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0 고성 곡산봉수를 서쪽에서 본 모습
오랜만에 억지로 시간을 내어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산 171번지에 위치한 고성 곡산봉수대(固城 曲山烽燧臺)를 찾아 나섰다. 곡산봉수(曲山烽燧:해발 316m)는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기념물 제236호로 지정 등록되었으며, 구절산(九節山:해발 559m) 정상에서 북서방향으로 약 2km 떨어져 봉우리를 이룬 곡산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경남의 봉수노선 제2거 간봉(2)'의 구간을 연결하기 위함이다.
집에서 출발할 때 고성군 회화면에서 마동호방조제를 통과하는 도로를 선택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무조건 봉수대에 오르겠다는 각오로 출발했기에 북쪽에서 바라보는 구절산의 모습을 회화면 마암천이 바다를 만나는 곳에서 촬영했다. 이때까지도 곡산봉수가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진으로 남기고 위치를 파악한 후 사진을 골라 쓴다.
2018.1.9 첫 방문 때 촬영한 남서 방향의 곡산봉수 위치와 구절산 풍경
2018년 1월 9일에 처음 곡산봉수에 도전을 했으나 곡산봉수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동해면 내곡리 구절산 등산로 초입까지 갔다가 선입견 때문에 구절산 정상에 곡산봉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포기를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뒷산 봉우리에 곡산봉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동해면주민센터를 찾아가 담당에게 묻기도 했으나 산의 위치를 몰라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다. 당시에 찍은 원거리의 곡산봉수 추정지는 구절산 정상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이다.
2018.1020 남쪽 방향에서 등산 진입로와 곡산봉수 위치을 알 수 있는 대천교
2018.1.9 등산로 초입인 북촌 입구
구절산 북촌 등산로 초입에는 안내표지목과 등산안내도와 함께 「고사인김해김영래처 유인성주이씨효열비」라 칭하는 창선비(彰善碑)가 산가장자리를 절개하여 축대를 쌓고 앞면에는 돌담장을 만든 후 정면에는 지붕돌을 얻은 문을 만들어 그 안에 비를 세웠다. 고성문화원에서 발행한 「固城先士石語錄(고성선사석어록)」에는 기록이 없다. 이곳 고성군 동해면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비각이 많이 보인다.
고사인김해김영래처 유인성주이씨효열비-창선비
곡산봉수를 찾아 구절산을 오르다 만나는 ‘국가지점번호’를 단 안내표지목이 500m 올라옴을 알려 준다. 이곳은 북촌과 내곡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곳이다.
2018.10.20 구절산의 구절초
구절산의 쑥부쟁이
생태계가 살았음을 증명하는 사마귀와 잠자리
가을임을 알리는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며 고지를 향해 오르는 중 사마귀가 잠자리를 잡아 치열한 먹이사슬의 순환을 보여 주고 있어 사진으로 남겼다.
멧돼지가 묘지의 봉분을 파헤쳐 둔 곳에서 두 번째 만나는 ‘국가지점번호’는 반가웠다. 이제 절반을 올라 왔기 때문이다. 국가지점번호의 안내표지판의 방향과 일치한 지점에 “고성 천왕점봉수”가 위치해 있다.
회화면과 당항포 풍경
이순신장군의 당항포해전의 승전지가 펼쳐진다. 뒤쪽으로 회화면 소재지와 황금벌판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지나 온 마동호방조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발의 논리가 주민들의 생존권과 자연생태계의 파괴라는 논리 앞에 포기를 하고 교각을 포함한 도로 하나 완성한 경우이다. 이처럼 국가 예산을 낭비해도 처벌 받은 공무원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듯 조망대에 도착했다. 구절산과 거류산 사이에 펼쳐진 황금들판 속으로 마을들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 이순신장군이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을 마치고 돌아가는 임진년 5월 8일(음력)의 장계에서 ‘고성땅 적진포’라 기록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는 당동리와 그 포구가 보인다.
왜적에게 초토화 된 이 포구에서 향화인(向化人) 이신동(李信同)이라는 사람이 산마루에서 아기를 업고 울면서 내려와 왜적의 소식을 전했다.
