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 구산면 심리 신씨 정열각의 진실

천부인권 2019. 7. 11. 06:00

 

2016.10.15 창원 구산면 신씨 정열각

구산면의 옛 해산 이은춘(海山 李殷春) 선비가 “구산면 심리의 영산신씨 정렬각”이 오류가 있어 바로 잡아보고자 1956년 유림(儒林)에 통문(通文)을 보낸 글이 있다. 그러나 이 통문은 왜 알려지지 못했으며 이후 창원향교지(昌原鄕校誌:2004년)나 마산문화지(馬山文化誌:2004년)의 발행 때 참고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은춘공의 통문 내용에는 칠원읍지(漆原邑誌)의 기록을 근거로 영산신씨(靈山辛氏)가 아니라 평산신씨(平山申氏)라는 점을 밝히며 오류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당시 칠원읍지의 기록을 보고 창원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렸다면 분명 유림사회에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면 왜 통문을 받은 이후에 창원향교지가 기록한 글들은 평산신씨로 수정하지 않고 영산신씨의 이야기만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심지어 창원향교 전교를 지낸 노병덕씨는 정열각을 불 지르고 현판을 던진 자를 왜인(倭人)이라 했고 창원향교지에는 러시아인(俄人)이라 기록 했을까. 이처럼 기록이 다른 것은 구비(口碑)되는 이야기를 듣고 적고,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어찌됐던 칠원읍지에는 이 정열각의 주인공은 평산신씨 “신량금(申良今)”의 이야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기록이 있었다 해도 국가에서 발행한 공식적인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을 따르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아래 원문은 당시 이은춘공(李殷春公)이 보낸 통문이다.

 

211127구산면 심리 열부신씨정려각 내부

[원문]
烈女閣 通文
惟我坊內深里村 有一烈女旌閭顔之曰 故烈婦靈山辛氏之閭 傳聞此烈女事行則 居在右村 元來無子女 無族戚 但夫婦相依生活中 忽然一夜 有虎而來 噬夫而去 孑孑單身手 無所持扶執虎尾咬尾噬脚 虎死夫死自身亦死 矣厥後 歲久無旌表之典 烈女靈魂 自現于官 自官擧報于朝 特賜旌表之典 立閭于深里村 伊來數百年 累次重建 而顔之曰 如石矣傾年關覽于舊漆原邑誌 該烈女姓申氏貫平山名良今 昭詳載在 鳴呼昔者羊公穀梁以尹氏 卒爲正卿左氏以尹氏 卒爲隱母 一以男子 一以婦人 二說皆傳聞 傳聞不可 信云云也 由此觀之 今吾坊之靈山辛氏傳聞 邑誌之平山申氏史筆也 傳聞不可信 史筆可信也 故依邑誌改修則 文之筆之 刻之與木材之 所要金額多大 矣玆以仰懇望須諸賢 以追慕之誠 多少援助 千萬伏望
檀紀四千二百八十九年 九月
李殷春 記

 

[해문]
열녀각 통문
우리지방 내의 심리촌에 열녀 정려각이 하나있는데 현판에 『고열부영산신씨지려(故烈婦靈山辛氏之閭)』라고 씌어 있다. 이 열녀의 행위를 전해들어보니 우촌(右村)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원래 자녀도 없고 친척도 없이 다만 두 부부가 의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홀연히 어느 날 밤에 오랑이가 와서 남편을 물고 가거늘 혈혈단신에 맨손으로 호랑이 꼬리를 잡고 쫓아가면서 꼬리를 물고 다리를 물고 늘어지니 호랑이도 죽고 남편도 죽고 자신 또한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도 이를 나타내는 정표하나 없으니 열녀의 영혼이 스스로 관가에 나타났고 관가에서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특별히 정표의 은전을 받아 심리촌에 정려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 여러 번 중건을 하여도 위와 같이 현판은 그대로 였다. 그런데 옛날 칠원읍지(漆原邑誌)를 열람해 보니 해당 열녀의 성은 신(申)씨요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이름은 양금(良今)이라고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 옛날 양공곡양(羊公穀梁)에는 윤씨로서 마침내 정경(正卿)을 삼았다 하였고 좌씨(左氏)에는 마침내 은모(隱母)로 삼았다 하였으니 한군데서는 남자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부인이라 하는 등 두 군데의 말이 모두 전해오는 소문일 뿐, 전해오는 소문은 가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우리 지방에 전해오는 영산신씨(靈山辛氏)는 전해오는 소문이지만 읍지에 나오는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역사의 기록이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지만 역사의 기록은 가히 믿을 만하므로 읍지에 의하여 다시 고쳐 쓰려면 글을 짓고 붓으로 쓰고 다시 새겨야 할 것이다. 나무의 재목도 소요되니 금액이 많이들 것이다. 이에 우러러 바라옵건대 모든 어진 현인들은 추모하는 정으로 다소나마 도움을 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단기 4289년 9월(서기 1956)
이은춘(李殷春) 쓰다.

