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남원광장에 남은 김구선생 친필 시비의 사연

천부인권 2019. 8. 16. 08:55



2010.2.7 남원광장의 김구선생 친필 비


왜구가 러일전쟁의 승리를 찬양하며 건설한 지금의 구 진해시가인 남원광장은 진해구 태평동 103번지이다. 이곳에는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의 친필로 남은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 새긴 시비가 서있다. 이 시비의 상부는 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비를 훼손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비가 처음으로 세워진 때는 1946년에 백범 김구선생이 해안경비대에 방문하여 해방의 기쁨을 태화여관(확실치 않음)에 머물면서 이순신장군의 진중음(陣中吟)을 친필로 쓴 것이라 한다. 당시에는 두 개의 시비를 남원광장이 아니라 북원광장에 세웠다. 짐작건대 한 개의 사라진 시비의 내용은 “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2016.10.14. 진해구 충무공이순신동상


북원광장에 세운 김구선생의 두 시비는 1949년 6월 6일 독재자 이승만이 장개석 총통과 만남을 위해 진해해군사령부를 방문하면서 북원광장을 지나다가 “아직도 저 비가 서있나.”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 말을 전해 들었을 싹수가 빨갱이 출신인 당시 사령관(준장)이었던 김성삼(金省三)이 시비의 훼손을 지시했을 것이다. 김성삼이 아니라면 당시 서슬 퍼런 군인들이 설치는 세상에 누가 감히 시비를 훼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1946년 6월 26일 오후 서울 경교장에 기거하던 백범은 붓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인 안두희가 찾아와 살해 했다. 그해 8월 8일에 이승만과 장개석이 해군사령부의 별장에서 회동을 한다. 이 만남의 자리를 가지게 만들었던 인물은 골필의 대가인 육천 안붕언(育泉 安朋彦 1903~1976)이다.


현재 북원광장에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은 6.25동란 중인 1952년 4월 28일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장군 동상으로 매국노 윤효중이 제작하고 독재자 앞잡이 이은상이 찬양한 첫 번째 동상이다.
북원광장에 있던 김구선생의 친필 시비 훼손을 지시한 싹수가 빨갱이 출신인 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49년 해군 참모부장(대령)으로 근무하여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함북명천’을 대표하는 창원갑 국회의원을 지낸 대표적 반공주의자 흉내를 낸 위험한 인물이다.


육천 안붕언(育泉 安朋彦)선생이 장개석 총통과 친구가 된 것은 이승만의 역할이다. 이승만이 장개석에게 한반도 정세와 협력에 대한 친서를 보냈는데 그 글씨를 안붕언 선생이 썼다. 그 글씨를 본 장개석은 안붕언에게 친구로 지내자는 서한을 보내 왔고 안붕언을 만나기 위해 이승만과의 만남에 응했다고 전한다. 육천제 안붕언 선생은 창원시 동읍 화목마을 출신이다. 이후 이승만이 안붕언을 서울로 초청했지만 안붕언은 대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머무르며 생을 마감했다. 안붕언은 아마도 서울에 가면 자신의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 때문이라는 설이 나돈다.


진중음(陣中吟) -이순신-

天步西門遠 임금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고
君儲北地危 왕자들은 북녘에서 위태로운데
孤臣憂國日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壯士樹勳時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誓海魚龍動 바다에 맹서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盟山草木知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讐夷如盡滅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 죽음일지라도 어찌 사양 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