그는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와서 여염집에서 빼앗은 재물을 우마로 싣고 가서 그들의 배에 나누워 싣고서는 초저녁에 배를 바다 가운데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숨어서 그 곡조를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곡조 이었고, 오늘 이른 아침에 반수는 배를 지키고 반수 가량은 육지로 내려와서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저의 노모와 처자는 적을 보자, 서로 헤어져 간곳을 알지 못합니다." 하면서 아주 민망하도록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호소하므로 그 정상이 가련하고 적의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노모와 처자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그날의 통곡을 되새기며 굽어보는 적진포는 또 다른 느낌의 땅이다.
마동호라 부르는 저 바다는 일명 ‘속시개’라고 하며 임진란에서 대승을 거둔 당항포해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곳이다. 나라를 구한 고성 기생 월이의 재치로 왜(倭) 간첩이 그린 지도에 간자가 잠을 자는 동안 마치 바다가 자란만과 연결된 것처럼 그림을 그려 넣어 이 지도를 가진 왜적이 이곳을 통과하려다 당항포에서 괴멸되었다.
거류산을 중심으로 고성평야가 펼쳐진 풍경
곡산봉수 서쪽을 오르며 남긴 사진
곡산봉수대에서 서쪽 천왕점봉수 방향을 보면서
곡산봉수대에서 서쪽방향의 등반한 방향을 마주하면 저 멀리 천왕점봉수의 위치가 가늠된다. 추증한 위치에 천왕점봉수 이름을 적었다. 이곳 곡산봉수에서 천왕점봉수까지 직선거리는 10.81km이다.
곡산봉수의 동쪽에서 봉수대로 진입하는 계단부분을 보면서
봉수의 종류에는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가 있다. 봉수의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는 봉수군(烽燧軍)과 오장(伍長)인 감고(監考), 오원(伍員)이 있다. 이들은 반드시 봉수대 인근에 거주하는 자로 배속하도록 했는데 봉수의 3종류에 따라 시설 및 정원에 차이가 있었다. 모든 봉수지에는 오장 1인이 근무하였고, 경봉수에는 2명, 연변봉수에는 5인, 내지봉수에는 3인이 근무했는데 대체로 10일 마다 교대로 임무를 수행 했다.
이곳 곡산봉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에 속하는 곳이다. 연변봉수는 국경과 해변 혹은 도서에 설치되어 연대(煙臺) 그 자체를 의미하는 해안 연변지역의 최전방 변경봉수이다. 연대를 기본으로 하여 연조·호 및 방호벽의 시설여부에 따라 평면형태가 다양하게 구분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철마산성(鐵馬山城)과 거류산성(巨流山城)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축조 시기는 세종7년(1425) 이전이며 철폐 시기는 고종 31년(1894)이다. 노선은 거제 가라산에서 초기하는 제2거 간봉(2)의 봉수이다. 천왕점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진해 가을포봉수에 응하지만 연변봉수의 주요활동을 보건대 진해만에 침입한 왜적을 천왕점봉수를 통해 좌이산봉수로 보내고 사천을 거쳐 진주 망진봉수를 통해 서울로 가는 노선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곡산봉수대를 동쪽 계단진입로에서 본 모습
봉수는 평면 타원형의 단면 '요凹'자 형태로 천왕점봉수와 유사하다. 방호벽 상부의 평탄면에 5기의 연조가 설치된 방호벽+연조형의 봉수구조임이 보고되었으며 출입시설과 경작지 등이 조사되었다. 출입시설은 동쪽에서 계단식 형태로 1개소가 있다. 폭 1.5m, 길이 5m 정도의 시설이다. 이런 모습은 거제 지세포 시설과 유사하다. 봉수의 규모는 지형에 따라 1.5~2m, 전체 둘레 70m 가량이다.
