華岳山下沙門洞 卽吾弟命叔之所築也 華山實爲吾州之鎭山 而其東一支 蜿蜒屈曲 行十餘里 而突然高起者 曰帆山 自帆山 南下幾百武 而地勢平衍 洞天開闊者 卽沙門洞也 故老相傳云 古有寺院 故名 世代沓茫 不知其然否也 命叔得其 地而喜曰 可亭也 吾於此粧點 以終餘年 族矣 遂以甲辰三月日 經始 四閱月而落之 其爲制 凡四架 而二間室 二間堂 堂前後 皆翼以小軒 苟完而不求美者 昭其儉也 每暇日 余與命叔 登臨顧望 往往樂而忘返 盖玆亭也 雖無奇特瓌麗之觀 而幽靜爽塏 自成一區 後背高山 前臨曠野 左右兩峯 相對屹立 如鳥之舒兩翼 溪水發源於谷中 㶁㶁穿林而流 濫觴于亭南水田 水田可數畝 方鑿塘種蓮 而未果 又有冽泉在西軒下 盛夏飮之 冷可折齒 泉之傍 種柹數三株 濃陰滿庭 可坐而避暑 東行十餘武 栗林叢密 歲取得數斛 間以桃 李梅杏之類 交柯幷榦 菀然成圃 此則宜於奧者也 若夫憑欄而遠望 則眼界空闊 四無阻礙 平蕪渺茫 晴嵐掩映 如龍頭馬巖玉轎諸峰 或近或遠 乍斷乍起 皆爭奇獻媚 卷而爲几案間物 至如金陵之無着山 可百里而遠 而宛轉呈露於烟雲縹緲之外 可望而不可狎 此則宜於曠者也 柳子所謂遊之適有二者 非玆亭之勝耶 凡天下萬物 莫不待人而成 豈玆山一區 幾百年天慳地秘 以待命叔而成其名歟 亭名久而未定 一日叔謂余曰 吾得之矣 玆洞素稱沙門 而沙門與三隱 音相近 以三隱扁吾亭 可乎 余曰 三隱之義 何居 叔曰 吾疎才蔑學 性又寡諧 卽不可有爲於世 則吾將朝於山而樵 暮於水而漁 歸則爇薪烹魚 引觴酌酒 陶然而醉 隱居之樂 如斯已矣 故曰 隱於漁 隱於樵 隱於酒 總之爲三隱 兄以爲何如 余曰 可矣 此雖出於叔之謙辭 而亦未始非實際語也 然之三者 古人亦有樂焉者 如董生之或山或水 是隱於漁樵者也 淵明之一醉一醒 是隱於酒者也 今君不徒以漁樵爲能事 而學董生之至行 不徒以盃酌爲長物 而效淵明之淸修 則其於顧名思義 不亦善乎 君少而志學 日勉焉孜孜 而事與心違 未免中道而止 然天性頗勤儉 雖安分守拙 而於其所當爲 此可見慮事之周 而貽謨之遠也 庸非可尙也歟 亭距村不遠 且與余所居寒棲庵相望 若賴天之靈 假我以三數齡 則當與君聯衿幷笻 鎭日往來于西墅東亭 或觀碁而爛柯 或臨淵而結網 或參酌乎聖賢之書 或勸酬乎賓友之會 人間之樂 孰有加於此者 而但念阿仲早世 墓木踰拱 世界之缺陷 有如是者矣 安得不愴然興懷 而繼之以涕耶 命叔請余記其事 余惟叔何不謁 文於世之能言者 而耀軒楣 而必欲取乃兄之蕪辭者 豈亦以他人之能言 不如天倫知己之 得其實歟 遂書作亭之始未 與夫所感於中者 刻之爲三隱亭記
歲甲辰 秋 伯兄 恒齋翁 翊九 記

 

[출처 및 참조]

국역밀양누정록(2008.2.29)-밀양문화원

 

자운 삼은정

自題三隱亭 스스로 정한 제목 삼은정
華岳三峯刊弟兄 화악 세 봉우리 형제를 깍아 놓은 듯 
恒齋東畔隱亭成 恒齋¹⁾ 동쪽 언덕에 삼은정이 완성되었네 
天長百里包原隰 긴 세월동안 백리를 들과 습지 감싸고 
地僻千年遠市城 후미진 곳이라 천년토록 저자거리 멀다네 
桐栢漁樵酬宿願 桐栢²⁾에서 고기잡고 나무하니 숙원을 풀었으며 
柴桑壺酌了浮生 柴桑³⁾에서 술잔 따르며 덧없는 인생 마치네 
優遊物外皆恩賜 세상 밖에 유유자적한 것이 모두 임금 은덕이라 
白首靑衫老太平 흰머리와 푸른 적삼으로 태평시대에 늙는다네 

【주석】
恒齋¹⁾ : 삼은정三隱亭 용재庸齋 이명구李命九의 별서 이름이고, 항재恒齋는 서고정사西皐精舍의 주인인 이익구李翊九의 호號인데 이명구의 형이다.
桐栢²⁾ : 동백桐栢은 하남河南의 산 이름으로, 회하淮河의 발원지인데 여기서는 삼은정이 그와 유사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柴桑³⁾ : 시상柴桑은 본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향인데 여기서는 삼은정이 그와 같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日夕陪遊共弟兄
東亭西墅一時成
閑中卸○幽花○
遠外笙茄落照城
詩酒○朋○勝○
漁樵爲伴樂餘生
行藏用舍人休問
也是巖棲獨太平
從子 炳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