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용하고 있는 천원권 지폐
우리나라는 자력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침략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변하다보니 매국노를 처단할 기회를 잃었다.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하여 통치를 하려고 하니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통일과 자주적 통치를 요구하여 미국이 원하는 통치에 비협조적인 반면 매국노들은 다시 미국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그 결과 권력의 중심에 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화예술계도 매국노들이 판을 짜게 되고 권력의 중심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표준영정과, 동상 등이 매국노들에 의해 왜곡 제작된 사례가 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가 현초(玄艸) 이유태를 매국노라 칭하는 데에는 “20세 때 매국노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일제의 과학위생 정책에 강조점을 둔 신여성 이미지를 이용한 친일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1937년 〈가두 街頭〉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면서 1940~44년까지 계속 입선했으며 일본 도쿄데이코쿠 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서 공부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좌측부터 정자관을 쓴 이황선생의 영정은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고, 두번째는 매국노 이유태가 그린 복건을 쓴 표준영정이다. 세번째는 천원권지폐에 사용하고 있는 영정이고, 맨 우측의 사진은 다음 이미지에 나오는 매국노 이유태의 사진이다.
천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이황선생 영정 역시 매국노 이유태가 1974년에 표준영정으로 그리게 되었다. 이유태가 그린 표준영정은 복건을 쓰고 있는 모습인데 이황선생은 복건을 싫어해 정자관을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유태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라 비판을 받고 있다.
이황선생이 복건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학봉선생문집속집 권5 잡저 퇴계선생언행록」에 전한다.
『김취려(金就礪)가 복건(幅巾)과 심의(深衣)를 만들어 보내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복건은 승(僧)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쓰기에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고는, 심의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 말년에 재계하며 거처할 적에도 이렇게 하였는데, 손님이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金就礪造幅巾 深衣以送 先生曰 幅巾似僧巾 著之似未穩 乃服深衣而加程子冠 晚年齋居如此 客來則改以常服焉]』
현재 복원된 명륜당 모습
천원권 지폐의 바탕에 나오는 건물은 성균관 명륜당인데 명륜당의 전면은 문이 달려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이 문을 제거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문화재 위원들이 옛 모습을 참고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며 유림들은 비판하고 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생활공간이라는 측면에서 겨울철 추위를 생각해보면 문이 달려 있는 것이 정상적 건축물이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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