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7 까마귀의 눈으로 본 웅천 안골왜성과 파괴된 육망산 陸望山
난중일기에 처음 안골포(安骨浦)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592년 7월 8일 임진왜란의 삼대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이 끝나고 조선수군이 해상을 장악하는 위력을 만천하에 떨친 다음날 등장한다. 정조 19년 을묘(1795) 11월 30일(정축) 19-11-30[10] 새로 인쇄한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에 실린 장계에는 그의 백성(百姓)¹⁾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때에는 안골왜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
백성(百姓)¹⁾ : 백성이란 임금이 소유하고 있는 땅에 사는 일반 사람들을 말한다. 즉 임금은 일정한 영역의 땅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땅에 있는 무생물과 생물을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 그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왕국이 아닌 공화국에서는 임금의 소유물인 백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 또는 인민이 존재한다.
2018.12.07 웅천 안골왜성 전체 풍경
2018.12.07 웅천 안골왜성 - 동남방향에서 본 모습
【장계】1592년 7월 9일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倭船) 마흔 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탐망군이 보고 했다. 즉시 본도 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벌할 계획을 상의 한바 이 날은 이미 저물고 역풍이 세게 불어 항해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거제 땅 온천도(거제군 하천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장계】 1592년 7월 10일
새벽에 출항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의 가덕 변두리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를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도우수사는 내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대선 21척·중선 15척·소선 6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 중 3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물에 떠있고 나머지는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뭍이 드러날 것이고 판옥대선으로는 용이하게 드나들 수가 없으므로 여러 번 유인해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선운선(先運船) 59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목 베었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하륙하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배를 메어둔 채 두려워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드나들면서 천자·지자·현자총통과 여러 총통 뿐 아니라 장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무렵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둔 뒤 급히 달려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3층방 대선과 2층방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어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을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이었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부수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갔는데 뭍으로 간 왜적들은 다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무척 많은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워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그 백성들이 오히려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 일리 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본성에 있는 안내판
이곳 안내판에는 이처럼 적고 있다.
웅천 안골왜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75호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 32-4
안골포는 조선수군(朝鮮水軍)의 석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본식 성곽을 쌓기도 한 곳이다. 남해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부산방면의 가덕수로와 통영방면의 수로를 통제하기 좋으며 뒤에는 험한 육망산(陸望山)이 있어 수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제포진(薺浦鎭)에 소속된 안골포영(安骨浦營)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이끄는 조선군이 주둔하였는데 둘레 56m(171.4척), 높이 3m(10척)의 성벽과 안에 우물과 시내가 있는 성이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안골포 위의 높은 곳을 택하여 일본식 성곽을 쌓았다. 둘레 594m, 높이 3~7m, 면적 63.577㎡의 성곽은 1593년경 왜장 와키사카(協坂安治) 등이 쌓고 주둔하였다.
성곽은 4개소로 나누어 삭평하고 3개소의 내성과 1개소의 외성으로 되어 있다. 내성은 모두 돌로 쌓았으며 외성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명 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터에는 17세기 후반 이후의 조선백자도 출토되고 있어 왜군이 쫓겨 간 뒤에 안골왜성이 조선수군에 의해 다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문과 해문】
新增東國輿地勝覽 熊川縣 關防
薺浦鎭 有右道水軍僉節制使營所管 安骨浦 蛇梁 唐浦 玉浦 助羅浦 平山浦 赤梁 石城 周四千三百十三尺 內有二井 僉節制使 一人
安骨浦營 在縣東二十里 石城周一千七百十四尺 高十尺 有一溪一井 水軍萬戶 一人
신증동국여지승람 웅천현 관방
제포진에는 우도수군첨절제사영이 위치해 있다. 관할하는 곳은 안골포 사량 당포 옥포 조라포 평산포 적량 등이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4,313척이며 성안에 우물은 2개 있다. 첨절제사 1명이 있다.
안골포영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석성의 둘레는 1,714척이고, 높이는 10척이며, 성 내에는 개울 1개, 우물 1개가 있다. 수군만호가 1명이다.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남문지에서 바라 본 내성
선조 25년(1592)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제1차 조일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일 양국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선조30년(1597) 1월부터 조선에 재침을 감행하여 7월 8일에 정유재란(제2차 조일전쟁)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이기간 동안에 조선 땅에 남아있던 2만여명의 왜군 중 서생포성에는 아사노(淺野幸長), 부산포성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죽도성에 코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안골포성에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가덕도성에 다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등 5개 지역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그들은 재침군과 합류하여 전라도 지역에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안내문에 등장하는 와키사카(協坂安治)는 이때 도오도오(藤堂高虎)· 와키사카(協坂安治)· 가또오(加藤嘉明) 등과 함께 경상도 웅천에 합류하고 있었다.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외성 방향에서 본 북문 모습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천수각 자리에서 본 모습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천수각에서 남쪽 거제방향을 본 모습
2016.12.05.웅천 안골왜성의 북쪽에서 바라 본 천수각
출처 및 참조
완역 난중일기-해군사관학교(1994.8.13.)/해군인쇄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안골왜성 안내판
사천시사-제2편 역사/정유재란(제2차 조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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