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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진전면 평암리 상평 중말마을 김유인효행기적비

천부인권 2019. 7. 6. 08:06



2019.7.2 평암리 상평 중말마을의 김씨부인 효행기적비


진전면 평암리 947-1번지는 평암로와 상평중말길이 만나는 지점의 길가에 위치하며 이곳에는 붉은벽돌로 담장을 하고 그 중앙에 『김유인효행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를 세웠다. 김씨부인의 효행에 근거하여 근대에 세운 이 비석은 인간이 인(仁)을 행함에 지극함을 다하면 누구나 본 받을만한 스승이 됨을 알리기 위해 마을의 어귀에 세운 표석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인성을 잃고 있음을 볼 때 도시의 곳곳에도 효를 다한 사람들의 비석을 세우는 것도 고려해 봄직한 일이다. 효(孝)는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나를 포함해서 요즘 사람들 하는 짓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씨부인이여!
당신의 아름다운 효행에 고개를 숙입니다.





[원문]
金孺人孝行紀蹟碑
孝婦金氏貫金海 忠貞公諱宇杭 八世孫永培之女也 幼順婉聞孝友 歸曺馹承家貧親老不克甘旨 孺人賃績於人以養舅姑 其姑李氏偶得喘崇 漸至加劇臥起出入 藥餌滌瀡必親自身之 夜必禱天請代者四十年如一日 及其急也 斫指注血得甦 姑語人曰 吾支於此日 吾婦之孝也 以天年終哀毁逾禮喪葬之節從其夫志稱禮 舅性嗜酒 常備無闕年至 期耄請益多 而供益勤 夏則扇而凉之 或至夜不交睫 又發背疽試藥百方 而不奏效竟吮而復 常年九十二而病革 亦灌血未回哭泣 喪葬一如前喪當喪餘之日 必求所嗜而致如在之誠 隣里感動曰 金氏之孝未始見也 世且不古惜哉 咸以賞物褒狀遺之 孺人辭之曰 吾爲吾職惟恐不克 是何當焉 孺人生於 高宗丁亥十二月十四日卒 于庚寅七月十八日 年六十四日里之人期使孺人之孝不沒也 聯狀于本郡鄕校鄕中章甫見 而稱之曰異哉孝也 孝爲仁之本也 雖然今世道 如許表閭樹風推噓後日 而己以孺人卓孝龜鑑于 吾鄕爲人婦者可也 遂爲褒狀 而歸之旣而嶺之士大夫 續修東國文獻錄 孺人之孝編入於孝行篇 曺氏籍夏城府院君 襄平王公諱益淸之后 孺人生二男長秉出次秉台 秉出男禮煥明煥榮煥潤煥 女權五律 族人秉大示鄕校褒狀曰 將伐石而刻之請 子一言而表之不杇 孺人之孝 余辭之經年 而無應其請 益勤乃爲之銘曰
吁嗟金氏孝 兮曷闡世入 滄桑邦無舊典表黌堂狀著 文獻券最難者所指疽萊生死 如一是爲盡道刻之于石千祀之告
壬子三月立 咸安 趙學來 撰
                 完山 李雨燮 書


