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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 풍영루와 묘정비 해문

천부인권 2019. 6. 15. 06:00



2019.6.12 함양 남계서원 풍경


'창원향토사연구회'의 6월 답사지이지만 잠시 스치듯 볼 수밖에 없었던 남계서원은 외삼문인 풍영루(風咏樓)는 올라보지도 못했고 그러다보니 기문(記文)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그때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풍영루(風咏樓) 앞에 세운 안내문도 읽지 못하고 그렇게 다녀 온 것을 후회한다. 따라서 혼자라도 다시 가봐야 하는 방문지 목록에 올랐다.




남계서원 외삼문인 풍영루


남계서원 풍영루에 걸려 있는 편액속에는 풍영루중수기(風詠樓重修記)도 있는 듯하다.「한국서원이야기-남계서원지(전문)/박성진」에 기록된 원문과 해문은 아래와 같다.


[원문]

風詠樓重修記 奇正鎭
大行王十三年 丁未蘫溪書院之風詠樓燬粵 三年己酉始克重建 上庠生鄭煥弼一蠧先生裔孫致 多士之意命 其友生奇正鎭記之正鎭踧踖不敢 卽泚筆先問樓所 以命名之由煥弼曰 蓋聞聖人之於道未嘗 爲一隅語且言其一二 則如山水言仁智之樂崇卑狀 知禮之德堂室況造道之域者皆是也 推斯義也 曾氏之沂上風詠 與顔子之巷居如愚 規模氣像雖有不同 而學者不可廢一 而不講也明矣 是院之有居敬集義齋者蓋 將追曾孟之志以事體用之學是所謂學顔子之所學而張而 不弛文武不能發舒精神休養性情又鳥可無一段事乎此樓 之所以創於後而命名之不得不然者也正鎭作而對曰不亦 善夫其名之也此固鄙生之所願聞學者之登斯樓入斯齋者 卽齋樓之扁而體認之亦可以不迷於所從矣正鎭又何辭以 贊第念風詠之旨與鳶飛無躍同活潑潑之地豈可但以張弛 言乎哉此事只問天資學力曾氏惟天資高能不由階級而優 見大意無曾氏之天資而慕曾氏之風詠非學力何以哉惟守 之久而後居之安居之安而後資之深資之深而後左右逢其源 於是乎舍瑟之對在吾方寸間矣所守之地豈有他哉不過所 謂敬與義而已先生之淵源實學雖非後生蠡測集諸先生之 尙論而想像之蓋所謂不動而敬不言而信者其深厚篤實何 如也及昧孤舟下江數句則隱然有風浴氣像此豈懸慕企望 而得之哉守之久而自至耳正鎭衰遲錮廢雖不獲進於藏修 之列願與諸君子相勉焉院有正宇以享先生而桐溪介菴二 先生配侑焉 有別祠㵢溪松灘 二先生享之 頭流白巖蘫溪渭水 皆眺望山水之可記者云


[해문]

