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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 풍영루 영역의 기문과 비문

천부인권 2019. 9. 25. 11:44

 

2019.9.24. 풍영루 영역 전경

 

이번에 ‘주)감성스토리공동체 휴’에서 함양군의 문화유산과 함양산삼엑스포 등의 성공을 위해 “함양 감성여행‘이라는 제목 아래에 여행상품을 만들었기에 창원에서 따라 나섰다. 처음 도착한 곳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이었다.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의 남계서원의 입구에는 ‘남계서원(藍溪書院)’ 표시석이 있는데 뒷면에는 남계서원 제현시장(諸賢詩章)에 나오는 이황(李滉) 선생의 시를 새겨 두었다. 이왕 시를 소개 하는 바에야 아래에는 제현시장(諸賢詩章) 전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계서원 표지석 뒤면

 

제현시장(諸賢詩章)-많은 현인들의 시와 문장

 

이황(李滉)
堂堂天嶺鄭公鄕 당당한 천령 땅은 정공의 고향이라
百世風傳永慕芳 백세토록 풍화 전해 영원토로 사모하는 향기이어라.
廟院尊崇眞不忝 사당 지어 존숭함은 참으로 좋은 일이니
豈無豪傑應文王 문왕(孔子) 따라 일어날 호걸들이 어찌 없겠나.

 

강익(姜翼)
爲憐吾道已寒灰 나의 도가 이미 사그라짐을 가련히 여기노니
月冷鍾城歲幾回 달빛 차가운 종성에서 몇 해를 지냈던가.
澟澟遺風能起敬 선생의 늠름한 유풍 공경을 일으키니
庶今狂簡幸知裁 지금까지 광간한 이들 제어할 줄 아는구나.

 

김진상(金鎭商)
名山之下大賢鄕 이름난 산 아래의 대현마을은
地蘊靈奇人俊良 땅이 신령한 정기를 모으니 어질고 뛰어난 사람이 있네.
戶戶虔誠尊蠧老 가가호호 지성으로 늙은 일두(一蠧)를 존경하고
峰峰洪揖向天王 봉우리마다 천왕봉 향해 공손히 절을 하누나.

 

이정보(李鼎輔)
爲尋遺躅過仙鄕 선현의 유적 찾아 선향을 지나니
百世儒風尙沐芳 백세의 유풍 아직도 고결 하도다.
歎息斯文屬陽九 사문이 액운에 속함을 탄식하노니
無人更識說皇王 삼황오제의 도를 말할 줄 아는 이 없구나.

 

김학순(金學淳)
布衣起嶺右 벼슬 없는 선비 영남 우도에서 일어나니
正學倡吾東 바른 학문이 우리 동방에서 번창하구나.
志合寒暄友 뜻은 벗인 한훤과 합치 하였고
源承圃隱翁 근원은 포은옹을 계승 하였네.
門庭忠孝幷 문정에서는 충효를 겸하였고
俎豆聖賢同 제향은 성현과 같이 받는 다오.
講院多章甫 학문을 닦는 서원에 모인 많은 선비들이
猶聞君子風 오히려 군자의 풍모를 듣는 구나.

 

 

남계서원의 대문인 풍영루


남계서원은 낮은 산자락에 사당을 짓고 아래에 남계서원의 주 강당인 명성당(明誠堂)을 지었으며 그 아래에 동·서재(東·西齋)를 지었고 제일 아래에 대문인 풍영루(風詠樓)가 위치한다. 이곳 풍영루는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잘 관리를 하고 있으며 루의 내부에는 3개의 풍영루 기문을 쓴 편액이 붙어 있다. 아래에는 편액의 내용을 원문과 함께 해석을 하였다.

 

 

 

풍영루(風詠樓) 편액

 

 

