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북면 고암리 이영분 제단비-성주이씨

천부인권 2019. 4. 14. 08:47



2019.4.11 북면 고암리 성주이씨 용산재 모습



2019.4.11 북면 성주이씨 용산재 뒷문 이필문



2019.4.11 용산재 뒤뜰에 세운 이영분 제단비 모습


북면(北面) 고암리(高岩里) 510번지는 성주이씨(星州李氏) 문중의 재실 용산재(龍山齋)가 위치하는 곳이다. 『북면 고암리 성주 이영분 제단비(北面 高岩里 星州 李永賁 祭壇碑)』는 북면 고암리 509번지에 위치한다. 용산재 뒤 좁은 협문인 이필문(履必門)를 지나면 뜰의 중앙에 잘 만든 지대석 위에 비희(贔屭)¹⁾가 커다란 오석의 비신(碑身)을 짊어지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비신 위의 이수(螭首)에는 두 마리의 교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어 비의 주인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비의 정면에는 『통훈대부행경상수군병마절도사겸창원도호부사성주이공제단비(通訓大夫行慶尙水軍兵馬節度使兼昌原都護府使星州李公祭壇碑)』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이 비석과 우측의 네모난 비석은 1998년 2월에 세운 것이다. 처음으로 세운 제단비는 좌측 뒤쪽에 비의 전면이 우측 남쪽을 바라보는 청석의 비신에 가첨석을 얻은 비이다. 이 비는 경오(庚午, 1930)년 10월에 세운 것으로 비명(碑銘)은 눌재 김병린(訥齋 金柄璘)이 칭송한 글이 적혀 있다.
정면의 비는 이 글을 옮겨 적은 것이고 우측의 네모난 비는 해문하여 우리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아래에는 비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적어 둔다.




2019.4.11 눌재 김병린이 찬한 이영분 제단비


通訓大夫行慶尙水軍兵馬節度使兼昌原都護府使星州李公祭壇碑


節度使李公之沒 四百有餘年 後孫百榮 基燮過柄璘而言曰 吾先祖之墓世乘 以爲在果川冠岳山基原 而世代旣遠 灰劫浩陵谷遷 歲祭之儀 無從行焉遂爲子孫無窮之恨 玆詢謀宗人 築祭壇於里後 幷將立碑 以記其事 乞吾子之一言 以徵後也 且吾子 乃吾祖桐鄕人也 豈得無意乎 云則雖識膚筆弱 如柄璘者 何庸辭 謹按公諱永賁 字子荔 李氏星州之世 初祖克臣 始仕新羅 至京山府院君長庚 元封隴西公 是生文烈公非年 文章節行 震耀中東 退陶先生所稱五百年第一人也 曰褒侍中 諡敬元 曰仁敏大提學 麗季不出 贈領議政 府院君 曰稷 本朝領議政 星山府院君 號亭齋 諡文景 曰師純參判 是爲高曾祖 祖若考 妣延日鄭氏 判書鎭女也 成廟戊申 公 以水軍兵馬節度使 兼都護府使 來鎭昌原 五年 民物咸熙 治化大著 府舊有碧虛碧寒二樓 皆隘小欝塞 登臨者病之 公 自政成之後 無事於事 則剏五楹新構 役游手不用民力 未五月而成 所謂燕賓樓是也 虛白洪相公 名而記之 極加稱賞 己酉與列邑守宰 及內朝淸班數十人 修契事于矗石樓 濯纓金文愍公 時以晋州學官 參是會 而爲之序 以比蘭亭羣賢 洛陽耆英之諸君子 公配文化柳氏 右相思恭女 繼配南陽洪氏 北兵使尙直女 有子五人 男敭 敦俱 縣監 敷都正 敞主簿 季曰別座欱 公之歸京居之日 留使宅玆土者也 女適郡守尹滂 孫男光佑 洪佑 文佑 元佑 亨佑 彦佑 碩佑 峻佑 曾孫 以下不錄 公之履歷 雖不能枚悉 而仗鉞雄藩 得民歡心 暇又與諸名碩 逍遙于湖山之勝 偉然風蹟 終有不泯焉者 於乎休哉 昔羊叔子 都督荊州 遊峴山云 後世精靈 陟降在此 公嘗愛此邦風水 使子而居焉 則其意抑有以也歟 銘曰
猗星州李 赫寫以蕃 昉羅而麗 迄于我鮮 公克承休 允矣其世 洪相記樓 濯翁序契 芳流簡編 百襈如昨 維彼堂斧 孰髥而目 香火久曠 彌增怵悽 睠玆高巖遺裔攸廬 有誠有神 一氣感通 爰立壇薦 僉謀詢同 刻辭于珉 永世不磷
庚午十月 日
盆城 金柄璘謹撰