풍영루중수기 기정진
대행왕 13년(1847) 정미(丁未)에 남계서원의 풍영루(風詠樓)가 화재를 입어 3년을 경과한 기유년(己酉年)에 비로소 거듭 짓게 되었다. 상상의 유생 정환필(鄭煥弼)은 일두(一蠧)선생의 후손으로서 많은 선비의 뜻을 알리면서, 그의 벗인 기정진(奇正鎭)에게 기문을 부탁하거늘 정진은 조심스러워 감히 곧 붓을 잡지 못하고, 먼저 루(樓)에 명명된 이름을 물으니, 환필이 이르기를 “대개 들으니 성인은 도에 대하여 일찍이 한 모스리만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한·두 가지를 말한다면 산과 물로써 인자와 지자의 좋아함을 말하고 높고 낮음으로써 예를 아는 덕을 형상하고 당(堂)과 실(室)로서 동에 이르는 경지를 비유한 것이 모두 이것이니라. 그 뜻을 미루어 본다면 증씨의 기수변에서 바람 쐬이고 시 읊조림과 안자의 더러운 골목에 살면서도 어리석은 듯 했던 것이 규모와 기상은 비록 같이 않음이 있으나 배우는 자가 하나라도 폐하고 강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니라. 이 서원에 거경 집의의 재가 있음은 대개 증씨와 맹씨의 뜻을 쫓아서 체용하는 학문을 일삼는 것이니라. 이것이 이른바 안자의 학문하는 바를 배우면서 긴장하기만 하고 조금도 풀지 않으면 문과 무도 능히 못한 것이다. 정신을 발서 하고 정신을 휴양하는데 어찌 가히 한 계단의 일이 없겠는가. 이리하여 누(樓)를 후일에 창설하게 되었고, 이름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진이 일어나면서 대답하기를 “그 이름한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 이것이 진실로 우리들이 듣기를 원하던 바이니라. 배우는 자로서 이 누에 오르고 이 재에 들어와서 재와 누의 현판에서 그 뜻을 깨달아 안다면, 쫓은 바에 있어 아득하게 멀지 않을 것이니라. 정진이 또 무슨 말로 돕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바람 쐬이고 시 읊조린다는 뜻이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것과 같은 자연이 활발한 경지이니, 어찌 다만 긴장과 늦추는 것만으로 말할 것인가. 이 일은 다만 타고난 자질과 학문하는 힘만을 물을 것이니라. 증씨는 타고난 자질이 높아서 능히 계단을 말미암지 않아도 큰 뜻을 넉넉히 모았던 분이니라. 그러나 증씨의 타고난 자질은 없으면서 증씨의 바람 쐬임을 사모함은 학문하는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하리오. 오직 지켜서 오래된 다음이라야 거함이 편안해지고 거함이 편안한 뒤라야 밑천으로 삼음이 깊어지고, 밑천으로 삼음이 깊어진 뒤라야 좌우로 모두가 그 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니라. 이런 다음이라야 비파를 밀치면서 부자에게 대하던 뜻이 나의 가슴 속에도 있게 되나니 그렇다면 지키는 것에 어찌 딴 것이 있으리오. 이른바 경과 의에 불과 하나니라. 선생의 연원하신 실학은 비록 후생이 헤아릴 수 없으나 선생의 아름다운 언론을 모아서 상상하건데, 대개는 이른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스럽고 말하지 않더라도 미덥다는 것이니, 그 심오하신 학문과 독실했던 행실이 어떠하였던가. 또한 “외로운 배로 큰 강을 내려간다.”라는 글귀를 음미하니, 은연중에 무에 바람 쏘이고 기수에서 목욕하겠다던 기상이 있느니라. 이는 어찌 멀리 사모하고 바람으로서 얻어진 것이리오. 지킴이 오래되면 절로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니라. 정진이 늙고 고질이 있어 비록 그곳의 공부하는 반열에 달려가지는 못하나 여러분과 더불어 권면하기를 원하나이다. 서원에 정우가 있어 선생을 향사하면서 동계와 개암 두 선생을 배향하고, 별사에는 뇌계 송탄 두 선생을 봉향 하니라. 두류산 백암산과 만계와 위수는 모두다 조망이 아름다운 산수로서 가히 기록할 만하니라.




풍영루 편액


'남명학고문헌시스템'에서 남계서원지(蘫溪書院誌)를 찾아보니 정환필(鄭煥弼)이 기록한 풍영루기(風咏樓記)가 있어 먼저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원문]
蘫溪書院誌卷之一
風咏樓記 鄭煥弼
蘫院之創設久矣始於周茂陵竹溪之後而創之者惟介菴姜 先生也介菴生于文獻公五十載之下慕先生之德講先生之 道與鄕士若干人同心協贊立祠宇講堂東西齋及前門數十 餘間以爲尊先賢牖後學之地而仍以命名焉各有義若明誠 居敬集義之類是也且夫曰愛蓮曰詠梅者齋前鑿塘塘外築塢 蓮可賞而梅可賦也曰遵道者由是而行道在斯焉於是乎院 之制始大備矣然而學者於講論游息之暇不可無暢敍之所 先父老圖惟經始之未遑者數百年于玆矣迺於庚子秋儒議 復起屬家兄煥祖幹其事蓋以其尊賢衛道夙有誠力故耳于
以營繕百務實檢擧是盧君光表姜君大魯族弟煥龍亦與有 相焉咸以謂與其創立層榭徒取觀美曷若因舊貫增新制恢 拓我胸次也遂就遵道門上葺之以小樓樓凡上下十許間以 翌年辛丑六月二十日落之遠近章甫濟濟趨賀主守姜侯彝 文亦來會揖讓之風進退之節蔚然可觀也夫樓之爲制也不 甚宏傑而奐輪翬革倏然改觀不百尺而逈臨有四望之攸同 郊坰平曠川澤縈洄遙林蔥蒨晩靄依霏巖山數黛入暮雨而 半隱㵢溪一面帶朝旭而全露竹柏前村啼鳥催春䆉稏古巷 老農지秋風月呈美煙霞獻技一瞥千奇恍惚難狀登斯樓也 則心廣神怡涵泳灑落悠然有自得這意矧乎頭流萬疊之峯 花林九曲之流庶可以覽先生之淸風仰先生之氣象恰若列 侍函筵有點也鏗爾舍瑟之趣故因名之風詠樓若遵道舊楣
則介菴之賜號梅菴之心畵列揭于門上以示不泯先賢遺蹟 之意噫曾點夫子之徒也吾儕先生之徒也學夫子而有風乎 詠而之趣則學先生者烏可無一船這箇想耶遂援瑟而爲之 歌曰麗景遲遲兮增乎春服無小無大兮冠童五六鳳凰高騫 兮盍余游息優遊厭飫兮使息得已見大竟兮融理而蛻慾蘫 水之洋洋兮可以浴孤臺之屹屹兮可以風玆樓之適成兮吾 將詠歸渢渢落成之日鄕長老屬余爲之記余以謏識極知僭 汰而長老之勤託有不可孤是爲之記