 

 

□ 해산 이은춘(海山 李殷春) : 전주이씨(全州李氏) 덕천군(德泉君)의 후예로 1881년 12월 19일 창원군 구산면 상마전리에서 아버지 이영하, 어머니 정귀선의 제6남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 진북면 정삼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년시절에 한강 정구의 학풍을 쫓으며 성리학을 공부했다. 창원향교에서 가까운 허정덕, 화산 임재식 등과 함께 지역유림으로 활동 했다. 1966년 11월 7일 생을 마감한 공은 창원지역의 유림 중 한분이다. 저서로 『해산유고-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이다.』가 있다.

 

국역 칠원읍지-1996년

이은춘공(李殷春公)이 보았다는 근거가 된 칠원읍지(漆原邑誌)의 내용을 살펴보니 열녀 본조편(烈女 本朝篇)에 신량금(申良今)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국역 칠원읍지/[원문 49p,해문 257p])
[원문]
申良今 - 其夫爲虎所殺 抱其夫腰 隨入山中 同爲噬死 事聞旌閭
[해문]
신량금(申良今)-그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남편의 허리를 안고 산중에 따라 들어가서 호랑이에게 함께 물려 죽었다. 그 절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가 내렸다.

 

 

 

아래에는 창원향교지와 마산문화지에 실린 신씨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창원향교지 하권 905p의 기록
(13)영산신씨(靈山辛氏)
열부인의 관향은 영산신씨(靈山辛氏)이다. 원래 빈궁(貧窮) 고독으로 부부만이 생활하던 중 어느 날 남편이 虎攫之變(호확지변)을 당함에 신씨(辛氏)가 창황(愴惶) 중 칼을 들고 쫓아가 호랑이의 꼬리와 발을 자르며 사력을 다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죽고 사투에 기진한 자신도 순절하였다. 이를 가련히 여긴 동민이 장사를 치룬 뒤 현재(縣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인마(人馬)의 발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유를 물은 즉 전후 사실을 안 현감은 향사림(鄕士林)으로 하여금 倡動聯章(창동연장)을 상소케 하였다. 英廟 丙辰(영묘 병진, 1736)에 정려가 내려져 각을 건립하여 오던 중 건물이 너무 낡아 純廟 乙亥(순묘 을해, 1815)년에 중수 하였으나 光武 庚子(광무 경자, 1900)년에 俄人(아인, 러시아)이 내침하여 불 지르고, 명판을 물에 던진 방화적(放火賊)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후에 甲辰(갑진, 1904)에 뜻밖에 해조에서 그 명판이 드러남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관에 고하여 명판을 인계하여 건물을 지었으나 庚寅(경인, 1950)년에 兵火(병화)로 또 소실이 되어 4년 후 癸巳(계사, 1953)년에 동민의 힘으로 4차 건립하여 제를 올리며 마을 수호신으로 숭앙해 왔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훼손 되자 동민들이 己巳(기사, 1989)년에 진심갈력(盡心竭力) 하여 훼구중건(毁舊重建)하여 신열부인(辛烈婦人)의 정열(貞烈)을 추모하고 있다.

 