風詠樓記-[原文]
蘫院之創設久矣始於周茂陵竹溪之後而創之者惟介菴姜 先生也介菴生于文獻公五十載之下慕先生之德講先生之 道與鄕士若干人同心協贊立祠宇講堂東西齋及前門數十 餘間以爲尊先賢牖後學之地而仍以命名焉各有義若明誠 居敬集義之類是也且夫曰愛蓮曰詠梅者齋前鑿塘塘外築塢 蓮可賞而梅可賦也曰遵道者由是而行道在斯焉於是乎院 之制始大備矣然而學者於講論游息之暇不可無暢敍之所 先父老圖惟經始之未遑者數百年于玆矣迺於庚子秋儒議 復起屬家兄煥祖幹其事蓋以其尊賢衛道夙有誠力故耳于
以營繕百務實檢擧是盧君光表姜君大魯族弟煥龍亦與有 相焉咸以謂與其創立層榭徒取觀美曷若因舊貫增新制恢 拓我胸次也遂就遵道門上葺之以小樓樓凡上下十許間以 翌年辛丑六月二十日落之遠近章甫濟濟趨賀主守姜侯彝 文亦來會揖讓之風進退之節蔚然可觀也夫樓之爲制也不 甚宏傑而奐輪翬革倏然改觀不百尺而逈臨有四望之攸同 郊坰平曠川澤縈洄遙林蔥蒨晩靄依霏巖山數黛入暮雨而 半隱㵢溪一面帶朝旭而全露竹柏前村啼鳥催春䆉稏古巷 老農지秋風月呈美煙霞獻技一瞥千奇恍惚難狀登斯樓也 則心廣神怡涵泳灑落悠然有自得這意矧乎頭流萬疊之峯 花林九曲之流庶可以覽先生之淸風仰先生之氣象恰若列 侍函筵有點也鏗爾舍瑟之趣故因名之風詠樓若遵道舊楣
則介菴之賜號梅菴之心畵列揭于門上以示不泯先賢遺蹟 之意噫曾點夫子之徒也吾儕先生之徒也學夫子而有風乎 詠而之趣則學先生者烏可無一船這箇想耶遂援瑟而爲之 歌曰麗景遲遲兮增乎春服無小無大兮冠童五六鳳凰高騫 兮盍余游息優遊厭飫兮使息得已見大竟兮融理而蛻慾蘫 水之洋洋兮可以浴孤臺之屹屹兮可以風玆樓之適成兮吾 將詠歸渢渢落成之日鄕長老屬余爲之記余以謏識極知僭 汰而長老之勤託有不可孤是爲之記
崇禎四辛丑中庚日
文獻公後孫進士煥弼謹題

 

