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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구 동정동 김녕김씨 김업백의 묘비

천부인권 2019. 5. 13. 21:25



2019.5.10 천주산 입구에서 본 김업백 묘


의창구 동정동 산 100번지는 천주산의 남동쪽 산 가장자리로 창원북면 굴현고개에서 내려오는 정렬대로와 인접해 있는 곳이다. 의창구 정렬대로 119의 GS셀프주유소에서 서쪽으로 190m 떨어진 산야에 김녕김씨(金寧金氏) 처사 김업백(處士 金業白)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그의 5대조는 백촌 김문기(金文起 1399~1456)이다.




김업백의 묘소와 석물


處士金寧金公之碑
公諱業白金寧金氏 系出新羅敬順王 高麗平章事諱時興 受封金寧 故子孫因 爲貫焉李朝諱光儲 贈吏曹判書是有子順 行戶曹判書 贈領議政是有子觀 吏曹判書 贈領議政是有子文起 吏曹判書號白村 莊光之際與六臣同殉于節 長子玄錫 亦從死逮至 正廟朝復公官爵 贈謚忠毅公配亨忠臣壇 是爲公五世祖也 高祖曰正錫 曾祖曰忠稷 祖曰先之 父曰石鍊 軍資監正 妣某貫某氏 公生某甲卒某年 葬 昌原郡冠谷亥坐原 配南平文氏育 一男潤福 贈嘉善 噫公 以名祖之後 絶意進取 淪落海鄕沒 而無聞盖 以先世椓喪之餘畏禍潜伏也 豈不可惜也 哉後孫昌權 篤於慕先去 辛卯與諸族樹 白村先生祭壇碑 今又營碣於公之墓 徵名於不侫銘曰 白老殉忠凜凜烈烈有如 是祖世爲名閥公 曾繩武想不無蹟逸 而罔傳後 人嗟惜冠谷之原 軆魄攸藏慈孫 劚珉百世之光
歲庚戌葽夏節 廣州安鍾禧 撰
                    達城徐禎賢 謹書





처사김녕김공의 비(해문 일부)
이름은 업백(業白)이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왔으며 고려평장사를 지낸 시흥(時興)이 봉토로 받은 곳이 김녕(金寧)이다. 자손은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이조(李朝) 때 광저(光儲)가 이루어 다스린 곳으로 증(贈)¹⁾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순(順)이 있으며, 행(行)²⁾호조판서 증(贈)¹⁾영의정을 지낸 아들 관(觀)이 있고, 이조판서를 지내고 증(贈)¹⁾영의정을 받은 아들 문기(文起)³⁾가 있다. 이조판서의 호는 백촌(白村)이다. 장광지제(莊光之際)⁴⁾에 사육신(死六臣)⁵⁾과 동일하게 순절했다. 장자 현석(玄錫) 또한 잡혀 뒤따라 죽었다. 정조임금 때 공의 관직이 다시 복구 되었는데 공은 증시 충의(贈謚 忠毅)가 되고 부인은 형충신단(亨忠臣壇)인데 공(公)의 5세 조(祖)이다.
고조는 정석(正錫)이고, 증조는 충직(忠稷)이며, 조부는 선지(先之)이고 아버지는 석련(石鍊)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어머니는 모관 모씨(某貫 某氏)로 공은 모년(某年)에 태어났고 갑년에 돌아가셨다. 모년에 창원군 갓골 해좌원(亥坐原)에 장사를 지냈고 배우자 남평문씨는 아들 윤복(潤福)을 길렀고 증가선대부(贈嘉善)다. -중략-
1970년 4월 광주 안종희가 짓고
            달성 서정현이 삼가 씀


 



【주석】
증(贈)¹⁾ : 죽은 후 내린 벼슬
행(行)²⁾ : 실재 관직은 현재의 관직보다 높지만 현재하는 일이 낮아 관직 앞에 붙여 지금 하는 직책보다 높은 관직임을 표하는 경우이다.
문기(文起)³⁾의 초명은 김효기(金孝起)이고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이며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창원 입향조 김관(金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장광지제(莊光之際)⁴⁾ : 단종(端宗)이 양위(讓位)하고 세조(世祖)가 찬위(簒位)한 때.
사육신(死六臣)⁵⁾ :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잡혀 죽은 여섯 명의 충신. 곧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말한다. 이후 사육신에 김문기(金文起)가 포함되고 유응부(兪應孚)을 뺀 경우도 있으나 현재 사육신의 사당에는 위패 7개를 모시고 있다.


□ 안종희(安鍾禧)(1896~1985) 호(號),근파(槿坡), 정통 퇴계학파의 마지막 거유로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문장덕행이 세상에서 유종으로 추앙받았으며, 사림들이 회동(會同)하여 선생(先生)으로 추존하다. 재실로 근파재(槿坡齋)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근파문집(槿坡文集) 상·하권이 있다.


출처 및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문기
근파문집-三省印刷社(1988.5.1.)/근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