서쪽에서 남쪽방향을 바라 본 옛 비모습



용산재 뜰의 중앙에 위치한 당당한 모습의 비희가 짊어진 비



옛비를 해문하여 옮겨 적은 비


통훈대부행경상수군병마절도사겸창원도호부사성주이공제단비


절도사 이공(李公)이 별세하신 지 사백여년이 된 때 후손 백영(百榮)과 기섭(基燮)이 나를 찾아와서 절도사 선조의 묘가 족보에는 과천 관악산 유좌(果川 冠岳山 酉坐)라 기록되어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 실묘(失墓)하여 한스런 후손들이 재실 위에 제단을 만들어 비를 세우고자 비문을 부탁하였다. 평소부터 공의 행적을 익혀 아는 내가 어찌 이를 사양하겠는가.
근안공의 휘(諱)는 영분(永賁)이요. 자(字)는 자려(子荔)이며 성주이씨(星州李氏)로써 시조 휘 순유(純由)는 신라정승이시고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으로 원나라에서 농서군공(隴西郡公)에 봉한 휘 장경(長庚)은 공의 육대조이며, 오대조 비년(非年)은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제학(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며 이퇴계(李退溪) 선생께서 문장과 절행이 고려 오백년 동안 제일인이라고 칭송한 분이다. 고조 포(褒)는 시중(侍中)이며 시호(諡號)는 경원(敬元)이요. 증조 인민(仁敏)은 대제학을 지내고 여말(麗末)에 은둔(隱遁)하였으나 태조조 영의정(太祖朝 領議政)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조(祖) 직(稷)은 세종조 영의정으로 성산부원군에 봉해진 분으로 호는 형제(亨薺)이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며 고(考) 사순(師純)은 공조·예조·호조참판(工曹·禮曹·戶曹參判)을 지내시고 비(妣)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판서이신 진(鎭)의 따님이다.
공은 성종 무신년(1488)에 경상수군병마절도사겸창원도호부사(慶尙水軍兵馬節度使兼昌原都護府使)로 부임하여 재임 오년동안 백성을 편안히 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고을을 태평케 하였다. 그리고 부중(府中)에 옛날부터 있던 벽허(碧虛)·벽한(碧韓) 두 누각(樓閣)이 있었으나 협소하고 퇴락하여 허물어짐을 모두 아쉬워할 때 공은 성종 임오년(1492)에 오량(五梁)으로 연빈루(燕賓樓)를 지었다. 이 누대를 지을 때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나졸(邏卒)을 부리었음으로 고을 사람들은 공을 칭송하고 낙성을 기뻐하였으며 허백 홍귀달 정승(虛白 洪貴達 政丞)이 루(樓)의 기문을 지었다.
공은 성종 기유년(己酉年, 1489)에 중국의 난정계(蘭亭稧)와 기영계(耆英稧)와 같이 경상도의 어진 여러 목민관(牧民官)과 중앙의 청반(淸班) 등 21현이 촉석루(矗石樓)에서 금난계(金蘭稧)를 만들어 교유(交遊)하였고 문민공 김일손(文愍公 金馹孫)이 지은 계의 서문(序文)과 명첩(名帖)은 촉석루에 걸려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문화류씨 우의정 사공(右議政 思恭)의 따님과 남양홍씨 북병사 상직(北兵使 尙直)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두시고 양(敭)과 돈(敦)은 모두 현감이요 부(敷)는 도정(都正)이며 창(敞)은 주부(主簿)요 합(欱)과 사위 윤방(尹滂)은 군수(郡守)이다. 공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가실 때 자손들이 살만한 곳이라 하면서 창(敞)과 합(欱)을 이곳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손자는 광우(匡佑)·홍우(洪佑)·문우(文佑)·원우(元佑)·형우(亨佑)·언우(彦佑)·석우(碩佑)·준우(峻佑)이다.
공의 이력(履歷)은 다 헤아릴 수 없으나 부민(府民)과 장졸(將卒)을 덕으로 다스려 민심을 얻었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서 시류(詩流)를 즐기시는 여유와 훌륭한 학덕과 치적(治績)은 명망이 높았다. 옛날에 형주도독 양숙자(荊州都督 羊叔子)가 현산(峴山)에서 노닐 때 내세의 혼령이라도 이곳에 와서 놀 것이다 하였는데 공도 이곳 풍수를 좋아하여 아들로 하여금 살게 하니 그 마음은 양숙자(羊叔子)와 같다.
거룩한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신라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빛나고 번성(蕃盛)하였도다. 이러한 찬란한 가통(家統)을 이어 받은 공도 덕망이 높은 훌륭한 분이므로 홍정승(洪政丞)이 루의 기문(記文)을 짓고 김선생(金先生)이 계(稧)의 서문(序文)을 지었다. 아름다운 공의 행적은 수백년이 지나도록 어제같은데 어찌하여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하였을고 향(香)불마저 오래도록 그치었으니 두렵고 구슬픈 마음 금할 길이 없으라. 후손들이 모여사는 이곳 고암(高岩)에 단비(壇碑)를 세우고 정성을 다하면 선조께서 강림(降臨)하여 머무르시리라. 이러한 후손들의 정성을 옥돌에 새겨 세우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庚午(경오 1930) 10월 김해 김병린(金海 金柄璘) 지은 글로 세운 비를 戊寅(무인 1998) 2월 상곡(上谷) 익산(益山 諱英魯)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단성(壇成)을 정화하고 비석을 새로 세우다.


【주석】
비희(贔屭)¹⁾ : 용생구자(龍生九子) 중 첫 번째 등장하는 이무기로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역할과 성격에 맞는 힘쓰는 일을 잘 한다는 상상속의 동물을 말한다.
贔는 ‘큰 거북이고’, 屓(屭)는 ‘힘쓰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힘을 쓰는 큰 거북이 된다.”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좋아하고, 몸통은 거북을 닮고, 머리는 용을 닮았으며 석비 아래에 둔다. 거북은 수명이 길어 영원과 吉祥(길상)을 상징하며, 비희의 머리를 만지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제단비에서 이필문과 용산재를 바라 본 모습


출처 및 참조
창원시문화유적분포지도(2005년)-창원대학교박물관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통훈대부행경상수군병마절도사겸창원도호부사성주이공제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