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모산리의 박문호·박해철 불망비

천부인권 2019. 6. 24. 17:19



2019.4.30대산면 모산리 박문호 박해철 불망비



2019.4.30 모산리 박문호 영세불망비


창원시 대산면 모산리 247-22번지의 모산리 도로변에 위치한 2기의 불망비(不忘碑)는 박문호(朴文琥, 1833-1917. 12. 9)와 그의 아들 박해철(朴海徹, 1868~1934)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이다. 이 비가 위치한 높이는 해발 10m이며, 「위도 35°21′19″N 경도 128°42′44″E」이다.
박문호는 중림(重林,지금의 인천)道, 수성(輸城,지금의 함경도 경성)道, 사근(沙斤, 지금의 경남 함양)道의 각 찰방을 지냈고 영덕군수(1902. 7-1903. 12 재직)를 지냈던 사람이다. 박문호와 박해철은 모두 밀양 무안면 삼태리에 살았다. 비의 전면에는 아래처럼 기록했다.


政大夫行盈德郡守密陽朴公諱文琥永世不忘碑(정대부행영덕군수밀양박공휘문호영세불망비)
天挺吾公 濟活萬人  하늘처럼 빼어난 우리 공은 만인을 구제 했네
扶危急困 賙窮恤貧  위급한 곤경에 처한 이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다.
覆盆照日 寒谷回春  억울한 죄목을 밝혀 주니 추운 고을에 봄이 돌아오네.
紀功勒石 永世不湮  돌에 공을 새겼으니 영원히 묻히지 않을 것이다.


비의 뒤면에는 아래처럼 기록했다.

[해문] 김정현

贊曰 公                              지은 말에 공은
密城華閥 當世活佛              밀성의 드러난 문벌로 세상에 살아있는 부처로세.
耆年淵德 推己及物              노년에 깊은 덕으로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쳤으니
非是市恩 愍斯流乞              이것은 은혜 베푸는 일이 아니고 떠돌며 걸식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惠不可諼芳 街謡巷誦難足喻 은혜가 향기를 속일 수 없으니 거리에서 놀고 골목에서 외우는 것을 비유하기 어렵다.
心欲思報芳 天長地久豈能訖 마음이 덕행에 보답하고자 생각하니 영원토록 어찌 그치겠는가.
萬口成碑 千秋有屹              모든 이가 비석을 세우려니 오래도록 우뚝하리라.
指彼月山 芳山截彼而深秀     저 월산(月山)을 가리키니 방산(芳山)의 저 끊어짐이 깊고 빼어나서
誓斯洛水 芳水如斯而不汔     이 낙수에 맹서하니 방수가 이와 같이 거의 마르지 못하네.
發起 金碩柱, 朴在夏, 金應旭, 崔永桓, 金學根, 金永玉, 金基玉,
贊   金載頀
筆   朴敬杓
上元戊午四月 日



2019.4.30 모산리 박해철 시혜불망비


박해철시혜불망비의 제원은 전체높이 158cm, 비신높이 117cm, 너비 39cm, 두께 15cm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비에 새긴 글을 옮기고자 했지만 글씨가 흐려 아래처럼 확인했다.

박해철(朴海徹, 1868~1934.6.1)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공요(公堯)이고 호는 창번(滄樊)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경상북도 영덕(盈德)에서 태어났다. 정국군 박위장군의 후예로 증조부는 박기은(朴基殷)이고, 조부는 박치록(朴致籙)이며, 부친은 박문호(朴文琥)이다. 외조부는 손승욱(孫承郁)이고, 처부는 손철헌(孫哲憲)이다.
1892년(고종 29) 임진(壬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51위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기주관(記註官)을 거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봉보관(捧寶官)을 역임하고 고향인 영덕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셨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의관(議官)에 임명되었으나 한일합병의 조짐을 알고 고향인 밀양 무안면  삼태리에 돌아가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 『창번집(滄樊集)』 8권 4책이 있다. 비의 전면은 아직 파악을 다하지 못했다.


『前校理密城朴公海徹施惠不忘碑(전교리밀성박공해철시혜불망비)』
孝承先有 惠及宷篰
上元戊午年五月


비의 뒷면과 측면에는 아래처럼 기록 했다.
贊  張永兌
監督 李圭澤
發起前司果 李待榮 金奎晟 金景鶴 張注植 安丁遠 李鍾箕 丁大洪 安昌鎬 朴東爕 金景珍 金安洛 羅彩文
   

출처 및 참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