[해문]
김유인효행기적비-김씨부인의 효행을 적은 비
효부(孝婦)인 김씨부인의 관향은 김해로서 충정공(忠貞公)이신 휘 우항(宇杭)의 8세손 되는 영배(永培)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유순하고 아름다웠으며 효도와 우애로서 소문이 났다. 조일승(曺馹承)에게 시집와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연로한 시부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릴 수 없어서 유인(孺人)께서 남의 집에 길쌈의 삯을 받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봉양하여 오던 중 그 시어머니 이씨(李氏)가 우연히 천식병(喘息病)을 심하게 얻어 점차 위독하게 되자 눕히거나 일으키거나 나가고 들어올 때 약재를 달여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을 반드시 자신이 몸소 하셨으며 밤이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시모님의 병을 자신에게 대신 주십사하고 하늘에 기도한 것이 4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위급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흘러 넣어 다시 소생(蘇生)을 시켜드렸더니 시어머님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부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부(子婦)의 효성 때문이다.」하시었다.
천수(天壽)를 누리시고 돌아가시자 몸이 상할 정도로 애통해 하셨고 상례(喪禮)나 장례(葬禮)의 절차를 그의 남편의 뜻을 따라 예에 알맞게 치루었다. 시아버지께서 술을 즐기셨으니 항상 준비하여 두고 떨어진 적이 없으며 연세가 90세가 되도록 더욱 많이 요청할수록 제공하기도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며 여름철이면 부채질을 하여 서늘하게 하여 드리고 때로는 야간에 눈썹을 부쳐 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등에 종기가나서 백방으로 약을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을 보지 못하자 마침내 빨아서 정상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세가 92세에 병이 위독하시자 역시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곡읍(哭泣)하고 상장(喪葬)하기를 한결같이 전번(前番)의 시어머니 상시(喪時)와 같이하였다. 상기중(喪期中)에도 여가 있는 날을 이용하여 반드시 생전에 즐겨 자시던 음식을 상식(上食)¹⁾ 갖추어 놓고 마치 살아계실 때 봉양하던 정성과 같이 하였더니 이웃 마을에서까지 감동하여 말하기를 「김씨유인(金氏孺人)의 효성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하던 것이다. 세상도 또한 옛날 같지 않는데 아깝구나.」하고는 모두가 상품을 주고 포양(褒揚)²⁾하는 상장을 주니 유인(孺人)께서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자식된 직분을 오히려 능히 다하지 못하였는지 두려운데 이런 것이 어찌 나에게 해당 되리오」하였다.
유인(孺人)께서는 고종 정유(1887)년 12월 14일에 태어나서 경인(1950)년 7월 18일에 돌아가셨으니 연세는 64세이었다.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유인의 효행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하여 연명으로 본군 향교에 서장(書狀)을 올리니 향중의 학자분들이 보시고는 칭찬하며 말하기를 「특이(特異)하구나 효도함이여! 효도란 인을 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도(世道)가 옛날 같지 않은데도 유인은 이와 같이 효도를 하였으니 정려(旌閭)를 표함을 허락하여 미풍을 수립하여 후일에 전해야 한다. 유인의 탁월한 효도는 우리 향리(鄕里)에서 사람들과 부인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마땅하다.」하시고는 더디어 포장(褒狀)을 주어서 그들(추천한 마을 사람)을 돌려 보냈다. 그 뒤에 영남의 사대부들이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의 속집을 편수(編修)할 때 유인의 효행이 효행편에 편입되었다. 조일승(曺馹承)씨의 본적은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으로 양평왕(襄平王;諡號³⁾)이신 익청(益淸)의 후손이시며 유인께서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병출(秉出)이며 차남은 병태(秉台)이다. 병출의 아들은 예환(禮煥), 명환(明煥), 영환(榮煥), 윤환(潤煥)이고 딸은 권오률(權五律)에게 시집 갔다. 족인이 병대(秉大)씨가 향교에서 내린 포장(褒狀)을 보고 말하기를 「장차 비석을 다듬어서 새기려 하노니 청컨대 자네가 한말씀 써주시어 표하여 유인의 효행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사양하기를 한해가 지나도록 응하지 않았더니 그가 요청을 더욱 부지런히 하므로 그제야 그을 위하여 비명을 짓노라 아! 장하다! 김씨부인이여! 효도를 하였는데 어찌 밝게 밝히지 않을소냐. 세상이 벽해(碧海)가 상전(桑田)⁴⁾으로 변하여 나라 안에 옛 법도가 없도다. 향교에서는 포장을 표하고 문헌인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저술되었도다.
가장 어려웠던 바는 손가락을 자르고 종기병을 빠는 일이었네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이 봉양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효도를 다하였다고 하겠네. 비석에다가 새겨 놓았으니 영원토록 고(告)하여 가리라.
壬子(1972)삼월 세움 함안 조학래( 趙學來) 짓고
                              완산 이우섭(李雨燮) 쓰다.


【주석】
상식(上食)¹⁾ : 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빈소 앞에 차려 올리는 음식
포양(褒揚)²⁾ : 칭찬하여 장려함.
시호(諡號)³⁾ : 생전의 행적을 사정하여 사후에 임금이 내려 주는 호칭
벽해(碧海)가 상전(桑田)⁴⁾ : 푸른 바다가 뽕밭으로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덧없이 바뀐다는 말.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