211127심리 열부신씨정려 편액


영산신씨정열각(靈山辛氏貞烈閣)-마산문화지 105p의 기록
대저 열행(烈行)이란 인도(人道)의 덕목 중 하나이니 그 얼마나 귀중함이랴. 진실로 그를 유능한 자 있다면 반드시 이를 독문(篤聞)하여 포양(褒揚)함이 향림(鄕林)의 상사(常事)요 조가(朝家)의 상전(常典)인 것이다. 고향(故鄕) 구산면 심리(龜山面 深里)에 열부여각(烈婦旌閣) 한 채 있으니 그 열부는 영산신씨로 기부(其父) 성명(姓名) 일이무전(逸而無傳)이다.
원래 빈궁고독(貧窮孤獨)으로 살면서 이곳에 결거(結居)하여 단(但) 부부만이 생활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남편이 호확지변(虎攫之變)을 당하였다. 신씨(辛氏) 황중(遑中) 칼을 들고 추주(追走)하여 호(虎)와 미(尾)와 삼교(三咬)하여 사력을 다하였으나 부(夫)는 이미 불행(不幸)하였다. 자신도 또한 사투(死鬪)로 기진하여 순열(殉烈)하였다.
리인(里人)들이 가련히 여겨 수해매장(收骸埋藏)하였더니 그 얼마 후 현제(懸宰)가 그곳을 행과(行過)케 되었는데 인마(人馬)의 발이 마비되어 이동불능인지라 현재(懸宰) 이상히 여겨 이인(里人)을 소문하니 신씨의 사적을 시지(始知)하셨다. 이에 향사림(鄕士林)을 (창동연음(倡動聯音) 상문케하여 정려를 덕몽(得蒙)하게 되었으니 때는 영조(英祖) 병진년(丙辰年)이었다. 다시 정조(正祖) 을해(乙亥)에 여각(閭閣)을 중수하였는데 고종(高宗) 경자(庚子)에 왜인(倭人)의 내침으로 정려의 소실(燒失)에 게(揭)되어 있던 명판(名板)은 투수표실(投水漂失)되고 방화적(放火賊)은 즉일(卽日) 구혈폐사(嘔血斃社)하였는데 오년 뒤 갑진(甲辰)에 뜻밖에 해(海)에서 게양(揭揚)하였더니 경인병화(庚寅兵火)에 소실(燒失)되어 사년 뒤 계사(癸巳)에 리민(里民)의 힘으로 사건(四建) 하였다.
예부터 정려에 세제(歲祭)를 올리고 마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숭앙(崇仰)해 오던 중 여각(閭閣)이 세구(歲久)됨을 민망히 여긴 리민(里民)들이 거(去) 기사년(己巳年)에 진심갈력(盡心竭力)으로 성금을 갹출(醵出)하여 중수하였다.
희(噫)라 신씨(辛氏)는 연약(軟弱)한 부녀의 몸으로 맹호와 싸워 그 배를 갈라 부육(夫肉)을 발출(發出)하였으니 신씨 열행이 감천통신(感天通神)되어 하늘이 그를 창렬신원(彰烈伸寃)코져 영이(靈異)한 기응(奇應)이 현(顯)함이나 어찌 천도(天道)가 무심하다 하리 그 정열위적(貞烈偉蹟)은 천양(天壤)과 함께 영전(永傳)할지며 리중인사(里中人士)의 전후호성(前後好誠) 또한 높이 평가 되어 족히 내세에 긍식(矜式)되리로다.
근저(近著) 이 사람이 신열부(辛烈婦)의 사적을 듣고 깊이 감탄흠모(感歎欽慕)한 바 있었는데 오늘 그 투사(投事)를 당하고 본향(本鄕) 정갑호군(鄭甲鎬君)이 그 기문을 청하기에 약선호의지심(藥善好義之心)이 유연(悠然)히 생하여 그 청에 사양치 않고 여기에 오수기문(五修記文)을 쓰다.
西紀1990年 2月 日
昌原鄕校 典敎 盧秉德 撰

 

211127심리 열부신씨정려각

故烈婦平山申氏之閭 [전문]
고 열부 영산신씨의 정려


張娘剚虎 장씨 여인¹⁾은 호랑이를 찔렀고
李嬀投河 이씨 여인²⁾은 물에 몸을 던졌어라
有虎噬夫 어떤 호랑이 지아비를 씹어 먹고는
鼓呀嘃谷 골짝에서 포효하며 으르렁거렸네
赤手自赴 맨손으로 홀로 가서는
咬尾嚙脚 꼬리를 물고 다리를 물었어라
惡獸無靈 흉악한 짐승은 영험함 없어
反害姱節 도리어 아름다운 절개를 해쳤네
行著旌閭 행실은 정려의 문장에 드러났고 
名表棹楔 이름은 정려각에 표창되어있네
巍歟申氏 우뚝하여라 신씨여
烈炳竹帛 정렬이 역사책에 실려 있네 
龜城千載 구성龜城³⁾은 천고에 영원히 
燕烈同轍 열녀 연이燕伊⁴⁾와 함께 전해지리라

命旌 乾隆二年     정려를 명한 때 1737년
  重修嘉慶二十年     중수는 1815년
  三建庚申六月 日    3번째 건립은 1920년 6월 어느날
  四建癸巳三月 日    4번째 건립은 1953년 3월 어느날
  五建己巳十一月 日 5번째 겁립은 1989년 11월 어느날

 

【주석】
장씨 여인¹⁾ : 장씨 부인은 기록으로 찾을 수는 없지만 분명 칠원군, 당시 구성현에 속한 인물이다. 
이씨 여인²⁾ : 교리校理 주박周愽의 아들 주익창周益昌의 처이다. 계사년癸巳年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지리산으로 피신했는데,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사망하였다. 이에 정려가 내려졌다. 《칠원현 읍지(漆原縣邑誌)》
구성龜城³⁾  :  옛 칠원漆原의 월경지로서 칠원현漆原縣에 속한 지역이었고, 지금의 구산면에 위치했다 기록되어 있는 구산성龜山城을 말한다.
연이燕伊⁴⁾  : 귀산에 정경丁敬이라는 자가 욕보이고자 하니, 응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켜 죽었다. 정문旌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칠원현 열녀〉 

 

출처 및 참조
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다-이은춘(해문 이봉수)/자연과 인문(2011.3.7.)
국역 칠원읍지-함안문화원(2015.12.24)
창원향교지-창원향교(2004) 하권 905p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105p:영산신씨정열각/창원향교 전교 노병덕(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