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창원시 장복산봉수 실체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1. 12. 12:11

 

 

 

2018.11.10 장복산봉수대 흔적 모습

 

지난 10월 27일 옛 웅천의 봉수 중 장복산봉수(長福山烽燧)를 찾아서 장복산(해발 582.2m) 정상에 올라 봉수대(烽燧臺)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정상을 답사하고 봉수의 흔적을 찾으려 했겠지만 폐기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더 이상 봉수의 흔적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장복산 정상을 방문하고 봉수 자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능력의 부재로 포기했다. 그런데 ‘松鶴(송학)’이라는 분이 장복산 6부 능선자락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잊혀진 장복산봉수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松鶴(송학)’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18.11.17 동쪽 원거리에서 본 모습

 

 

 

2018.11.17 서쪽 원거리에서 본 모습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창원 도호부
烽火三處, 長卜山在府南、【東準熊神 沙火郞, 西準會原 餘浦】 餘浦、【北準金海 莞浦縣高山】 城隍堂在古會原縣北。【東準莞浦。北準漆原 在谷山】
봉화가 3곳이니, 장복산(長卜山)은 부(府)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웅신(熊神) 사화랑(沙火郞)에 응하고, 서쪽으로 회원(會原) 여포(餘浦)에 응한다.】 여포(餘浦) 【북쪽으로 김해(金海) 완포현(莞浦縣)의 고산(高山)에 응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예전 회원현(會原縣)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 완포(莞浦)에 응하고, 북쪽으로 칠원(漆原) 재곡산(在谷山)에 응한다.】

 

 

 

 

2018.11.10 창원 방향 등산로 입구 모습

 

장복산 정상에서 서남쪽 방향의 능선을 따라 900m 가량 내려오면 장복산봉수를 만나게 된다. 봉수대의 중앙에는 3개의 민묘가 자리를 하고 있고, 남쪽을 제외한 3면은 무너진 돌무지가 봉수대 자리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남쪽은 흙으로 둑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남쪽 방향의 앞쪽에도 민묘 2기가 위치하는데 이곳이 봉수군의 집터로 보여 진다. 연조의 흔적도 남아 있어 빠른 시간 내에 창원시나 경상남도에서 조사를 해서 장복산봉수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018.11.10 장복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웅천현 장복산봉수는 옛 진해현의 가을포봉수처럼 산의 정상보다는 접근성이나 효율적 운영을 위해 해발 높이 368m 위도 35°10′40″N 경도 128°39′09″E 지점인 장복산 6부 능선 구릉상에 설치를 했다. 동쪽의 사화랑산봉수와는 직선거리로 10.86km이고, 서쪽의 창원부 성황당봉수와는 9.56km이며, 남쪽의 고산봉수와는 지근의 거리인 2.7km에 위치하며, 여음포 봉수와는 10.89km의 위치에 있다. 

 
 

 

 

오르는 길에 만나는 차꽃

 

장복산봉수를 찾아가기 위해 지금은 한적한 성산구 방향 마진터널 입구에 주차를 하고 ‘숲속나드리길’ 푯말을 따라 등산을 시작했다. 비스듬한 경사를 오르다 보면 숲속나드리길과 합류를 하고 우측 방향으로 다시 오르다 보면 장복산 정상으로 오르는 푯말과 함께 육각정자를 만난다. 이곳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설물들이 제법 있다. 이곳에서 장복산 정상 방향으로 약 400m를 오르면 장복산봉수를 만날 수 있다. 등산인 들이 많아지다 보니 곳곳에 이처럼 육각 정자를 설치했는데 정작 정자의 이름은 없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모든 사물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이름은 새롭게 다가와 마음을 열게 하는 기폭재가 된다. 부디 창원시는 정자에 이름을 달아 주기 바란다.

 
 
 

 

 

남쪽에서 본 모습

 

등산로는 그리 험하지 않으며 능선을 따라 벗꽃길이 형성 되어 있고, 아래에는 차나무를 심어 나름 운치가 있다. 현재 장복산봉수대 주위로 나무들이 많이 자라 서로 마주보고 응하는 타 봉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곳에 나무 높이 정도의 전망대를 세우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급박했던 시대적 사항도 떠올려보고 역사의 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전망이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북쪽에서 본 모습

 

웅천현읍지의 군액(軍額)의 기록을 보면 사화랑, 고산, 천성연대봉수군과 보(保)¹⁾에 대해 이처럼 기록하고 있다. 

「沙火郎·高山兩烽燧軍保并二百名 軍各二十五名 保各七十五名, 天城烟臺烽燧軍保四十名 軍二十五名 保十五名」 사화랑과 고산의 두 봉수군은 보(保)와 아울러 200명인데 군사가 각 25명, 보가 각 75명이다. 천성연대 봉수군 보는 40명인데 군사가 25명 보가 15명이다.

 

보(保)¹⁾ : 조선시대 실역에 복무하는 정군(正軍)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신역(身役)의 단위. 

 
 

 

 

동쪽에서 본 봉화 모습

 

 

천성연대봉수(天城烟臺烽燧)

「在縣南水路三十五里 南望對馬島 東報金海省火禮烽燧相距水路三十里 西報縣沙火郞烽燧相距水路三十五里」 현에서 남쪽으로 수로 35리 지점에 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대마도를 바라 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김해 성화례 봉수대로 알리며 거리는 수로 30리가 되고, 서쪽으로는 본 현의 사화랑 봉수대로 알리며 수로 35리가 된다.

 

사화랑산봉수(沙火郞山烽燧)

「在縣西南間六里 東應天城煙臺烽燧 西報昌原餘浦烽燧 相距水路二十五里」 현에서 서남간 6리 지점에 있다. 동쪽으로 천성연대 봉수의 신호를 받아 서쪽으로 창원 여포 봉수대로 알린다. 그 사이 거리는 수로 25리 이다.

 

고산봉수(高山烽燧)

「在縣西三十五里 東應沙火郞烽燧 相距陸路三十五里 北報昌原城隍堂烽燧 相距陸路二十五里」 현에서 서쪽으로 35리 지점에 있다. 동쪽으로 사화랑 봉수대의 신호를 받으며 그 사이의 거리는 육로로 35리 이다. 북쪽으로 창원 성황당 봉수대에 알리며 그 사이는 육로 25리 이다.

 

장복산봉수(長福山烽燧)

「長福山烽燧 今廢」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산봉수(城山烽燧)

「城山烽燧 正德丙寅 移于天城烟臺 今無」 명나라 1506(중종 1)년에 천성연대로 옮겨서 지금은 없다.

 
 
 

 

 

서쪽에서 본 봉화대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유당(攸堂)이 쓴 창원군지(昌原郡誌), 교남지권지73(嶠南誌卷之七十三) 등에는 장복산봉수의 기록이 남아있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고산봉수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및 참조

국역 웅천현읍지-진해문화원(1993.12.30)/황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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