[해문]

풍영루기(風詠樓記) [후손(後孫) 정환필(鄭煥弼)]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창설(創設)된 지 오래되었다. 주무릉(周武陵)이 죽계(竹溪)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뒤에 이 서원을 창설한 자는 개암(介庵) 강 선생(姜先生)이다. 개암은 문헌공(文獻公)보다 50년 뒤에 태어나서 선생의 덕(德)을 사모하고 선생의 도(道)를 강론하였다. 향사(鄕士) 약간 명과 마음을 함께하여 협찬해서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및 전문(前門) 수십여 칸을 세워서 선현(先賢)을 존숭하고 후학(後學)을 계도하는 터전을 삼았다. 이어 명명한 것이 각각 의의가 있었으니, 명성당(明誠堂),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와 같은 부류가 바로 이것이다. 또 애련헌(愛蓮軒)이라 하고 영매헌(詠梅軒)이라고 한 것은, 재사(齋舍) 앞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언덕을 쌓아 연꽃을 감상할 만하고 매화를 읊을 만하였기 때문이다.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한 것은, 이로 말미암아 행하면 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서원의 제도가 비로소 크게 갖추어졌다.
그러나 학자들이 강론하고 유식(游息)하는 여가에 마음을 후련하게 풀 곳이 꼭 필요했지만, 선부로(先父老)들이 공사를 시작할 겨를이 없은 지가 지금 수백 년이 되었다. 이에 경자년(1840, 헌종6) 가을에 유생(儒生)들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 가형(家兄) 정환조(鄭煥祖)에게 그 일을 주관하라고 부탁하였으니, 가형이 현인을 존숭하고 도를 보호하는 데 일찍이 성력(誠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립하는 모든 일을 실제로 점검하여 거행하였고, 노광표(盧光表) 군과 강대로(姜大魯) 군과 족제(族弟) 정환룡(鄭煥龍)도 참여하여 도왔다. 모두들 이르기를 “여러 층의 높은 누(樓)를 창립하여 한갓 외관을 아름답게 하기보다는 옛것을 인하여 새로 지어 우리들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고, 드디어 준도문 위에다가 소루(小樓)를 지으니, 누가 상하 모두 10여 칸이다. 다음 해인 신축년 6월 20일에 낙성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많이들 달려와 하례하고 군수 강후 이문(姜侯彝文)도 참석하여 읍양(揖讓)의 모습과 진퇴(進退)의 절차가 성대히 볼만하였다.
누의 제도가 매우 크거나 빼어나진 않지만 장대하고 아름다운 휘혁(翬革)이 면모를 일신하고, 백 척이 안 되지만 높이 솟아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외(郊外)가 평평하고 넓으며 천택(川澤)이 감싸 흐르고, 멀리 있는 숲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저물녘의 노을은 성대하다. 백암산(白巖山)의 몇몇 짙푸른 봉우리가 저녁 빗속에 들어 반이 숨었고, 뇌계(㵢溪)의 한 방면이 아침 해를 띠고 온전히 드러난다. 대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앞쪽 촌락에선 우는 새가 봄을 재촉하고, 농사짓는 옛 마을에선 늙은 농부가 가을철을 안다. 풍월(風月)은 아름다움을 바치고 연하(煙霞)는 기교를 부리니, 눈 깜짝할 사이의 온갖 기이한 모양을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렵다. 이 누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즐거워지며 함영(涵泳)하고 쇄락(灑落)하여 유연히 이러한 의사를 자득(自得)하게 된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의 만 겹 봉우리와 화림천(花林川)의 아홉 굽이 흐르는 물에서 선생의 청풍(淸風)을 보고 선생의 기상(氣象)을 우러러볼 수 있어서 흡사 강석(講席)에 나란히 모시고 증점(曾點)이 쟁그렁 비파를 내려놓고 대답한 아취(雅趣)가 있는 듯함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인하여 ‘풍영루(風詠樓)’라고 명명하였다. 준도문(遵道門)의 옛 현판은 개암(介庵)이 명명하고 매암(梅菴)이 쓴 글씨이므로, 문 위에 나란히 걸어서 선현의 유적을 민멸시키지 않는 뜻을 보인다.
아, 증점은 부자의 문도이고 우리들은 선생의 문도이니, 증점이 부자를 배워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 아취가 있었고 보면 선생을 배우는 자가 어찌 증점과 똑같은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비파를 당겨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봄의 해가 길고 길어 / 麗景遲遲兮
봄옷을 입었도다 / 增乎春服
작은이 큰이 통틀어 / 無小無大兮
관자와 동자 대여섯일세 / 冠童五六
봉황이 높이 날아오르나니 / 鳳凰高騫兮
어찌 내가 유식하지 않을쏜가 / 盍余游息
실컷 한가롭게 노닐어 / 優遊厭飫兮
스스로 터득하게 하노라 / 使自得
이미 대의를 보았으니 / 已見大意兮
이치를 알아 욕심을 벗어나리 / 融理而蛻慾
넓디넓은 남계의 물은 / 灆水之洋洋兮
몸을 씻을 만하고 / 可以浴
높디높은 외로운 대는 / 高臺之屹屹兮
바람을 쐴 만하도다 / 可以風
이 누가 마침 이루어지니 / 玆樓之適成兮
내 장차 읊조리며 가서 노닐리라 / 吾將詠歸渢渢




