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산청 단성면 입석리 창녕성씨부인 열행비

천부인권 2019. 9. 14. 08:49



2018.5.13.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문을마을 성씨부인 열행비


단성면 입석리에서 석대로를 따라 석대리로 가다보면 입석리 문을마을을 만난다. 문을마을은 입구에서 우측으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이곳에는 문을마을 수호신인 나이 350년인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앞 단성면 입석리 270번지에는 비단과 비신, 가첨석을 갖춘 열행비(烈行碑) 1기가 서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0cm, 너비 45.5cm, 두께 21.5cm이며 정면에 권씨부창녕성부인열행비(權氏婦昌寧成夫人烈行碑)라 새겼으며, 비문을 지은 이는 의성(義城) 김황(金榥)이고, 1975년 12월에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열부비가 왜 필요한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시대를 지나 온 역사의 흔적에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덕목으로 효(孝)를 꼽았다. 그러할지라도 여성은 고향을 떠나 시집을 가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므로 효 대신 내리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강인한 생활력으로 일가(一家)를 이루는 뿌리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 한 많은 세상을 겪으며 살아온 그 기백을 높이 사, 뭇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생활을 해온 여성에게 사후에 전하는 후인들의 마음을 담은 표식이 열행비(烈行碑)이다. 비록 지금의 사람들은 의미없다 말할지라도 삶의 고통을 감내해 온 열부의 마음을 기리는 것은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가 이 열부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原文]
權氏婦昌寧成夫人烈行碑
烈婦成氏昌寧人 浮査汝信之后 而鎭佑其父也 生於晉州之中田里 十六而嫁丹城立石里權庸熙 歸 纔二朔 而夫公讀書于外罹疾還家 成氏救療 得寥過二歲 而病復發可劇 殫誠供餌藥禱天 辰竟不獲於命 則乃躬自勉强臨視喪葬饋奠 以其上有舅姑恐太傷慘疚 每怡顔以進慰 晝哭之外 不甚作悽惡狀亦不見其啓齒 夫弟大容年尙幼 撫而育之 以至授室及 其生男則取養爲子 以續夫後 其言曰 凡吾所以不自戕生者以夫子旣沒而上無爲之養下無以爲繼非所以爲夫子地也 今旣得所望矣 吾又安得不以門戶爲計乎於是益力於治家紡績井臼不殫苦勞卒能回亡固存轉危錯安而又未尙自言經歷折拍雖妯娌之密罕得聞者至其臨死而語曰願同歸於夫子之墓則幸矣旣死而隣里見聞者咸咨嗟稱訟曰烈婦 相與醵具酒饌 以祭引路旣 又以是而通告鄕中 發議校宮 是在往歲辛卯 而烈婦享年 爲八十一矣 後且二十餘年 又將豎碑里閭以眎行觀 而嗣子載弼從其里中人來謁余爲文 余曾讀洌水丁氏 爲烈婦論深言 悍戾從死之不可爲訓而 以爲丈夫死 或舅姑老無所養 或諸子女幼無所育 爲死者妻者當忍 其哀黽勉其生 仰而養其無所養者 而爲之葬薶祭祀俯 而育其所無育者 而爲之冠笄嫁娶焉可也 其言儘有理而今成婦之爲烈也 可爲喑合於斯理者矣 乃爲詞以奘之曰 昔漢陳孝婦以孝名 其信於許諾不改其志則莫是之烈也 今此成烈婦以烈名 而其養其所養家其所家 則謂之孝亦無闕也 是知道無二致 而倫常所在可 以反三於擧一矣 請以是標揭而爲行路質焉
檀紀四千三百八年 乙卯 十二月 日
聞韶 義城 金榥 撰


[해문]
권씨부창녕성부인열행비
열부성씨(烈婦成氏)는 본관이 창녕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으로 진우(鎭佑)가 그 부친이다. 진주 중전리(中田里)에서 태어나 나이 16세 때 단성 입석리 권용희(權庸熙)와 결혼 했는데 불과 두 달 만에 남편이 밖에서 독서하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자 성씨가 간호하여 병이 나았다.
2년이 지난 후 다시 병이 도져 위독해지자 정성을 다해 약을 먹이고 하늘에 빌었지만 끝내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이에 억지로 힘을 내어 장사지내는 일과 제수(祭需) 올리는 일을 몸소 살폈다. 위로 시부모가 계시기에 그분들이 지나치게 마음을 상하고 슬퍼할까 염려하여 매양 부드러운 안색으로 위로하면서 낮에 곡(哭)하는 것 외에는 심히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또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아우 대용(大容)은 아직 나이가 어렸는데 잘 보살펴 키워 결혼을 시켰고 남자 아이를 낳자 양자로 들여 남편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위로 시부모를 봉양할 이가 없고 아래로 남편의 뒤를 이을 후손이 없는 터라 죽는 것이 남편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이제 바라는 일을 다 이뤘으니 또한 어찌 집안 살림을 일으키는데 힘쓰지 않을 것인가?”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집안 일에 힘을 써 김쌈하고 물을 긷고 방아를 찧으며 괴롭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망해가는 집을 굳건히 일으키고 위태로운 상황을 돌려 안정시켰다. 또한 일찍이 자신이 겪은 고난과 시련을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어 극히 가까운 동서 간에도 그런 말을 들은 이가 별로 없었다.
그녀가 임종에 이르러 말하기를 ‘원컨대 남편 옆에 묻히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이웃에서 듣고 본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칭송하여 말하기를 열부라 하고 서로 술과 제물을 갖추어 제를 지냈다.
장례가 끝나자 이로써 향중(鄕中)에 두루 알리고 향교에 발의(發議)했으니 이때가 지난 신묘(辛卯, 1951)년으로 열부의 향년(享年)이 81세였다. 그 후 또 20여 년 만에 찾아 마을 입구에 비를 세워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보이고자 하면서 사자(嗣子, 뒤를 이은 아들) 재필(載弼)이 마을 사람과 함께 찾아와서 내게 비문을 청했다.
내 일찍이 열수정씨(洌水丁氏)의 열부론을 읽어 보았는데 남편을 따라 무작하게 죽는 것이 교훈일 수 없음을 깊이 이야기 하면서 말하기를
“남편이 죽음으로써 혹 시부모를 봉양할 이가 없거나 혹 여러 자녀들이 어려서 제대로 키울 이가 없을 때 죽은 이의 아내는 당연히 그 슬픔을 참고 살아서 우러러 봉양할 이 없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러 묘를 짓고 제사를 드려야 하며 아래로 길러 줄이 없는 아이들을 길러 관례와 혼례를 치러 시집 장가를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 말이 진실로 이치에 맞으니 이제 성씨부인이 열부가 되는 것도 이 이치에 상당히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에 사(詞)를 지어 권장하여 이르기를 옛 한(漢)나라 진(陳)나라 효부는 효(孝)로써 이름이 났는데 신의(信義)를 지켜 그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또한 열부가 아니겠는가? 지금 여기 성 열부(成 烈婦) 또한 렬(烈)로써 이름이 났는데 봉양할 이를 봉양했고 일으켜야 할 집을 일으켰으니 효주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에 도(道)는 둘이 아니라 일상의 떳떳한 도리(倫常)에 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를 들어 세 가지를 깨치는 것이로다. 이로써 표지가 되도록 새겨 오가는 행인들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한다.
단기 4308년 을묘(1975) 12월 일
문소(聞韶) 의성 김황(金榥) 찬하다.




출처

단성면지-단성면지편찬위원회/대보사(2019.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