풍영루기(風詠樓記)-[해문]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창설(創設)된 지 오래되었다. 주무릉(周武陵)이 죽계(竹溪)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뒤에 이 서원을 창설한 자는 개암(介庵) 강 선생(姜先生)이다. 개암은 문헌공(文獻公)보다 50년 뒤에 태어나서 선생의 덕(德)을 사모하고 선생의 도(道)를 강론하였다. 향사(鄕士) 약간 명과 마음을 함께하여 협찬해서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및 전문(前門) 수십여 칸을 세워서 선현(先賢)을 존숭하고 후학(後學)을 계도하는 터전을 삼았다. 이어 명명한 것이 각각 의의가 있었으니, 명성당(明誠堂),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와 같은 부류가 바로 이것이다. 또 애련헌(愛蓮軒)이라 하고 영매헌(詠梅軒)이라고 한 것은, 재사(齋舍) 앞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언덕을 쌓아 연꽃을 감상할 만하고 매화를 읊을 만하였기 때문이다.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한 것은, 이로 말미암아 행하면 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서원의 제도가 비로소 크게 갖추어졌다.
그러나 학자들이 강론하고 유식(游息)하는 여가에 마음을 후련하게 풀 곳이 꼭 필요했지만, 선부로(先父老)들이 공사를 시작할 겨를이 없은 지가 지금 수백 년이 되었다. 이에 경자년(1840, 헌종6) 가을에 유생(儒生)들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 가형(家兄) 정환조(鄭煥祖)에게 그 일을 주관하라고 부탁하였으니, 가형이 현인을 존숭하고 도를 보호하는 데 일찍이 성력(誠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립하는 모든 일을 실제로 점검하여 거행하였고, 노광표(盧光表) 군과 강대로(姜大魯) 군과 족제(族弟) 정환룡(鄭煥龍)도 참여하여 도왔다. 모두들 이르기를 “여러 층의 높은 누(樓)를 창립하여 한갓 외관을 아름답게 하기보다는 옛것을 인하여 새로 지어 우리들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고, 드디어 준도문 위에다가 소루(小樓)를 지으니, 누가 상하 모두 10여 칸이다. 다음 해인 신축년 6월 20일에 낙성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많이들 달려와 하례하고 군수 강후 이문(姜侯彝文)도 참석하여 읍양(揖讓)의 모습과 진퇴(進退)의 절차가 성대히 볼만하였다.
누의 제도가 매우 크거나 빼어나진 않지만 장대하고 아름다운 휘혁(翬革)이 면모를 일신하고, 백 척이 안 되지만 높이 솟아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외(郊外)가 평평하고 넓으며 천택(川澤)이 감싸 흐르고, 멀리 있는 숲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저물녘의 노을은 성대하다. 백암산(白巖山)의 몇몇 짙푸른 봉우리가 저녁 빗속에 들어 반이 숨었고, 뇌계(㵢溪)의 한 방면이 아침 해를 띠고 온전히 드러난다. 대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앞쪽 촌락에선 우는 새가 봄을 재촉하고, 농사짓는 옛 마을에선 늙은 농부가 가을철을 안다. 풍월(風月)은 아름다움을 바치고 연하(煙霞)는 기교를 부리니, 눈 깜짝할 사이의 온갖 기이한 모양을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렵다. 이 누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즐거워지며 함영(涵泳)하고 쇄락(灑落)하여 유연히 이러한 의사를 자득(自得)하게 된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의 만 겹 봉우리와 화림천(花林川)의 아홉 굽이 흐르는 물에서 선생의 청풍(淸風)을 보고 선생의 기상(氣象)을 우러러볼 수 있어서 흡사 강석(講席)에 나란히 모시고 증점(曾點)이 쟁그렁 비파를 내려놓고 대답한 아취(雅趣)가 있는 듯함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인하여 ‘풍영루(風詠樓)’라고 명명하였다. 준도문(遵道門)의 옛 현판은 개암(介庵)이 명명하고 매암(梅菴)이 쓴 글씨이므로, 문 위에 나란히 걸어서 선현의 유적을 민멸시키지 않는 뜻을 보인다.
아, 증점은 부자의 문도이고 우리들은 선생의 문도이니, 증점이 부자를 배워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 아취가 있었고 보면 선생을 배우는 자가 어찌 증점과 똑같은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비파를 당겨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봄의 해가 길고 길어 / 麗景遲遲兮
봄옷을 입었도다 / 增乎春服
작은이 큰이 통틀어 / 無小無大兮
관자와 동자 대여섯일세 / 冠童五六
봉황이 높이 날아오르나니 / 鳳凰高騫兮
어찌 내가 유식하지 않을쏜가 / 盍余游息
실컷 한가롭게 노닐어 / 優遊厭飫兮
스스로 터득하게 하노라 / 使自得
이미 대의를 보았으니 / 已見大意兮
이치를 알아 욕심을 벗어나리 / 融理而蛻慾
넓디넓은 남계의 물은 / 灆水之洋洋兮
몸을 씻을 만하고 / 可以浴
높디높은 외로운 대는 / 高臺之屹屹兮
바람을 쐴 만하도다 / 可以風
이 누가 마침 이루어지니 / 玆樓之適成兮
내 장차 읊조리며 가서 노닐리라 / 吾將詠歸渢渢
숭정사(崇禎四) 신축(辛丑;1841) 중 경일(庚日)
문헌공(文獻公) 후손 진사 환필(煥弼) 삼가 제목을 쓰다.

 

 

 

風詠樓重建記-[原文]
大行王十三年丁未蘫溪書院之風詠樓燬粵三年己酉始克重 建上庠生鄭煥弼一蠧先生裔孫致多士之意命其友生奇正 鎭記之正鎭踧踖不敢卽泚筆先問樓所以命名之由煥弼曰
蓋聞聖人之於道未嘗爲一隅語且言其一二則如山水言仁 智之樂崇卑狀知禮之德堂室況造道之域者皆是也推斯義 也曾氏之沂上風詠與顔子之巷居如愚規模氣像雖有不同 而學者不可廢一而不講也明矣是院之有居敬集義齋者蓋 將追曾孟之志以事體用之學是所謂學顔子之所學而張而 不弛文武不能發舒精神休養性情又鳥可無一段事乎此樓 之所以創於後而命名之不得不然者也正鎭作而對曰不亦 善夫其名之也此固鄙生之所願聞學者之登斯樓入斯齋者 卽齋樓之扁而體認之亦可以不迷於所從矣正鎭又何辭以 贊第念風詠之旨與鳶飛無躍同活潑潑之地豈可但以張弛 言乎哉此事只問天資學力曾氏惟天資高能不由階級而優 見大意無曾氏之天資而慕曾氏之風詠非學力何以哉惟守
之久而後居之安居之安而後資之深資之深而後左右逢其源 於是乎舍瑟之對在吾方寸間矣所守之地豈有他哉不過所 謂敬與義而已先生之淵源實學雖非後生蠡測集諸先生之 尙論而想像之蓋所謂不動而敬不言而信者其深厚篤實何 如也及昧孤舟下江數句則隱然有風浴氣像此豈懸慕企望 而得之哉守之久而自至耳正鎭衰遲錮廢雖不獲進於藏修 之列願與諸君子相勉焉院有正宇以享先生而桐溪介菴二先生配侑焉有別祠㵢溪松灘二先生享之頭流白巖蘫溪渭 水皆眺望山水之可記者云
崇禎四己酉臈月下澣後學幸州奇正鎭 謹撰

