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팔의사묘역 앞 변상태 지사 기적비

천부인권 2019. 9. 11. 07:52



2019.8.26. 석당 변상태 선생 기적비


진전면 양촌리 198번지는 삼진의거 당시 숨진 8의사 묘역이 있는 곳이다. 그 8의사 묘역(김동수,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앞 한 계단 아래 영역에 그날 함께 만세를 불렀던 변상태 지사의 기적비(紀蹟碑)가 서 있다. 이 변상태 기적비는 화강암의 기단 위에 비희(거북)을 조각하고 비희 위에 청석의 비신을 세웠으며, 이수는 화강석으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조각을 새겼다. 남쪽을 바라보는 비의 정면에는 지사석당변상태선생기적비(志士石塘卞相泰先生紀蹟碑)라 음각하였고 한글로 적은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사석당변상태선생기적비 志士石塘卞相泰先生紀蹟碑
조국을 빼앗긴 분노는 구천을 메웠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열의와 투지는 사해에 넘쳤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로 정명교, 황병기 등과 뜻을 모아 엽총 등을 무기로 창의 준비를 했으나 일제헌병에게 탐지됨에 총기를 불사르고 뜻을 펴지 못한 채 뒷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8·15광복의 그날까지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자리의 따스한 날이 없었으나 그 일편단심은 봄의 선구자 진달래꽃보다 더 붉게 타올랐음이랴!
선생은 초계변씨 28세손으로 1889년 10월 11일 경남 의창군 진전면 양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경재요 호는 석당(石塘)이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여 국정의 잘못을 통탄하더니 부산상실학교 3학년이던 1910년 일제침략으로 나라를 잃자 최기택, 성학영 등 여섯 동지와 조국광복을 위해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결연히 학교를 중퇴 대붕회를 조직한 뒤 동지규합에 전념하다가 1919년 윤상태,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50여 동지와 대동청년단에 가입 모험부장이 됨으로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책임을 졌다. 대동청년단은 당시 국내에 기반을 가진 유일한 독립운동결사였다. 1919년 2월 하순 대동청년단 동지들로부터 전보를 전하고 상경하여 만세의거에 참가한 뒤 서부 경남 일원의 중책을 띠고 귀가 하였다. 그리하여 함안군 군북면 사촌 조용태 집에 머물면서 군북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3월 하순 귀가하여 동지 권영대, 권태용, 진제 상헌 등과 종중선실 일신재에서 고향의 거사 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3월 28일 선생이 지휘한 삼진의거는 국내 4대의거의 하나로 손꼽혔다. 선생은 그날 진양군 남문산에서 동지 서상일, 김관제, 신종목과 만나 앞으로의 제반 사항을 상의하고 곧이어 합천군 초계로 거유 이직현을 방문하여 국사를 담론하면서 그의 근친인 이원화에게 초계의거를 위임하였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위반죄로 심의된 대구 28인 사건의 한 사람이었으나 피신하여 체포는 면하였다. 28인 사건은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며 이에 관련된 사람은 주로 대동청년단원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쳐 활약하는 열혈우국지사들이었다. 곽인협, 김상집 등과 아사동맹회를 조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22년 1년간의 일본 피신 생활에서 돌아와 전남 송절리의 호남물산사장인 종제 상구의 거실에서 의열단의 투사 이종암을 만나 3,000원을 수교하여 상해로 가게 하였다. 다음 해 3월 18일 이종암은 상해 황포탄에서 침략의 원흉 일제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하였다. 22년 7월 선생은 일제헌병에 체포되어 미결수(未決囚)로 6월, 서대문감옥 6월, 함흥감옥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손톱발톱과 살을 찢는 고문에도 결코 굽히지 않아 투철한 독립지사로서 뭇사람의 숭앙을 받았다. 출옥 후 옛 동지들과 망국의 한을 되씹다가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주현, 구여순, 장두관 등 11명이 고려구국동맹회를 조직하여 지하운동에 심혈을 바쳐오던 중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63년 11월 2일 별세하시니 양촌리 뒤산 선영하 양좌원에 부인 안보가와 쌍분으로 잠드시다. 선생의 행적을 어찌 작은 돌에 모두 담을 수 있으랴. 이제 조국의 높푸른 하늘에 저토록 태양이 찬란하듯 선생의 그 거룩한 뜻은 겨레와 함께 영원하리라!
1982년 11월 일
석당선생묘역정화사업위원회 세움.
이 비문을 지은 자는 창원의 역사에 오류를 남기는 죄를 저질렀기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석당선생 기적비 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