봉수의 중앙에 민묘가 있다고 했으나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아 나무와 칡이 에워싸고 있다. 발굴 조사 후 보온덮개로 보호조치를 해 놓은 상태라 봉수대의 정확한 모습은 볼 수 없다. 또한 동쪽으로 나무가 자라서 진해현 가을포봉수를 조망하기 쉽지 않다.
세종 7년(1425)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고성현 봉수조에는 고성현의 봉수를 이렇게 기록 했다.
미륵산 봉화-현의 남쪽 49리 90보쯤에 있는데 동쪽으로 보면 거제현의 가라산 봉화가 있고 거리가 수로로 30리이다. 북쪽으로 보면 우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육로로 50리 90보이다.
우산봉화로부터 서쪽으로 보면 좌이산 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육로로 60리 60보이고 북쪽으로 보면 천왕점 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40리 380보이다.
천왕점봉화로부터 동쪽으로 보면 곡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30리 307보이다.
곡산봉화로부터 동쪽으로 보면 진해현 가을포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50리이다.
좌이산봉화로부터 서쪽으로 보면 진주관내 각산향 주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53리 22보이다.
[彌勒山烽火 在縣南四十九里九十步許東望巨濟縣地加羅山烽火相去水路三十里 北望縣地牛山烽火相去陸路五十里五十步 自牛山烽火西望 佐耳山烽火相去陸路六十里六十步 北望天王岾烽火相去四十里三百八十步 自天王岾烽火東望曲山烽火相去三十里三百七步 自曲山烽火東望鎭海縣地 加乙浦烽火相去五十里 自佐耳山烽火西望晉州任內 角山鄕主山烽火相去五十三里二十二步]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고성현 기록에는 –봉화가 5곳이니, 미륵산은 현 남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우산은 서쪽으로 좌이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천왕점은 동쪽으로 곡산에 응한다. 곡산은 동쪽으로 진해 가을포에 응한다. 좌이산은 서쪽으로 진주 각산향의 주산에 응한다.
[烽火五處, 彌勒山在縣南, 東准巨濟加羅山, 北准牛山, 牛山 西准佐耳山, 北准天王岾, 天王岾 東准曲山, 曲山 東准鎭海加乙浦 佐耳山 西准晉州角山鄕主山]
예종 원년(1469)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고성현 연대봉화(煙臺烽火)에 따르면 현의 동쪽에 있는 미륵산 봉화는 남쪽으로 거제 가라산 봉화와 서로 마주 보고, 서쪽으로는 현 동쪽의 우산봉화와 마주본다. [縣東彌勒山烽火 南與巨濟加羅山烽火相准 西與縣東牛山烽火相准]
우산봉화는 서쪽으로 좌이산 봉화와 서로 마주본다. [牛山烽火 西與佐耳山烽火相准]
좌이산 봉화는 서쪽으로 진주 각산봉화와 마주 보고, 북쪽으로는 천왕점 봉화와 마주 보고, 동쪽으로는 곡산 봉화와 마주 보고, 또 진해 가을포 봉화와 마주 본다. [佐耳山烽火 西與晉州角山烽火相准 北與天王岾烽火相准 東與曲山烽火相准 又與鎭海加乙浦烽火相准]
성종 12년(1481) 50권으로 편찬하고, 중종 25년(1530)에 55권 25책으로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성현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 했다.
미륵산봉수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烽燧 東應巨濟縣鷄龍山 北應牛山]
우산봉수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이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牛山烽燧 南應彌勒山 西應佐耳山 北應天王岾]
천왕점봉수 동쪽으로 곡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天王岾烽燧 東應曲山 南應牛山]
곡산봉수 동쪽으로 진해현 가을포에 응하고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曲山烽燧 東應鎭海縣加乙浦 西應天王岾]
좌이산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佐耳山烽燧 東應牛山]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신증 된지 130년이 지난 현종 때 편찬 된 지리지로 임진왜란 후의 상항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자료의 고성현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미륵산봉수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烽燧 東應巨濟縣鷄龍山 北應牛山]
우산봉수 남쪽으로는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좌이산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천왕점에 응한다. [牛山烽燧 南應彌勒山 西應佐耳山 北應天王岾]
천왕점봉수 동쪽으로는 곡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우산에 응한다. [天王岾烽燧 東應曲山 南應牛山]
곡산봉수 동쪽으로 진해현 가을포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천왕점에 응한다. [曲山烽燧 東應鎭海縣加乙浦 西應天王岾]
좌이산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하고 있다. [佐耳山烽燧 東應牛山]
순조 32년(1832)에 편찬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고성읍지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 한다.