 

풍영루중수기-[해문]
대행왕 13년(1847) 정미(丁未)에 남계서원의 풍영루(風詠樓)가 화재를 입어 3년을 경과한 기유년(己酉年)에 비로소 거듭 짓게 되었다. 상상의 유생 정환필(鄭煥弼)은 일두(一蠧)선생의 후손으로서 많은 선비의 뜻을 알리면서, 그의 벗인 기정진(奇正鎭)에게 기문을 부탁하거늘 정진은 조심스러워 감히 곧 붓을 잡지 못하고, 먼저 루(樓)에 명명된 이름을 물으니, 환필이 이르기를 “대개 들으니 성인은 도에 대하여 일찍이 한 모스리만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한·두 가지를 말한다면 산과 물로써 인자와 지자의 좋아함을 말하고 높고 낮음으로써 예를 아는 덕을 형상하고 당(堂)과 실(室)로서 동에 이르는 경지를 비유한 것이 모두 이것이니라. 그 뜻을 미루어 본다면 증씨의 기수변에서 바람 쐬이고 시 읊조림과 안자의 더러운 골목에 살면서도 어리석은 듯 했던 것이 규모와 기상은 비록 같이 않음이 있으나 배우는 자가 하나라도 폐하고 강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니라. 이 서원에 거경 집의의 재가 있음은 대개 증씨와 맹씨의 뜻을 쫓아서 체용(體用)하는 학문을 일삼는 것이니라. 이것이 이른바 안자의 학문하는 바를 배우면서 긴장하기만 하고 조금도 풀지 않으면 문과 무도 능히 못한 것이다. 정신을 발서 하고 정신을 휴양하는데 어찌 가히 한 계단의 일이 없겠는가. 이리하여 누(樓)를 후일에 창설하게 되었고, 이름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진이 일어나면서 대답하기를 “그 이름 한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 이것이 진실로 우리들이 듣기를 원하던 바이니라. 배우는 자로서 이 누에 오르고 이 재에 들어와서 재와 누의 현판에서 그 뜻을 깨달아 안다면, 쫓은 바에 있어 아득하게 멀지 않을 것이니라. 정진이 또 무슨 말로 돕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바람 쐬이고 시 읊조린다는 뜻이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것과 같은 자연이 활발한 경지이니, 어찌 다만 긴장과 늦추는 것만으로 말할 것인가. 이 일은 다만 타고난 자질과 학문하는 힘만을 물을 것이니라. 증씨는 타고난 자질이 높아서 능히 계단을 말미암지 않아도 큰 뜻을 넉넉히 모았던 분이니라. 그러나 증씨의 타고난 자질은 없으면서 증씨의 바람 쐬임을 사모함은 학문하는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하리오. 오직 지켜서 오래된 다음이라야 거함이 편안해지고 거함이 편안한 뒤라야 밑천으로 삼음이 깊어지고, 밑천으로 삼음이 깊어진 뒤라야 좌우로 모두가 그 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니라. 이런 다음이라야 비파를 밀치면서 부자에게 대하던 뜻이 나의 가슴 속에도 있게 되나니 그렇다면 지키는 것에 어찌 딴 것이 있으리오. 이른바 경과 의에 불과 하나니라. 선생의 연원하신 실학은 비록 후생이 헤아릴 수 없으나 선생의 아름다운 언론을 모아서 상상하건데, 대개는 이른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스럽고 말하지 않더라도 미덥다는 것이니, 그 심오하신 학문과 독실했던 행실이 어떠하였던가. 또한 “외로운 배로 큰 강을 내려간다.”라는 글귀를 음미하니, 은연중에 무에 바람 쏘이고 기수에서 목욕하겠다던 기상이 있느니라. 이는 어찌 멀리 사모하고 바람으로서 얻어진 것이리오. 지킴이 오래되면 절로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니라. 정진이 늙고 고질이 있어 비록 그곳의 공부하는 반열에 달려가지는 못하나 여러분과 더불어 권면하기를 원하나이다. 서원에 정우가 있어 선생을 향사하면서 동계(桐溪)와 개암(介菴) 두 선생을 배향하고, 별사에는 뇌계 송탄(㵢溪 松灘) 두 선생을 봉향 하니라. 두류산 백암산과 만계와 위수는 모두다 조망이 아름다운 산수로서 가히 기록할 만하니라.
숭정사(崇禎四) 기유(己酉;1849) 납월 하한(臈月下澣)
후학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 삼가 짓다.

