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진해구 제덕동 괴정마을 당집과 팽나무 노거수

천부인권 2016. 12. 6. 14:09



<2016.12.5. 제덕진성에서 본 괴정마을 풍경>

 

역사책에 등장하는 삼포왜란의 중심지인 槐井(괴정)마을은 왜관이 있던 바로 그 자리다. 현재 법정동 명은 薺德洞(제덕동)이고, 고유명은 주위에 냉이가 많았다하여 냉이개(乃而浦, 薺浦)라 한다. 조선 水軍鎭(수군진)이 있던 곳은 薺鎭里(안지개)라하고 교린정책으로 ()에 개항을 하여 주던 이곳을 바깥지개라 하며, 선창이 있어 船倉里(선창리)라 불렀다. 이후 안지개는 제포리가 되고, 선창리는 괴정리로 이름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槐停里(괴정리)’로 표기했으나 뒤에 槐井里(괴정리)’로 쓰게 되었다. 마을의 맨 위쪽에 神木(신목)인 팽나무 노거수 군락지가 있고 그 아래 우물 2개가 있어 마을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한다. 아마도 회화나무나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노거수로 자라고 마을의 당목이나 신목으로 추앙 받다보니 한자로 (회화나무 괴)를 사용했을 것이다.




<2016.12.5. 괴정마을 매립지 뒤쪽의 마을은 육지로 변한 水島(수도)이다.>



<2016.12.5. 바깥지개(괴정동) 당집에서 본 마을 풍경>



<골목길 입구에서 바라본 신목 모습>



<2016.12.5. 골목길에서 만난 우물>

 

마을에서 팽나무 노거수 군락이 있는 곳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를 사진으로 남기며 마을 탐방을 시작한다. 30m를 가니 요즘도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있는 우물을 만났다. 괴정 마을의 이름을 만든 그 우물이다. 안쪽의 우물은 둥근 형태이고 바깥쪽은 네모이다. 이 우물도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남성의 기질을 뜻하는 것이며, 네모난 우물은 땅을 상징하고 여성을 뜻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성한 물을 마시게 되어 무병장수하고 어부들은 물로는 변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2개의 우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룬 모습>




우물 위에는 괴정마을의 수호신 당목이 위치해 있고 좁은 길을 따라 팽나무 노거수 5그루가 절개지에 도열하듯 서있다. ‘괴정마을 팽나무 노거수의 가슴 높이 둘레는 360cm이고, 높이는 220cm, 나이는 250년이다.

 






<팽나무 노거수 군락의 모습>



 

마을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괴정마을 팽나무 노거수가 있는 곳에는 괴정마을 당집이 있다. 당집 밖에는 낮은 콘크리트 담장이 조성 되어있고, 당집은 측면 1, 정면 1칸의 금속기와로 벽체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당산제는 할매신, 할배신, 신목에 매년 음력 11일에 지내며, 제관은 마을사람 중에 不淨(부정)없는 50대 이상의 남자를 선정했었다. 선정된 제관들은 당산제가 있기 7일 전에 목욕재계를 하고, 제를 마칠 때까지 술과 여자, 부정(不淨)한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 제의 형식은 유교식 제례이다. 제물로는 밥, , , 명태, 과일, 나물을 올리며 고기와 생선은 올리지 않는다. 동이 틀 무렵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제덕 활어 위판장 앞에서 용왕제를 올리는 것으로 제가 끝이 난다.

제의 금기가 엄격하여 마을사람들이 제관 맡기를 꺼려하면서 인근 지역의 중을 불러 당산제를 지낸 적이 있었으나 부담이 과중하여 마을에서 존경받는 분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지내고 있다. 2001년도까지는 송연옥(, 75)이 맡고 있다. 당산제를 지내는데 쓰이는 비용과 당산 주변 정비 등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당집문을 열어 보니 우측에는 한복 3벌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향로와 남녀 어른 고무신과 여자아니, 남자아이가 신을 수 있는 고무신이 놓여 있다. 제단 위에는 중앙에 神牌(신패)를 두고 좌우에 촛대를 두었다. 그리고 꽃병에는 꽃을 꽂아 두었고, , 과자가 있으며, 플라스틱 잔에는 음료 같은 것이 약간 들어 있었다.

신패는 신패곽 속에 모셨는데 신패에는 此山局內恒住姑堂大神之位(차산국내항주고당대신지위)’라는 신명을 적었다. ‘이산의 영역 안에 항상 계신 주인은 고당할머니 큰 신 위패이런 뜻인가 보다.



 


 

이 괴정마을은 왜관이 있어 왜의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했고,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은전을 베풀어 준 곳이지만 삼포왜란 때의 제포왜란과 몇 번의 왜란 등 큰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인연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왜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아직도 일제풍의 집이 존재하는 곳이다.

 



此山局內恒住姑堂大神之位(차산국내항주고당대신지위)
 

제포진에는 어변정이 있어 전선 1, 병선 1, 사후선 2척이 있었다하고 黃幹(황간 1713~)이라는 분이 제포에 왔다가 시를 한 수 남겼다고 熊川縣邑誌(웅천현 읍지)’에 전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黃幹詩(황간 시)

千軍掘土海村傍(천군굴토해촌방) 많은 군사가 갯마을 가에 땅을 파

移作樓船繫纜方(이작누선계람방) 누선 맬 곳을 옮겨 만들도다.

地僻祗應安所迫(지벽지응안소박) 지세가 궁벽하여 배 맬 곳으로 안전하니

壑深誰敢負其藏(학심수감부기장) 구렁이 깊어 누가 감히 감춘 것을 믿으리오

波聲浦外從他壯(파성포외종타장) 물결 소리는 개 밖에서 웅장하고

風角空中任爾狂(풍각공중임이광) 풍각은 공중에 멋대로 울린다.

幾歲經營今始就(기세경영금시취) 숱한 해를 경영하여 이제야 이루니

民情胥悅吏憂忘(민정서열리우망) 백성은 즐거워하고 향리는 근심을 잊구나

 

 




<일본식 건물 모습>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국역 웅천현 읍지

진해의 땅 이름 이야기(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