남계서원 내의 연못


풍영루(風咏樓)를 지나니 좌우에 정방형의 연못이 건설되어 유학의 철학인 균제미와 절제미를 조화시킨 선조들의 정원에 대한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연못은 남계서원 내 땅위의 습기를 제거하고 선비의 마음을 정화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또한 땅을 상징하는 정방형의 연못에 우주를 상징하는 수미산(須彌山)을 만들지 않은 것은 동·서재의 반영이 그 수미산을 대신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남계서원 묘정비각


좌측의 서재 앞에는 남계서원 묘정 비(灆溪書院 廟庭 碑)가 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묘정비는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선생 세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 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년이 지난 1779년 묘정비를 세우면서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金鍾厚)가 남긴 글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문]
咸陽 灆溪書院之碑
咸陽 灆溪書院 廟庭 碑 後學 風流 金鍾厚 撰
奉正大夫 前 行弘陵參奉 黃運祚 書
資憲大夫 前 兵曹判書 兼 藝文館提學 洪樂命 篆

我東自箕子以夷爲華 旣二千有餘年 而儒學猶蔑蔑 高麗有一鄭圃隱 而論者或以忠節掩之 當時盖未知尊也 其卓然爲斯道 倡接墜緖於中土者 實自寒暄金先生一蠧鄭先生 始繼之 以諸老先生六七作 至于今磊落燀爀 而天下道統之傳 歸于 我矣猗歟盛哉然而金鄭二先生 皆遘禍 言論風旨不甚顯 此學者所以想慕痛慨於千載之下者也
鄭先生世居咸陽 子孫尙傳守焉 嘉靖年間 有介菴姜先生翼 倡議立蘫溪書院 以祠先生 丙寅賜額 蓋國朝之有書院 創于周武陵之竹溪 而蘫溪次之 嗚呼 先生者 學者之祖也 蘫溪者 書院之宗也 豈復有尙於此者乎? 書院之作踰二百年 而庭無碑 諸生方謀伐石刻辭以竪之 徵文於鍾厚 鍾厚不敢以匪人辭 謹按
先生事行大致 略著於實紀 而其英姿異行 見聞皆服 斯固大賢之一節 至若究貫經子 辨析性氣 則秋江南公贊述備矣 後生小子 何敢更容模象也哉其旌褒則發自靜菴先生 以及鄭文翼公光弼李文忠公元翼 相繼陳于朝 遂於萬曆庚戌 從祀孔子廟庭
肅宗乙卯 以鄭桐溪先生配享書院 己巳 又享以姜介菴 皆多士疏請得命也 介菴先生 少斥弛不覊 變而之道 醇如也 誠孝出天 學造精微 立法以貴自得 務勉强爲主用 薦除昭格署參奉 未拜而卒 時年四十餘 而同時儕流 推之爲老成宿德焉
桐溪先生諱蘊 擧進士 薦以行誼 尋擢文科 官至吏曹參判 正色直言以立朝 廢主時 斥殺弟錮母妃之議 竄濟州十年 後當仁祖丙子 在南漢圍中 屢抗章 力爭和虜不得 則抽佩刀 剚腹不殊 屛居巖谷以終 遂以身負天下萬世綱常之重 噫 鄭先生之道尙矣
若姜鄭二先生 或以篤學 或以峻節 皆從與享之 斯可以永垂來後而不泯 何待碑哉 雖然 從今以往 入是院而睹是碑者 爲激感於諸先生之道德節義 而知自勵 入而孝順於家於鄕 出而忠於國 則碑亦有助矣 諸君子盍相與勉之
崇禎一白五十二年 己亥 十二月日 建