 

 

 

風詠樓重修記
天嶺吾東之鄒魯 而蘫溪其闕里也 一蠹鄭先生享焉 先生者道學之祖也 蘫溪者書院之宗也 其門遵道往在景陵庚子 樓其上榜曰風詠丁未災 己酉重建間常葺庀 而歲積屋老不可 以久安於是遠近章縫咸咨 嗟 而言曰 斯樓 而㢒者吾林之羞迺於九十三年丁丑易其舊 而改築制度遵舊 而完美殊勝 自正祠講堂 以及東西齋之小㢒者幷皆一新粤三年庚辰冬 諸章甫責丙承 以記楣顧甚耗昏安敢終辭 嗚呼 今天下何世夫 以堯舜三王之所 治孔孟程朱之所 敎之華夏禮樂絃誦之聲寥寥者已久 則吾東之粤至于 今日亦無柰 氣數何諸君子乃以 此時能重建斯樓 以新士子之觀 瞻將尋先生之墜緖 雖其秉彛之衷 有不期然 而然者先生之遺風餘韻尙未盡泯於 此亦可觀焉 所謂文武之道未墜於地者 非耶皓天之復愚將拱手 而竢之若 其名樓之意 則肖孫上舍公煥弼蘆沙奇文簡公正鎭之記剖 盡無餘蘊學者 由是而求之庶可 以得其門 而入玆不更贅
是歲陽復篰後學驪興閔丙承 謹記

 

1940년 민병승(閔丙承)이 쓴 풍영루중건기(風詠樓重建記)는 현재로서는 소개한 책과 온라인(on-line)에도 없는 상태이다. 혹시 남계서원에서 중건기를 해석했거나 기록한 책이 있는지 알아보고 없으면 다시 해석을 하여 올리도록 할 것이다.

 

風詠樓重修記
天嶺吾東之鄒魯而灆溪其闕里也 一蠹鄭先生享焉 先生者道學之祖也 灆溪者書院之宗也 其門遵道往在 景陵庚子樓其上榜曰風詠丁未災 己酉重建間常葺 而歲積屋老不可以久安 於是遠近章縫咸咨 嗟 而言曰 斯樓而者吾林之羞迺於九十三年丁丑易其舊 而改築制度遵舊 而完美殊勝 自正祠講堂 以及東西齋之小廬者 幷皆一新粵三年庚辰冬 諸章甫責丙承 以記楣顧甚耗昏安敢終辭 嗚呼 今天下何世夫 以堯舜三王之所 治孔孟程朱之所 敎之華夏禮樂絃誦之聲寥寥者己久則吾東之粵至于今日亦無奈氣數何諸君子乃以此時能重建斯樓以新士子之觀瞻將尋先生之墜緖雖其秉彝之衷有不期然而然者先生之遺風餘韻尙未盡泯於此亦可觀焉所謂文武之道未墜於地者非耶皓天之復愚將拱手而竢之若其名樓之意則肖孫上舍公煥弼蘆沙奇文簡公正鎭之記剖盡無餘蘊學者由是而求之庶可以得其門而入玆不更贅
是歲陽復節後學驪興閔丙承謹記
1940

 

출처

함양누정지-함양문화원/대보사(2001.10.30)

남명학고문헌시스템-경상우도지역 기록류/ 蘫溪書院誌卷之一

한국서원이야기-남계서원지(전문)/박성진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蘫溪書院誌卷之一 남계서원기(灆溪書院記)/강익(姜翼)