미륵산 동쪽으로는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본부의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 東應巨濟府加羅山 北應本府牛山]
우산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천왕산에 응한다. [牛山 南應彌勒山 北應天王山]
천왕산 남으로는 우산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곡산에 응한다. [天王山 南應牛山 東應曲山]
곡산 동으로 진해 갈포봉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천왕산에 응한다. [曲山 東應鎭海乫浦峰 西應天王山]
좌이산 남쪽으로 사량주봉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진주 각산에 응한다. 별장 5인이 있다. [佐耳山 南應蛇梁主峰 西應晉州角山 別將五人]
1940년 간행한 교남지(嶠南誌) 고성군 봉수조에는 이처럼 기록 했다.
미조산봉수 남쪽으로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수로 25리이다. [彌助山烽燧 南應巨濟加羅山 北報牛山相距水路二十五里]
우산봉수 남쪽으로 미조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천왕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육로로 30리이다. [牛山烽燧 南應彌助山 北報天王山相距陸路三十里]
천왕점봉수 남쪽으로 우산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곡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육로로 30리이다. [天王岾烽燧 南應牛山 東報曲山相距陸路三十里]
곡산봉수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진해 가을포에 알리는데 서로 거리가 30리 이다. [曲山烽燧 西應天王岾 東報鎭海加乙浦相距三十里]
좌이산봉수 남쪽으로 사량진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진주 각산에 알린다. [佐耳山烽燧 南應蛇梁鎭 北報晉州角山]
이곳 곡산봉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햇불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제도이다. 봉수대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1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진 고려말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터인 산꼭대기에 설치하였다. 평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니 연기,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셋, 바다에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욕지에 상륙했을 경우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이곳 봉수대의 전체 면적은 6,900㎡이고, 현재 이곳에는 연대(煙臺)와 봉수군이 생활했던 추정 건물지 터와 채전(菜田)이 남아있다. 연대의 면적은 330㎡, 둘레는 71m 정도인데 연대위에는 연조(煙窕)가 잔존해 있다. 진해(현재의 진동) 가을포봉수와 고성 천왕점봉수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곡산봉수에서 내려다 본 내곡리 마을입구 정자나무가 있는 풍경
진해 진동의 광암과 요장리의 가을포봉수가 보이는 풍경
망원으로 당경서 본 광암해수욕장 인근과 가을포봉수 추증 위치
가을포봉수까지 직선거리는 12.35km이다. 나무들이 웃자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진해 가을포봉수를 가늠하는데는 쉽지 않았다.
하산 후 창선비 앞에서 남긴 곡산봉수의 위치
* 거제 강망산봉수 ⇔ 거제 옥녀봉봉수 ⇔ 거제 가라산봉 ⇔ 한산도 한배곳봉수 ⇔ 통영 미륵산봉수 ⇔ 통영 우산봉수 ⇔ 고성 천왕점봉수 ⇔ 고성 곡산봉수 ⇔ 창원 가을포봉수 ⇔ 함안 파산봉수 ⇔ 의령 가막산봉수 ⇔ 초계 미타산봉수 ⇔ 합천군 미숭산봉수[봉수노선은 제2거 간봉(2)]
출처 및 참조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도서출판 경남/고성문화원(2014.12.15.)
완역 난중일기-해군인쇄소/해군사관학교(1994.8.13.)
경남지역의 봉수Ⅱ-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3.11.30.)/강순형
고성사료집(제1권)-고성문화원(2005.12.31.)
조선시대의 연변봉수-김주홍(2010.11.5.)
경남의 성곽과 봉수-도서출판 선인(2017.2.28.)
고성군지 1권-고성군(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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