[해문]
함양남계서원비
함양 남계서원 묘정비
후학인 청풍 김종후는 비문을 짓고
봉전대부 전 행홍 능참봉 황운조는 글씨를 썼고
자헌대부 전 병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홍낙명은 전액을 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미개한 나라를 중화(中華)로 만든 이후 2천여 년 동안에 유학(儒學)은 오히려 미미하였다. 고려(高麗)에 와서 포은 정몽주 한 사람이 있었으나, (포은을)논하는 사람들은 그의 충절(忠節)만을 말하고 유학은 덮어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대체로 유학 이 존귀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에 우뚝하니 사도(斯道)를 위해 땅에 떨어진 유학의 실마리를 중국에서 이어온 이는 실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을 필두로 하고, 이들을 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등, 여러 선생(諸先生)이 대대로 일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빛나서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에 돌아왔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도다.
그러나 김굉필 정여창 두 선생은 모두 화를 입어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모하고 가슴아파하는 이유다.
정 선생(鄭先生)은 함양(咸陽)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개암(介菴) 강익(姜翼) 선생이 발론하여 남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고, 병인년(명종 21, 1566)에 사액(賜額)이 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이 있게 된 것은 주세붕(周武陵)의 죽계서원(현 소수서원)이 최초이며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다.
아! 선생은 학자의 모범이고 남계는 서원의 으뜸이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창건한 지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 선비들이 돌을 다듬고 비문을 새겨 세울 것을 의론하고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짓기를 청하므로 종후는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의 대체(大體)는 실기(實紀)에 대략 나타나 있다. 그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행실은 보고 들음에 모두 탄복하겠으니, 이는 진실로 대현(大賢)의 일절(一節)이라 하겠고, 삼경과 사서를 연구하고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명백히 분석한 것 등은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의 찬술(撰述)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떠서 말하겠는가?
공을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한 것은 정암(靜庵) 선생에서부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계속 건의하여 마침내 만력(萬歷) 경술년(광해군2년 1610)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으니, 이는 모두 여러 선비들의 소청(疏請)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介菴)은 젊어서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으나 자라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도(道)로 들어가 마침내 순후(醇厚)하게 되었으며 타고난 효성에다 학문은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렀고 법도를 세움에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천거에 의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임명되고 나서 곧 죽었다. 이때 겨우 40여 세였으나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들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높였다.
동계(桐溪) 선생의 휘는 온(蘊)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었다. 얼마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엄정한 태도로 곧은 말을 잘하였고 폐주(廢主 광해군) 때에는 아우를 죽이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하는 의론을 반대하다가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 살았다.
그 후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되지 않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할복(割腹)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은퇴하여 산속에서 세상을 마침으로써 천하 만대의 막중한 강상(綱常)을 한 몸에 짊어졌다.
아! 정 선생의 도는 높기도 하였고 강익과 정온 두 선생은 하나는 독학(篤學)으로, 하나는 높은 절의로써 모두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후세에 썩지 않을 만하니 어찌 비석을 세워야만 전할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이후로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를 보는 사람들이 이 비로 해서 여러 선생들의 도덕과 절의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마을에서 공순하며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면 이 비를 세우는 것 또한 도움 됨이 있을 것이리니, 여러 군자들은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가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쓰다.


출처 및 참조
남계서원 묘정비(灆溪書院廟庭碑)|작성자 영천선비
지리산의 금석문-윤관백/선인(2016.10.31.)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蘫溪書院誌卷之一 남계서원기(灆溪書院記)

한국서원이야기-남계서원지(전문)/박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